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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년전 8월 3일 이야포 피난중 이야포에서 미군폭격으로 네명의 가족을 잃은 이춘혁씨는 매년 이맘때 이 해안에서 추모제를 지난후 폭격지를 가르키고 있다
 68년전 8월 3일 이야포 피난중 이야포에서 미군폭격으로 네명의 가족을 잃은 이춘혁씨는 매년 이맘때 이 해안에서 추모제를 지난후 폭격지를 가르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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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 3일에 발생한 '여수판 노근리 학살사건'이 재조명 되고 있다. 바로 '이야포 미군폭격사건'이다.

이 사건은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이야포 포구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피난민들이 무참히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미군 폭격기 4대가 피난민을 태운 배를 북한군 배로 오인한 폭격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죽어간 사건이다. 눈여겨 볼 것은 희생당한 사람들이 다 외지인이라는 사실. 노근리학살 사건에 버금가는 '제노사이드'였다. 지역민이 아니라 전쟁이 끝난후 생사조차 확인되지 못해 뿔뿔히 흩어진 터라 목소리를 높이지 못하다 보니 주목받지 못한 아픈 학살사건이다.

600년 안도 유래비에도 미국폭격 역사 기록 

 안도 이야포 주민 이사연씨가 당산에 적힌 유래비에 “여순사건의 회오리와 6.25동란속 난민 수송선(피난선) 폭격으로 많은 인명이 산화되었다”라는 문구를 가르키고 있다
 안도 이야포 주민 이사연씨가 당산에 적힌 유래비에 “여순사건의 회오리와 6.25동란속 난민 수송선(피난선) 폭격으로 많은 인명이 산화되었다”라는 문구를 가르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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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 당산에 적힌 유래비에 "여순사건의 회오리와 6.25동란속 난민 수송선 폭격으로 많은 인명이 산화되었다"라는 미군폭격으로 발생한 민간인 폭격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양민 수백 명이 숨진 충북 영동 노근리 사건은 AP통신이 처음 보도하면서 알려졌다. 영동군의 산골마을인 노근리에서 180여명의 민간인들이 동맹군 미국의 무차별 폭격에 학살당했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의 진상규명지시로 한미양국 조사단이 조사를 통해 2001년 공동발표를 통해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사건으로 규정된바 있다.

앞서 3일 밤 [뉴스9] KBS순천방송은 <`제2 노근리`..여전히 부족한 진실 규명>이라는 제목으로 이야포 미군폭격사건과 횡간도 두룩여사건을 다뤘다. 방송에 따르면 "2010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는 이야포 해변 희생자들이 '미군의 불법적인 폭격으로 희생됐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혀냈지만, 사건과 관련된 직접적인 폭격기록이나 관련 문서가 부족해 가해 주체를 특정하지는 못했다"라고 전했다. 또 "이야포 폭격 이후 안도에서 뱃길로 20분가량 떨어진 남면 횡간도 두룩여 해상에서도 조기잡이 배들에 대한 폭격을 당해 20여명의 어부들이 무참히 희생됐다"고 보도했다.

이어 방송은 "과거사위는 호남지역에서 이뤄진 17건의 미군 폭격사건을 조사했지만, 이야포와 두룩여 사건만 인정 결정하고 나머지는 진실규명 불능으로 결정했다"면서 "희생자들에 대한정부 차원의 보상은 없었다"라며 재조사와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슈팅스타, 이이포 피난선 폭격후 두룩여 어선도 폭격 

 68년전 8월 3일 이야포 피난중 이야포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네명의 가족을 잃은 이춘혁씨가 당시 사건을 증언하고 있다
 68년전 8월 3일 이야포 피난중 이야포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네명의 가족을 잃은 이춘혁씨가 당시 사건을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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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년 전 8월 3일. 여수 남면 안도와 횡간도 앞 두룩여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피난선에 탄 이춘혁씨(실제나이 84세)는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서울 마포구 염리동에서 일곱 식구가 피난을 떠났다. 부산진구 성남초에 수용되어 2주간 머물다, 7월 21일 피난민 350명과 함께 부산연안부두서 여객선을 타고 경남 충무에 내려 학교시설에 수용됐다. 학교운동장에서 쌀 배급을 받고 그날 2시경 화물선을 타고 욕지도에 입항했다. 5일간 학교시설에 수용되어 어디론지 떠났다. 이후 2일 저녁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이야포 포구에 정박했다.

