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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2가의 경찰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6월항쟁.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2가의 경찰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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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대통령 직선제를 있게 한 1987년 6월항쟁. 재야세력과 종교와 학생과 야당의 주도로 시작된 6월 10일의 민주헌법 쟁취 국민대회가 전 국민적 투쟁으로 승화한 데는 이른바 '넥타이 부대'의 활약이 컸다. 6월 11일 점심에 시작된, 넥타이로 상징되는 금융노동자들의 비조직적이고 자발적인 참여가 일반 국민들을 항쟁의 지지자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물론 6월 11일 전에도 일반 국민들의 참여가 있었다. 직선제 개헌을 거부하는 전두환 대통령의 4월 13일 호헌 조치에 이어, 6월 10일에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이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간선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그러자 이에 맞서 개최된 6월 10일의 국민대회에도 일반 국민들이 대거 참여했다.

6월 10일 저녁 6시, 자동차를 운행하던 시민들은 경적을 울리는 방법으로 전두환 정권을 거부하고 직선제 개헌을 촉구했다. 일부 시민과 학생들은 서울 명동성당에 진을 치고 밤 9시 55분경부터 횃불시위에 돌입했다. 명동성당 농성투쟁의 개막이었다. 

'넥타이 부대'의 출현, 중산층의 마음을 뒤흔들다

이렇게 6월 11일 전에 참여한 일반 국민들도 항쟁의 승리에 기여했지만, 6월 11일 점심에 넥타이를 매고 서울 명동에 출현한 금융노동자들은 대한민국 중산층의 마음을 뒤흔들어놓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 상황이 성균관대학교 서중석 명예교수의 <6월 항쟁> 제3장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명동에서는 이날 점심시간에 넥타이 부대 시위가 등장했다. 금융기관이 밀집되어 있어 점심시간에 수천 명의 사무원이 쏟아져 나오는데, 경찰이 골목 일부를 차단해 혼란이 벌어졌다."

넥타이 부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경찰은 당황했다. 경찰은 손으로 던지는 최루탄인 사과탄을 투척하며 이들에게 대항했다. 위 책의 이어지는 내용이다.

"12시 조금 지나 경찰이 서울극장 유네스코회관 부근에 모인 시민들을 향해 사과탄을 발사했다. 500여 명의 넥타이를 맨 시민들이 잠시 밀리는 듯했는데, 누군가가 '호헌 철폐'를 외치자 '독재 타도'로 호응하면서 시위대로 돌변했다. 경찰이 잇따라 사과탄을 터뜨려 미도파백화점 쪽으로 밀어붙였지만, 넥타이 부대는 '통일의 노래'를 부르고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흩어지지 않았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산하 한국민주주의연구소가 펴낸 <6월항쟁과 넥타이부대>라는 논문에서는 이 시위를 "역사상 최초로 지휘자 없는 넥타이부대의 시위"라고 규정했다. 점심시간에 사무실 밖으로 쏟아져 나온 금융노동자들의 비조직적·자발적 시위였기에 그렇게 규정한 것이다.

6월항쟁. 길 양쪽에 은행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명동 시위를 찍은 사진 같다. 서울 광화문광장 동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사진.
 6월항쟁. 길 양쪽에 은행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명동 시위를 찍은 사진 같다. 서울 광화문광장 동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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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11일 등장하여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며 '넥타이 부대'로 불린 금융노동자들. 그런데 이들이 '넥타이'로 불리게 된 사연이 흥미롭다. 우리 사회에서 이들이 넥타이라는 이미지로 각인된 계기가 있었다. 6월항쟁 15년 전인 1972년의 이른바 '넥타이 파동'이다.

1987년에 이들은 넥타이를 매고 저항한 일로 인해 '넥타이'로 불렸다. 그런데 1972년에는 정반대 이유로 '넥타이'로 불렸다. 넥타이를 매지 않고 저항했다 하여 그렇게 불린 것이다. 1987년의 일은 '넥타이부대 시위'로 불린 데 비해, 1972년의 일은 '넥타이 파동'으로 불렸다. 

한국은 1960년대까지도 농업 국가였다. 그래서 1970년대 초만 해도 넥타이를 매고 근무하는 사람이 흔치 않았다. 그래서 넥타이를 매는 남자 은행원을 비롯한 금융노동자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목에 수건을 두르는 게 아니라 넥타이를 두르고 일하는 이들은 보기에 따라서는 신선처럼 비칠 수도 있었다.

1972년 5월 넥타이 파동

물론 이들도 힘들고 고되게 노동을 했다. 하지만, 남들 눈에는 돈도 많이 받고 일하기도 편한 사람들로 비치기 쉬웠다. 그래서 이들은 박정희 독재정권에 저항할 일이 별로 없어 보였다.

