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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선사와 만공월면의 인연

서산 천장암
 서산 천장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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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 선불교의 중흥조는 경허(1849-1912) 선사다. 선사는 23세의 젊은 나이에 동학사 강사(講師)가 되어 후학을 양성했다. 1884년 14세의 어린 나이에 동학사에서 경허를 만난 소년 도암(道巖)은, 선사의 소개로 서산 천장암(天藏菴)으로 간다. 도암은 만공스님의 속명이다. 그리고 그 해 12월 태허(泰虛)스님을 은사로 경허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는다. 이때 경허선사가 지어준 법명이 월면(月面)이다.

경허선사에게는 천장암에서 인연을 맺은 세 제자가 있다. 이들이 '경허의 세 달(三月)'로 불리는 수월(水月), 혜월(慧月), 월면이다. 1884년 이들은 천장암에서 경허의 제자로 만나 사형사제가 되었다. 이들은 경허선사를 시봉하며 각기 다른 방법으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수월스님과 부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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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음관(音觀)은 29살에 천장암으로 출가해 행자 노릇을 하며 두타행을 했다. 의식주를 담당하는 행자로 3년 동안 시봉한 후 사미계를 받았다. 이때 받은 법명이 음관이다. 관음을 거꾸로 한 이름이다. 관음과 같은 자비의 화신의 되길 바라는 뜻에서 지어준 법명이라고 한다. 음관은 부엌에서 득도 후 경허선사로부터 수월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수월 스님은 1912년 함경도 갑산군에서 마지막으로 경허선사를 만난 후 간도로 들어가 두타행을 하다 1928년 열반에 들었다.

혜월혜명(慧明)과 경허선사의 인연은 덕숭산 정혜사에서 시작되었다. 정혜사에서 경허의 법문을 들은 사미 혜명은 경허를 따라 천장암으로 간다. 경허는 혜명에게 보조국사의 <수심결>을 가르치며 마음공부에 진력할 것을 당부한다.

혜명이 돈오점수와 정혜쌍수의 가르침을 쉽게 깨치지 못함에, 경허는 '이 한 물건이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주고 참구하도록 한다. 다시 3년 동안 화두를 참구한 혜명은 깨달음을 얻어 혜월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혜월선사는 남쪽으로 내려가 양산과 부산 둥에서 부처님의 법을 전했다.

천장암의 경허스님방과 만공스님방
 천장암의 경허스님방과 만공스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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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사미계를 받은 월면은 10년 동안 사형들과 함께 천장암에서 불법과 마음공부를 한다. 그러나 1893년 비슷한 연배의 청년으로부터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는데, 그 한곳이 어디인가?(萬法歸一 一歸何處)'라는 질문을 받고 답을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워 천장암을 떠난다. 그리고 온양 봉곡사(鳳谷寺)에서 면벽수도하다 새벽에 문득 깨달음을 얻는다. 이때 지은 오도송이 '계명일출(鷄鳴日出)' 시다.

빈산의 이치와 기운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데  空山理氣古今外
흰 구름 맑은 바람은 저절로 오고가누나.                 白雲淸風自去來
무슨 일로 달마가 서쪽 하늘로 건너 왔을까?             何事達摩越西天
축시에 닭이 울고 인시에 해가 뜨네.                        鷄鳴丑時寅日出

만공월면선사
 만공월면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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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면이 깨달음을 인정받은 것은 3년이 지난 1896년이다. 월면의 초견성(初見性)을 확인한 경허는 무자 화두를 준다. 다시 5년 동안 수도 정진한 월면은 1901년 통도사 백운암에서 새벽 종소리를 듣고 두 번째 큰 깨달음을 얻는다. 그 후 월면은 천장암으로 돌아와 깨달음을 실천하며 살았다. 그리고 34세 때인 1904년 경허로부터 만공이라는 법호와 함께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경허가 준 게송은 다음과 같다.

구름과 달, 시내와 산이 곳곳마다 같은데      雲月溪山處處同
수산선자에게 대가의 풍모가 느껴지는구나.  叟山禪子大家風
은근히 무문인을 나눠 부촉하노니               慇懃分付無紋印
일단 기회와 권세를 눈 속에서 살리게나.      一段機權活眼中

덕숭문중을 크게 일으킨 대선사

덕숭산 수덕사
 덕숭산 수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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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봄 천장암을 떠난 만공은 덕숭산 산자락에 금선대(金仙臺)를 짓고 참선하며 설법을 펼친다. 그리고 수덕사에 전각을 중창하거나 새로 지었다. 대표적인 것이 대웅전 중창과 정혜사와 견성암 신축이다. 그리고 간월도에 간월암을 중창했다. 1920년대 초에는 선학원(禪學院) 설립운동에 참여하고, 1930년대 중반에는 조선불교선학원 종무원 종정을 지내는 등 일본불교에 맞서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앞장섰다.

만공선사는 또 훌륭한 제자를 길러 덕숭문중을 크게 번창시켰는데, 대표적인 제자가 보월(寶月) 혜암(惠庵) 벽초(碧超) 고봉(高峰) 금오(金烏) 원담(圓潭) 선사 등이고, 비구니로는 일엽(一葉)스님이 있다. 보월성인(性印)은 1913년 만공선사로부터 전법게를 받았다. 보월은 보덕사 조실이 되어 선농일치의 삶을 실천했다. 1923년에는 금오태전(太田)을 제자로 받아들였으나 전법하지 못하고 1924년 열반했다. 이에 만공선사는 1925년 금오태전에게 전법게를 내리기도 했다. 