그런데 다음날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슈팅스타'라 불리는 미군 전폭기 네 대가 한 차례 낮게 날더니 피난선을 기관총으로 공격을 가했다. 총성과 비명 속에 피난선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피난민이 타고 있던 목선을 무차별 공격해 18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후 폭격기가 물러가고 시신을 수습했지만, 결국 땅에도 묻지 못하고 피난선을 불태워 수장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배에 7명의 가족이 탔던 이춘혁씨는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당시 나이 16살이었던 이씨는 미군의 폭격으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두명의 동생이 희생됐다. 산자도 고통이었다. 누나와 동생역시 충격과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시집간지 얼마 되지 않은 누나는 27살 때 세상은 떠났고, 동생 춘성씨는 국가를 상대로 소송이 기각되자 그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68년전 8월 3일 이야포 피난중 이야포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네명의 가족을 잃은 이춘혁씨가 폭격당시를 설명하고 있다
 68년전 8월 3일 이야포 피난중 이야포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네명의 가족을 잃은 이춘혁씨가 폭격당시를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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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금정구 SK아파트에 사는 이씨는 매년 이맘때 안도 이야포를 찾는다. 3일 이야포 해변에서 기자와 만난  이춘혁씨는 "68년 전 부모님과 가족을 보낸 오늘을 어찌 잊겠냐"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제게 안도 이야포는 무덤 없는 묘지입니다. 해마다 두 번씩은 이야포를 찾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배에서 부모시신을 불태웠다는 것에 자식으로서 맘이 아픕니다. 피난을 정부에서 시켜서 했으니 정부에서 책임을 져야하는데 공소시효가 넘었다고 해서 기각시키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당시 180여명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그들을 추모할 아무런 시설이 없습니다. 추모공원이라도 만들어 그분들의 억울한 원한을 풀어 드리는게 내 마지막 여생의 소원입니다."
 이야포 미국폭격지를 찾은 이야포 주민 이사연(좌)씨와 이춘혁씨의 모습
 이야포 미국폭격지를 찾은 이야포 주민 이사연(좌)씨와 이춘혁씨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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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광경을 목격한 이야포 주민 이사연(80)씨는 미군의 피난선 폭격부터 자갈밭에 널린 시신과 3일에 걸쳐 불태워 버린 현장을 생생히 전했다. 그는 "이야포 해안가에 널린 많은 시체들은 다른 방도가 없으니까 땟마선에 실어서 다시 피난선에 올려 그 배를 전소시켰다"면서 "그 배가 타는 데 2~3일이 걸렸지"라고 말했다. 그는 이춘혁씨 가족의 딱한 사정을 알고 법정 증언을 들려줬다.

"판사님! 이야포 폭격사건으로 당시 많은 인명이 손상되었는데 그 사람들에게 대한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을 국가에서 책임지면 안 되겠습니까? 물으니 답변이 없었습니다. 이후 이춘혁씨 동생 춘송씨가 왜 답변이 없냐고 따졌는데 재판이 끝났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기각되었더군요. 제 일이 아니지만 어렵게 법정에서 증언했는데 허무하게 끝나버리니 기분 나빴습니다. 이 억울한 사건을 국가나 지자체 모두가 두 손 놓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가 원수로서 이 사건을 해결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날의 이야포 폭격사건을 맞은편 섬에 살던 연도(소리도)에서도 기억했다. 산으로 소뜯기로 갔던 강미자(77)씨는 "그날 비행기가 내 머리위로 날아가 세 번을 삥돌았지. 이야포를 때리고 연도에서 되돌아 간 거지. 무서워서 나무 밑에서 웅크리고 놀랐던 기억이 선명하다"라며 "나중에 이야포로 시집와서 알고 보니 이야포 폭격사건이었다"라고 증언했다.

