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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흥미진진한 스포츠 경기라도 결과를 알고 보면 긴장감이 덜하기 마련이다. 지난 역사도 그렇다. 스포츠로 말하면 승패가 갈린 승부를 들추어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역사를 회고할 때, 그 당시가 얼마나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었는지 잊기 쉽다.

그러나 마이클 돕스의 <0시 1분전>(원제 One Minute to Midnight)은 역사가 갖는 특유의 무미건조함을 과감하게 깨뜨린다. 먼저 이 책의 주제부터 살펴보자. 

이 책의 주제는 쿠바 미사일 위기다. 얼핏 뜬금없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미·소 냉전이 핵전쟁으로 비화될 뻔한 위험천만한 사건이었고, 이에 수많은 연구자들이 매달렸다.

하지만, 이제 냉전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진 지 오래고, 쿠바 미사일 위기의 기억도 희미해져 가고 있는 와중이다. 간간히 올리버 스톤의 <JFK>나, 매튜 본의 <엑스 맨-퍼스트 클래스> 같은 영화를 통해 그런 일이 있었다고 회상할 뿐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냉전의 자식'이라고 칭하는 저자 마이클 돕스는 박제화 되다시피 한 이 역사적 사건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이 책이 바로 <0시 1분 전>이다(저자 마이클 돕스는 이 책 이후 얄타회담을 다룬 <1945>를 내놓는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강점은 풍부한 디테일이다. 우선 쿠바 미사일 위기의 주요 등장인물을 살펴보자. 우선 존 F. 케네디, 니키타 흐루쇼프, 피델 카스트로 의장이 주연이다. UN주재 미 대사였던 애들레이 스티븐슨의 이름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상황은 미·소 초강대국간 핵전쟁 위기였기에 양국 최고위 권력자는 전면에 등장해 상황을 주도했다. 

"역사는 수많은 개인들의 행동의 산물"
 
쿠바 미사일 위기의 이면을 소개한 마이클 돕스의 <0시 1분 전>
 쿠바 미사일 위기의 이면을 소개한 마이클 돕스의 <0시 1분 전>
ⓒ 지유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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돕스는 여기에 법무장관이자 대통령의 친동생 로버트(바비) 케네디, 미국 주재 소련대사 아나톨리 도브리닌, 미 공군 참모총장 커티스 르메이 그리고 지휘체계 최말단에 놓인 미구엘 오로스코와 페드로 베라까지, 이제껏 알려지지 않았던 수많은 조연을 역사의 무대로 끌어 올린다.

특히 이사 플리예프 쿠바 주둔 소련군 사령관, 미사일 장교 세르게이 로마노프, 모스크바 인근 시골 마을 출신으로 쿠바에 배치됐다가 사고로 사망한 빅토르 미헤예프 등 쿠바에서 활약했던 옛 소련군 병사들의 이름은 듣기에도 신선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름들의 존재는 쿠바 미사일 위기가 몇몇 주요 행위자들은 물론, 수많은 조연들이 이뤄낸 대서사시임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저자의 역사인식이 번득이는 지점이기도 하다.
 
"결국 역사는 수많은 개인들의 행동에 의해 이루어진다. 유명인이 있는가 하면 일반인도 있다. 아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성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사람도 있다. 사태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연히 정치 무대에 올라가는 사람도 있다." - 본문 52쪽 

디테일이 풍부하면 자연스럽게 생동감이 생기는 법이다. 저자가 소개한 풍부한 디테일은 쿠바 미사일 위기라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절체절명의 순간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앞서 역사는 승부를 알고 보는 스포츠 경기라고 적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어떻게 불거졌고, 어떤 식으로 결말이 났는지 이제 잘 안다. 

역사를 다시 돌이켜 보자. 미사일 위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출현한 미·소 냉전 구도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위기 물밑에서 치열하게 펼쳐진 막후대결을 명확하게 인식하는 이들은 별로 없다. 

미국과 옛 소련은 왜 하필 카리브 해의 작은 섬나라 쿠바에서 충돌했을까? 막강한 정보력을 가진 미국이 당시 쿠바에 배치한 옛 소련의 핵무기 전력이 어느 정도 규모인지 파악조차 못했을까? 옛 소련은 어떻게 미국의 눈을 속이고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쿠바에 실어 날랐을까?

