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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정권 때의 일이다. 내가 방송작가로 일하고 있던 방송국에서는 세월호 사고 후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를 오랫동안 할 수 없었다. 시사 프로그램들은 큐시트와 출연자를 사전 보고 해야 했고,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세월호 관련 아이템은 물론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다. 매우 공고한 방송 가이드라인이었다. 내부적으로 많은 저항도 있었지만, 경영진의 거센 압박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때 다들 했던 말이 있다.

"전두환 때도 이러진 않았겠다."

그런 일을 경험하며 절감했다. '규제'나 '검열'이 얼마나 비열하고 끔찍한 폭력인지. 그래서 방송 규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민감해진다. 방송이 정치 논리에 좌우되지 않고, 다양한 시선과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조금이나마 겪었기 때문이다.

근래, 지난 12일 여성가족부(이하 여가부)에서 낸 '성평등 방송 프로그램 제작 안내서(아래 안내서)'로 와글와글거렸다. 괜찮을 줄 알았던 이번 정부에서 규제와 검열에 대한 뉴스가 터지다니, 무슨 이야기인가 싶었다. 포털사이트 뉴스의 제목은 걸러서 본 지 오래 되었지만, 제목들만 보면 엄청난 일이 벌어진 느낌이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했길래 이렇게 난리인가 싶어 찾아봤다.
 
 여성가족부 ‘성평등 방송 프로그램 제작 안내서’와 부록인 ‘방송프로그램의 다양한 외모 재현을 위한 가이드라인’
 여성가족부 ‘성평등 방송 프로그램 제작 안내서’와 부록인 ‘방송프로그램의 다양한 외모 재현을 위한 가이드라인’
ⓒ 민주언론시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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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프로그램이 '못생긴' 사람을 대하는 방식

여가부 발표에 따르면, 안내서에는 "방송을 기획‧제작‧편성하는 모든 과정에서 방송사‧제작진‧출연자들이 꼭 한번 점검해 보고 준수해야 할 핵심사항"이 담겨 있다. 논란이 된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의 다양한 외모 재현을 위한 가이드라인(아래 가이드라인)'이 포함된 부록이다. 이 부록에는 방송 콘텐츠 제작자들에게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외모를 보여주라'고 권고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외모로 성품, 능력 및 성적 매력을 유추하게 하는 기획, 연출 및 표현 사용을 자제할 것, 바람직한 외모 기준을 획일적으로 제시하지 말 것, 출연자들의 외모를 희화화하거나 비하하지 말 것 등이다. 예능이든 드라마든 제작할 때, 우리나라 전반에 과도하게 퍼진 외모 지상주의를 인지하고, 그것을 깨기 위해 노력해 달라는 의미다.

사실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외모를 두고 비하하거나 성 평등 의식과 거리가 먼 발언이 쏟아질 때마다 불편했던 터라, 안내서의 이런 방향성에서는 전혀 문제점을 못 찾겠다. 여전히 TV에서는 뚱뚱하거나 예쁘지 않은 사람은 폭탄 취급과 동시에 무시를 당한다. 그리고 뚱뚱하거나 못생긴 캐릭터는 하나같이 주책맞거나 모자라거나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로 설정되곤 한다.

예능 프로그램에 아이돌이 출연할 경우, 애교를 부리도록 하고 그 모습에 사르르 녹는 듯한 뻔한 리액션을 보며 '아직도 저런 걸 해?' 하는 느낌은 이제 말하기도 입이 아플 정도다. 방송 계통에서 일하고 있지만, 이럴 땐 방송 제작하는 사람들이 이슈에 가장 빠르게 접근하면서도, 오히려 기존 방송 문화의 틀을 깨거나 새로운 걸 받아들여 반영하는 데에는 보수적이라는 아이러니한 느낌이 들곤 한다.

딱히 특별하지 않은 이 안내서에서 논란의 불씨가 된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의 다양한 외모 재현을 위한 가이드라인'에 사용된 몇몇 문구다. 안내서 부록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서 획일적인 외모 기준을 제시하는 연출 및 표현의 사례로, 음악방송 출연자들을 예로 든 것이 문제였다.

'비슷한 외모의 출연자가 과도한 비율로 출연하지 않도록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는데, 여기서 아이돌 그룹이 언급되다 보니, 논란이 커진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음악방송 출연가수들은 모두 쌍둥이?"라는 제목 아래 "대부분의 아이돌 그룹의 외모는 마른 몸매, 하얀 피부, 비슷한 헤어스타일, 몸매가 드러나는 복장과 비슷한 메이크업을 하고 있다. 외모 획일성은 남녀 모두 같이 나타난다"는 설명이 붙었다.

작고 갸름한 얼굴, 큰 눈, 흰 피부만이 바람직한 외모는 아니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획일적인 이미지들이 홍수처럼 소비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그런데 이 내용이 아이돌 그룹의 외모 검열, 외모 규제로 논란이 확산되었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이 적절했는지, 혹 가이드라인이 규제나 검열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지로 불씨가 옮겨 붙은 것이다.

이게 이렇게 난리를 칠 일인가
 
 하태경 의원 페이스북
 하태경 의원 페이스북
ⓒ 화면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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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 가이드라인의 문제가 된 구절을 요약하면 간단하다. '외모의 다양성을 고려하라', '상황에 맞지 않는 노출을 자제하라'는 것. 이 구절들은 방송법에서 규제하는 내용과 어긋나지 않는다. 그래서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게 이렇게 난리를 칠 일인가 싶다. 도대체 왜 이렇게 가이드라인의 주요 내용은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리고 달이 아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일이 벌어졌을까.

