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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를 이용해 수행비서를 수차례 성폭행한 혐의를 받았다가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2심 첫 공판이 지난 21일 열렸다. 2심 재판부인 서울고등법원 형사12부(홍동기 부장판사)는 앞으로 총 네 차례 공판을 진행한 뒤 2월 1일 선고할 방침이다. 1심 재판부인 서울서부지방법원 형사합의11부(부장판사 조병구)는 "위력에 의한 성폭력으로 보기 어렵다"며 안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2심이 시작된 지금 1심 판결의 문제점을 되짚어본다.[편집자말]
우리나라는 공식적으로 '법치주의' 국가이다. 이는 국가가 강자의 개인적 의사나 판단에 따라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법률에 의해 운영되는 국가라는 의미다. 그리고 법률은 국민이 선출한 국회의원이 만들고, 이를 기준으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사법부의 판사가 한다. 

여기 두 판사가 있다. 여론의 관심이 집중된 재판이 진행되었고, 피고인의 혐의 또한 유사했으며, 판결 또한 언론보도에 오르내리며 큰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판결 이후의 사회적 반응은 매우 달랐다. 한 쪽은 미국 미시간주 랜싱 법원의 로즈마리 아킬리나 판사이고, 다른 한 쪽은 서울서부지방법원의 조병구 부장판사이다. 

 아킬리나 판사는 지난 30여년간 미 체조 국가대표팀과 미시간 대학 체조팀의 의사로 재직하며 최소 156명의 어린 선수를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구속된 래리 나사르의 재판을 담당했다. 그리고 조병구 부장판사는 자신의 비서에 대한 성폭력 혐의로 구속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재판을 담당했다.  

두 재판 모두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가진 남성이 자신의 '위력'(사람의 의사를 제압할 수 있는 유형적·무형적 힘)을 행사하여 성폭력을 저지른 혐의로 구속된 사건이었다. 하지만 재판 결과는 상반되었다. 아킬리나 판사는 175년형을, 조병구 부장판사는 무죄를 선고하였다.
 
    두 사람의 사건은 모두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여론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두 사람의 사건은 모두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여론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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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극단적일 정도로 다른 결과가 나왔을까? 단순히 두 나라 사이의 사법체계나 사회문화적 요인이 달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나사르의 죄질이 안 전 지사에 비해 특히 더 나빠서?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회적·정치적 권력을 가진 남성이 자신보다 어린 여성을 대상으로 벌인 성범죄라는 사실에 있어서 두 사건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안 전 지사를 담당한 조병구 부장판사는 선고문에서 '피고인이 유력 정치인이고 차기 유력 대권주자로 거명되고 있는 지위 및 도지사로서 별정직 공무원인 피해자의 임면 등 권한을 가지고 있는 점'을 인정하며 강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지위에 있음을 명시하였다. 

또한, 최초 사건 당시 피해자가 '심리적으로 얼어붙는 상황일 정도로 매우 당황하여 바닥을 쳐다보며 중얼거리는 방식으로 거절의 의사를 표현하였다'고 인용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심 재판부는 피고인에 대한 모든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가 무죄로 판단한 이유는 간단했다.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고, 피고인을 위해 여러 가지 일들을 수행하였으며, 사건 이후에도 피고인에 대한 지지와 존경의 의사를 표명했다는 것이다.
   
 외부의 공적인 개입이 없을 때, 개인이 어떤 권력자나 구조에 맞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법정을 소재로 삼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선량한 주인공이 재판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꼭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늘 순응하며 살아왔지만 갈등과 고민 끝에 양심에 따라 증언대에 서는 '내부자'들이다. 왜일까? 그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을 결단하는 등장인물의 행동이 주는 임팩트와 그로 인한 드라마틱한 전개 때문은 아닐까. 뒤집어 말하면, 현실에서 그러한 행위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보여주는 씁쓸한 단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스노든, 1987, 제보자 이 세 영화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내부에 감추어진 부정을 고발한 '공익제보자'가 등장한다.
  스노든, 1987, 제보자 이 세 영화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내부에 감추어진 부정을 고발한 "공익제보자"가 등장한다.
ⓒ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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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고, 성실히 피고인의 요구에 따라 업무를 수행했으며, 사석에서도 피고인에 대한 지지와 존경에 대한 의사를 표명했다는 것만으로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는 스스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폭력과 억압에 노출된 개인이 공포와 위력에 의해 얼마나 무기력해지고,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몰리는지 이해하지 못함'