왜 쿠바는 옛 소련의 핵무기를 끌어들였을까? 미국은 쿠바가 옛 소련의 핵미사일을 들여오는데 왜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했을까? 등등 사태를 둘러싼 의문에 대해선 속 시원히 답할 사람들은 별로 없다. 이 책 <0시 1분전>은 바로 이런 질문들에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 준다. 

미-소-쿠바, 냉전 트라이앵글  

먼저 쿠바가 소련의 핵무기를 들여온 배경부터 짚어보자. 피델 카스트로는 1959년 동지인 체 게바라와 함께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다. 이러자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카스트로를 제거하고 쿠바를 공산주의자의 지배에서 해방시키려 했다. 

실제 미 중앙정보부(CIA)는 쿠바 출신들을 규합해 체제 전복을 시도했으나 작전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피델 카스트로는 미국의 체제 전복 시도가 부담스럽기만 했다.

여전히 반혁명 세력이 준동하는 데다, 체제 내부에서의 도전도 거셌기 때문이다. 이에 카스트로는 미국의 최대 적국인 옛 소련과 손을 잡기로 결정한다. 옛 소련은 쿠바의 구애에 적극 응했다. 이런 데에는 당시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의 야심이 강하게 작용했다. 

옛 소련이 국제사회에서 초강대국으로 대접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핵무기였다. 그러나 냉전시기 미국은 강력한 봉쇄정책을 펼쳤고, 이런 정책은 옛 소련을 압박하기에 충분했다. 자존심 강한 흐루쇼프는 힘의 열세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더구나 당시는 중국이 공산권의 맹주 자리를 위협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만약 자신이 이끄는 소련이 쿠바와 동맹을 맺고 그곳에 핵무기를 배치할 수 있다면, 말 그대로 적의 심장부를 겨누는 셈이다. 흐루쇼프로서는 나쁜 선택이 아니었던 것이다. 

옛 소련의 태도는 비단 정치논리에서만은 아니었다. 러시아인들은 쿠바 혁명에서 과거 소비에트 관료 체제 이전 러시아 혁명 상황을 떠올렸다.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기 전만해도 소련인 대부분은 지도에서 쿠바를 제대로 찾지도 못했다. 5년도 지나지 않아 소련인들의 머릿속에서 쿠바는 멀고 먼 카리브 섬에서 냉전의 최전선으로 바뀌었다. (중략) 소련인 다수가 카스트로의 혁명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러시아 혁명이 경직되기 전의 상황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 본문 340쪽 

반면 미국은 본토가 소련제 미사일의 사정권에 들어온다는 전제를 한사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쿠바 위기가 미·소 핵전쟁 위험으로 상승한 이유도 실은 여기에 있다. 

다행히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케네디와 흐루쇼프를 비롯한 위기의 주역들은 핵전쟁이 인류공멸로 이어질 것임을 명확히 인식했기에 파국은 가까스로 면할 수 있었다. 단순히 과거지사라고 치부할 수도, 우리나라와는 상관없는 일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를 사는 우리들은 당시 위기의 주인공들이 인류의 미래를 위해 냉전 논리를 초월해 공생을 선택했고, 인간애를 구현했다는 사실에 늘 감사해야 한다. 역사에서는 '만약'이란 질문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만약, 위기의 주인공들이 앞뒤 재지 않고 핵무기 버튼을 눌렀다면? 위기가 최고조에 이른 1962년 10월 28일 이후 인류는 아예 종적을 감췄을 것이다. 

미국과 쿠바 양국은 지난 2015년 7월 국교 정상화를 공식 선언했다. 양국의 국교 정상화는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56년 만에, 그리고 1961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쿠바 혁명을 이유로 국교를 단절한 지 54년 만에 이뤄졌다.

과거 양국이 전인류를 파멸시킬 위기상황까지 치달았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70년 대결의 역사를 끝내고 남북화해의 새 시대로 접어드는 우리에겐 훌륭한 귀감이기도 하다.

그러나 2017년 11월 트럼프 현 행정부는 국교 정상화를 뒤집고 쿠바에 대한 제재조치를 복원시켰다.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0시 1분 전 -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했던 순간

마이클 돕스 지음, 박수민 옮김, 모던타임스(2015)


태그:#마이클 돕스, #0시 1분전, #피델 카스트로, #풀헨시오 바티스타, #쿠바 미사일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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