덕숭문중의 법맥
 덕숭문중의 법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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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숭산맥 아래                   德崇山脈下
이제 무문인을 부촉하노니   今付無文印
보월 아래 계수나무에         寶月下桂樹
금오가 하늘 끝까지 나네.    金烏徹天飛

혜암현문(玄門)은 45세 되던 1929년 만공선사로부터 전법게를 받고 혜암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현문은 그 전에 이미 묘향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 등의 주지를 역임한 바 있다. 혜암은 1956년 수덕사 조실이 되었고, 1985년 덕숭총림의 초대 방장이 되었다. 그러나 방장이 된지 몇 개월 후 열반하니, 세수 101세였다.

일엽(一葉)스님은 1923년 9월 수덕사에서 만공선사의 법문을 듣고 발심하였다. 1928년에는 서울 선학원에서 만공선사로부터 보살계를 받았다. 그리고 1933년 금강산 서봉암에서 성혜스님을 은사로 만공선사를 법사로 비구니계를 받았다. 그해 9월 만공선사가 수덕사에 주석하자, 일엽스님도 수덕사 견성암에 머물며 수도정진했다.

1934년에는 만공선사로부터 백련도엽(白蓮道葉)이라는 법호와 법명을 받았다. 일엽은 춘원 이광수로부터 받은 필명으로, 도쿄에 유학한 신여성으로 유명하다. 불교에 귀의하며 세속을 떠났다가, 1960년대 <어느 수도인의 회상> <청춘을 불사르고>등을 내며 또 다시 유명해졌다.  

일제의 총칼 아래 조선의 얼을 지킨

만해 한용운 선생
 만해 한용운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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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주지를 역임한 옹산스님은 만공선사의 항일운동을 조명하는 저서 <만공>을 2017년 11월 발간했다. 그 책의 첫 부분 '작가의 말' 타이틀을 "거기에 만공이 있었다"로 정했다. 여기서 거기란 '일제의 총칼 아래 조선의 얼을 지키는 곳'을 일컫는다.

만공선사는 당대 최고의 선지식으로 선풍을 드날렸을 뿐 아니라,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개최된 31본사 주지회의에서 할(喝)과 게송 그리고 법문을 통해 일제의 조선 불교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만해는 이때의 이야기를 1938년 발행한 <불광>(佛光)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작년 2월 26일에 조선총독부 내에 31본산 주지들을 회동시키고, 총독 이하 관계 관헌이 열석한 중에 각 본산 주지에 대하여 개별적으로 조선불교 진흥책에 대한 요지를 들었다. 공주 마곡사 주지 송만공 화상의 순서가 되었을 때 화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청정본연(淸淨本然)커늘 운하홀생(云何忽生) 산하대지(山河大地)리오'하고 대성(大聲)으로 할을 하였다. 선기법봉(禪氣法鋒)의 쾌한(快漢)이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의리로 이해할지라도 그 좌석 그 시기에 가장 적당한 대답이다."

심우장
 심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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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은 또한 김좌진 장군, 윤봉길 의사와 만나 교류한 적이 있고, 만해 한용운 선사를 통해 항일독립운동을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김좌진과 윤봉길은 구국의 일념이 같았고, 만해는 동시대의 문제를 함께 고민한 도반이자 동지였다. 그래서 만공은 만해의 거처인 성북동 심우장을 자주 찾아 불교와 조국의 현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만공이 동지적인 유대감으로 만해를 지원하지 않았다면, 불교계 독립운동은 축소되거나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졌을지도 모른다. 이들이 추구한 정신과 실천한 행동은 불교 독립운동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순응과 아부, 변절과 배신이 횡행하던 일제강점기 불교와 조국의 독립을 추구했던 두 사람은, 해방을 전후해서 세상을 떠났다. 1944년 만해를 먼저 떠나보낸 만공은 수덕사에 주석하며 더 이상 서울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만공선사의 부도 만공탑
 만공선사의 부도 만공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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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선사는 1945년 해방조국을 맞이하여 세계일화(世界一花)라고 휘호했다. 만공은 나라꽃인 무궁화의 꽃망울을 먹물에 적셔 글씨를 썼다. 온 세상이 하나의 꽃으로 공존하며 평화를 누리고 살자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세계일화의 꿈은 아직도 실현되지 않고 있다.

만공선사가 세상을 떠난 것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0월 20일이다. 만년에 머물던 전월사(轉月舍)에서 목욕재계한 후 자리에 앉아 열반에 들었다. 마지막 말은 "여보게, 자네와 내가 이제는 헤어질 때가 되었구려. 그동안 수고 많았네"였다.

대한불교조계종 태고사에 차려진 빈소에는 백범 김구선생이 찾아 분향하고 헌화했다고 한다. 그것은 만공선사에 대한 추모와 독립운동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다.


태그:#만공선사, #천장암, #덕숭문중, #만해 한용운, #항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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