법률은 윤리와 도덕마저 무너져 작동하기 어려울 때 약자를 지키고 정의를 실현하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한다. 이번 판결은 '최소한의 도덕'이라고 불리는 법률마저도 무너뜨리는 사건으로 보인다. 마치 인류멸망 이후의 황폐한 세계를 소재로 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과학소설을 보는 느낌일 정도로 현실감조차 들지 않는다.
   
아킬리나 판사가 판결 이후 큰 화제가 되었지만 찬사를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견디다 못한 당사자들이 도움을 요청했을 때, 미시간 대학도, 체조협회도, 올림픽 위원회도 이를 묵인하고 외면했지만 법정에서 수많은 당사자들의 증언을 듣고 그들의 용기에 경의를 보내며 그간의 고통을 위로한 이는 오로지 그녀뿐이었다. 물론, 법정으로 오기 전에 이러한 문제가 애초에 발생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 맞는 일이다. 하지만, 공적인 제도나 윤리가 무력할 때 적어도 법을 통한 정의라는 최후의 보루가 존재하고 있음을 아킬리나 판사는 몸소 보여주었다.
   
 2018년 1월 24일(현지시간) 미국 미시간주 랜싱 법원에서 로즈마리 아킬리나 판사가 미국 체조선수들을 장기간 상습적으로 성폭행·성추행한 미국 체조대표팀 주치의 래리 나사르를 보고 있다. 나사르는 무려 30년간 156명에 이르는 체조선수들을 자신의 치료실에서 성추행·성폭행 해왔다. 아킬리나 판사는 이날 나사르에게 징역 40~175년을 선고하며 "방금 당신의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했다. 당신은 다시는 감옥 밖으로 걸어서 나갈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2018년 1월 24일(현지시간) 미국 미시간주 랜싱 법원에서 로즈마리 아킬리나 판사가 미국 체조선수들을 장기간 상습적으로 성폭행·성추행한 미국 체조대표팀 주치의 래리 나사르를 보고 있다. 나사르는 무려 30년간 156명에 이르는 체조선수들을 자신의 치료실에서 성추행·성폭행 해왔다. 아킬리나 판사는 이날 나사르에게 징역 40~175년을 선고하며 "방금 당신의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했다. 당신은 다시는 감옥 밖으로 걸어서 나갈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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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가해자의 행위가 아닌 피해자가 어떠한 모습을 보였는지를 기준으로 삼아 판결을 내렸다. 피해자가 스스로 범죄의 피해를 받지 않기 위해 예방도 해야 하고, 피해를 입은 후에는 그에 걸맞은 '행동거지'를 보여야 피해자로 인정받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법률조차 약자에 편에 서지 않는 현실 속에서 또 많은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정의를 부르짖어야 했다.
 
아픔은 여기 남겨두고 밖으로 나가 더욱 위대한 일을 하길 바랍니다

자신의 잘못이라며 스스로를 자책하는 피해자들에게 아킬리나 판사가 건넨 말이다. 이런 따뜻한 말을 건네는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법이 수치스럽지는 않은 그런 법원을, 판사를 보고 싶다.

덧붙이는 글 | 김희성 기자는 서울시 청년명예시장이자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실행위원회 이사입니다. 이 글은 서울청년정책LAB 블로그 및 페이스북에 2018년 8월 21일 실린 글을 일부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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