투철한 '반공정신' 탓에 피난민 가족을 간첩으로 신고한 사연
 안도당산에서 내려다본 이야포 미군폭격 현장. 미국폭격기 슈팅스타는 안도 당산을 돌아 이야포 피난선을 기총사격후 연도를 돌아 세번의 폭격을 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도당산에서 내려다본 이야포 미군폭격 현장. 미국폭격기 슈팅스타는 안도 당산을 돌아 이야포 피난선을 기총사격후 연도를 돌아 세번의 폭격을 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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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야포에서 출신 황주원(47)씨는 "미군폭격 얘기는 나도 어렴풋이 기억난다"면서 "민간인을 태운 배를 북한군배로 오인하여 폭격해 수많은 사람이 죽고 시신들을 바닷가에 묻었다"라며 자신의 어린시절 기억을 이렇게 회상했다.

"어린시절 살던 우리집 상수도 공사하다 유골이 발견되었요. 초6학년때 일요일 아침 어떤 젊은 남녀가 방파제 솔밭 어떤 나무 아래에 뭔가를 묻길래 반공정신이 투철한 나는 그들이 떠나자마자 그걸 팠어요. 웬걸. 총이나 수표 정도를 기대했는데 금반지, 금목걸이가 나오는거예요. 바로 지서에 신고해서 축항에서 여객선을 기다리던 그들이 지서로 연행됐지요. 간첩이었냐고? 폭격으로 희생된 이의 자손이었지요. 결혼을 앞두고 돌아가신 부모님께 예물로 바친 거였는데 저 때문에 수모를 당한 셈이었지요. 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죄송한 마음이 들어요."

지역 시민단체들은 이명박 정부 시절 과거사위가 제대로 된 조사 의지를 갖지 않았다며 재조사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68년전 8월 3일 미군폭격 사건이 발생한 남년 안도 이야포 포구의 모습
 68년전 8월 3일 미군폭격 사건이 발생한 남년 안도 이야포 포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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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포 미군폭격사건을 조사한 여수지역사회연구소 박종길 이사는 "미군 폭격기 슈팅스타기가 기총사격으로 180명의 민간인이 무참하게 학살된 아픈 사건이다"면서 "이 폭격기가 같은날 두라와 횡간도 사이에 있던 암초인 두룩여에 100여척의 조기잡이 배에 발포해 20여명의 희생자가 생겼는데 이같은 사건이 묻혀서는 안 된다. 이제는 진실규명이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정권에 입맛에 따라 법의 잣대와 진실이 감춰지는 영혼 없는 시대다. 진실규명 과거사위원회는 호남지역에서 이뤄진 17건의 미군 폭격사건을 조사했지만, '이야포 미군폭격사건과 두룩여사건'만 인정 결정하고 나머지는 진실규명 불능으로 결정한바 있다. 법정에서는 진실 규명과 특별법에 따라 기념사업이 추진된 노근리 사건과 달리 미군 폭격에 의한 양민 피해의 사건을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셈이다. 미군에 의해 약 200여명이 희생당한 이야포 미군폭격사건과 횡간리 두륙여사건은 이대로 역사에 파묻혀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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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하고 싶은 일을 남에게 말해도 좋다. 단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라!" 어릴적 몰래 본 형님의 일기장, 늘 그맘 변치않고 살렵니다. <3월 뉴스게릴라상> <아버지 우수상> <2012 총선.대선 특별취재팀> <찜!e시민기자> <2월 22일상> <세월호 보도 - 6.4지방선거 보도 특별상> 거북선 보도 <특종상> 명예의 전당 으뜸상 ☞「납북어부의 아들」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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