<6월항쟁과 넥타이 부대>에서는 이들에 대한 1970년대 초반의 시선을 두고 "정치적 견해에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경제적으로는 지배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고소득의 안정 희구 세력으로서 사회변혁을 가로막고 있다고 인식되었다"고 했다. 이처럼 이들은 독재정권 하의 모범생으로 보일 여지가 없지 않은 집단이었다.

'모범생들'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사무직 노조인 전국금융노동조합(금융노조)을 갖고 있었다. 그만큼 박정희 정권의 경계심을 덜 샀다는 증거다. 그런데 그 '모범생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1972년 5월이었다. 이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것과 더불어 정부의 금융권 개입에 항의하는 운동을 벌인 것이다.

그해 5월 10일 오전 9시, 조흥·상업·한일·서울·제일·국민·신탁은행에 근무하는 2만여 명 금융노조 조합원들이 사용자 측과 정부에 대한 항의운동을 개시했다. 말로 하는 항의운동이 아니었다. '몸'으로 하는 항의운동이었다. 몸으로 한다 해서, 주먹이나 발로 하는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몸'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날, 여성 은행원들은 제복 상의에 달린 깃(칼라)을 떼고 근무했다. 남자 은행원들은 넥타이를 매지 않은 채 업무에 착수했다. 여성들도 참여했지만 아무래도 남자들이 더 많이 참여하다 보니, 세상 사람들 눈에는 여성 행원들이 깃을 뗀 것보다는 남자 행원들이 넥타이를 매지 않은 게 더 잘 기억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그런 모습이 상당히 경악스러웠던 모양이다. 그해 5월 10일 자 <동아일보>는 "평소 단정하고 깔끔하던 각 은행의 남녀 은행원들은 10일 아침부터 모두 넥타이와 제복의 흰 칼라를 떼어버렸다"고 보도했다. 넥타이를 매지 않은 모습이 단정하지 못하고 깔끔하지 못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렇게 노타이로 근무하는 모습으로 인해 "평소 깔끔하고 명랑하던 은행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고 신문은 보도했다. 은행에 들어간 손님들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신문은 덧붙였다. 이날 각 은행에는 플래카드나 구호 같은 게 전혀 붙지 않았다. 오로지 '몸'으로만 의사표시를 했던 것이다. 상당히 소박한 저항이었다.

서울 중구의 명동 거리.
 서울 중구의 명동 거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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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도 노타이 차림으로 청와대 식당에서 직접 커피를 타는 모습에 적응하게 된 2017년 대한민국과 달리, 1972년 대한민국에서는 은행원들이 노타이로 근무하는 모습만으로도 섬뜩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 사건이 넥타이 파동으로 불린 것이다.

이걸 계기로 사람들은 '은행원' 하면 '넥타이'를 떠올리게 되었다고 <6월 항쟁과 넥타이 부대>는 말한다. 이 때문에 1987년의 일도 넥타이부대 시위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은행원들의 소박한 저항을 중대 사건으로 간주한 박정희 정권  
 
박정희 정권은 은행원들의 소박한 저항을 국가 질서를 위해 할 중대 사건으로 간주했다. 위의 <동아일보>에 따르면 남덕우 장관이 이끄는 재무부는 "넥타이를 안 매는 이번의 집단 의사표시를 태업으로 볼 수 있다는 결론이 서면 보위법을 적용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1971년 박정희 정권이 국가비상사태에 대비해 제정한 국가보위법을 넥타이 파동에 적용할 수 있다는 메시지였다.

재무부의 경고는 경고 차원에서 그치지 않았다. 중앙정보부의 개입으로 이어졌다. '소박한 저항'을 주도한 금융노조 간부들은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손톱을 뽑히는 일까지 있었다. 넥타이를 뗐다 하여 손톱을 뽑는 잔혹한 고문을 자행한 것이다. 

이처럼 1972년 5월에는 넥타이를 매지 않은 채 사용자 측과 정권에 대항했던 금융 노동자들이 1987년 6월에는 넥타이를 맨 채 전두환 정권에 항거했다. 넥타이를 매지 않은 모습으로도 세상을 놀라게 하고, 넥타이를 맨 모습으로도 세상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 1987년 6월의 이들의 가세로 일반 국민들이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이것은 전두환 정권이 6·29 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도록 만드는 촉매제 중 하나가 되었다.

국민대중을 개·돼지로 간주하는 일부 수구세력은 "저들은 등 따습게 해주고 배만 부르게 해주면 된다"며 "얼어 죽을 민주주의!"라고 비웃는다. 하지만, '넥타이'들의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등 따습고 배부른 사람들도 필요하면 주먹을 들고 일어선다. 정치적 불의와 부조리가 너무 심하면, 이들도 저항의 대열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태그:#6월항쟁, #넥타이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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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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