먼저 한 경제지가 "음악방송 가수들은 쌍둥이?… 여가부 성평등 방송제작 지침"으로 기사를 내면서 논란이 시작되었다. 여기에 정치권까지 가세하면서 불이 붙었다. 이어서 쏟아진 기사 제목들을 보면,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제목들이다. 심지어 '진선미표 보도지침'이라는 악의적인 기사 제목도 눈에 띈다. 사람들의 인터뷰도 이런 맥락을 충실하게 따른다. 한 뉴스에서 나온 시민들의 반응들이다.

"출연을 규제할 게 아니라 사회의 전반적인 인식을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되는 거죠."
"규제의 필요성은 느끼지만, 그게 과연 여가부의 관할인지에 대해서는 동의를 하지 않는…"


그런데 안내서나 부록의 내용을 살펴보면, '규제'나 '보도지침'이라는 말은 제작 안내서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 말은 언론과 국회 등에서 나온 말이다. 가이드라인을 규제나 보도지침으로 인식하게끔 둔갑시킨 나쁜 말장난이다.

이번 안내서는 방송법에 따른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 30조에 따라 작성된 것으로, '권고안'이라는 것이 첫 부분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여가부가 사회의 전반적인 인식을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지, 왜 관할이 아닌 일을 하냐는 비난은 과연 맞을까?

제30조(양성평등)
① 방송은 양성을 균형있고 평등하게 묘사하여야 하며, 성차별적인 표현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개정 2014. 1. 15.>
② 방송은 특정 성(性)을 부정적, 희화적, 혐오적으로 묘사하거나 왜곡하여서는 아니된다. <개정 2016. 12. 28.>
③ 방송은 특정 성을 다른 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다루거나 객관적인 근거 없이 특정 성의 외모, 성격, 역할 등을 획일적으로 규정하는 내용으로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조장하여서는 아니 된다. <개정 2014. 1. 15., 2016. 12. 28.>
④ 방송은 성폭력, 성희롱 또는 성매매, 가정폭력 등을 정당화할 우려가 있는 내용을 방송하여서는 아니 된다. <신설 2016. 12. 28.>
⑤ 방송은 성폭력, 성희롱 또는 성매매 등을 지나치게 자세하게 묘사하거나 선정적으로 재연하여서는 아니 된다. <신설 2016. 12. 28.>
 

이런 가이드라인을 여가부에서 만들지 어디서 만들까. 방송법의 하위 규정인 심의규정 30조를 실천하기 위한 이번 안내서는 성 평등을 담당하는 부서로서 반드시 해야 할 업무인 것이다.

가이드라인→보도지침→규제→검열... 누가 만든 고리인가?

이번 논란의 핵심은 '(외모) 가이드라인'이란 용어이다. 가이드라인이 보도지침으로, 보도지침이 규제, 검열로 연결되어 강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한번 정부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가이드라인'이란 단어를 넣어 검색해 봤다. 그러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동안 가이드라인이라는 단어로 정리된 정책 자료가 얼마나 많은지.

실제 법과 규정에 근거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서 법규를 잘 지키도록 돕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거 전두환 정권 시절, 권력의 입맛에 맞게 강제하기 위해 실재했던 '보도지침'을 이번 가이드라인에 덮어씌운 것이다. 분명히 다른 의미의 이 두 가지를 혼동했나 싶었는데, 설마 그 정도로 무지할 리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믿고 싶다. 진짜 몰랐다면 그건 더 큰일이니까.)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은 "여가부는 아이돌 외모 지침 없애고 진선미 장관은 사과해야 한다"고 연일 각을 세우지만, 하 의원이 말하는 건 가이드라인이 아니라 전두환 시절의 보도지침 같은 거다. '가이드라인'이라는 단어의 의미와 용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것이 전두환 시절 실제로 존재했던 '보도지침'과 같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걸 두고 진선미 여가부 장관에게 여자 전두환 운운하는 것은 매우 억지스러운 할리우드 액션 같다. 실제로도 안내서에는 '권고안'이라고 쓰여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 모르는 척 하면서 물어뜯는다.

표현 하나 잘못했다고 부서 폐지하자고 나서는 거 아닌가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진짜 그럴 분위기다. 하태경 의원은 반헌법적 발상에 대해 사과하지 않으면 여가부를 반헌법적 기구로 명시하고 여가부 해체 운동에 들어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어쩐지 이 대목에서 요즘 그가 페미니즘의 반대 기수로서의 노선을 공고히 하고자 하는 진짜 의도가 보인다. 여가부에 대해서 갖고 있던 반감을 '기회는 이때다' 하면서 달려든 느낌이다. 여가부의 역할에 대해서는 무조건 찬성하는 바는 아니지만, 잘 만들어진 이 안내서가 하태경 의원이 말한 식으로 폄훼당하는 건 안타깝다.

방송장악 시도네, 외모 통제네, 하며 핏대를 세우고 있는 사람들은 지난 정권에서 저지른 방송장악 사태에 대해서는 왜 그리 침묵했을까. 또 꼭 필요한 일을 여가부 폐지라는 남녀갈등 조장의 선상에서 '오냐, 너 잘 걸렸다'며 물고 뜯는 정치인들의 행태도 한숨 나온다. 또 무책임하고 게으르게 논란에 부채질을 더한 보수지와 경제지, 방송사의 책임도 크다. 만약 진짜 언론 통제나 규제가 있다면, 저런 기사를 쓸 수나 있었을까. 제대로 말할 수 없었던 지난 정권에서의 서늘한 기억이 여전히 생생한 나는 이번 사안을 둘러싼 논란이 필요 이상의 호들갑으로 느껴진다. 정말 비판할 걸 비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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