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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빙 관광을 위해 구입한 부츠는 진정한 오버였다. 땀띠와 무좀에 강한 분들에게조차도 추천하지 않는다.
▲ 유빙 관광을 위한 부츠? 유빙 관광을 위해 구입한 부츠는 진정한 오버였다. 땀띠와 무좀에 강한 분들에게조차도 추천하지 않는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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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여행은 시간을 벌어오는 일이라고 했다. 여행의 기록은 벌어온 시간을 최대한 가슴에 담아 두었다가 조금씩 꺼내 쓰기 위함이다. 다른 한편으로, 여행기는 다음에 찾아올 사람에게 남기는 진심어린 메모다. 낯선 곳에서 헤매지 않게, 미지의 공간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마치 헨젤과 그레텔의 빵조각처럼. 이번 여행도 그런 훈훈한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적어도 비행기에 올라타기 전까지는.

중년에 들어선 대학동아리 선후배 다섯 명이 모였다. 10기부터 21기까지 나이 차는 좀 났지만 한 솥에 라면 끓여 먹으며 같이 뒹군 사이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더 늙기 전에 거기 한번 가 보자, 라는 말이 씨가 되었다. 설마 거기에 진짜 갈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는 홋카이도 행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오로지 유빙을 보기 위해서.

유빙이란, 말 그대로 바다에 떠다니는 빙하를 말한다. 날씨가 너무 추우면 빙하가 녹지 않고, 너무 따뜻해지면 다 녹아 없어지기 때문에 유빙을 볼 수 있는 날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유빙 관광이 일반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무한도전 때문이다. 텔레비전을 보지 않으니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지만, 무한도전의 컨셉 자체가 무모한 도전 아니던가? 2박 3일의 일정으로 오호츠크해의 유빙을 보고 온다는 것은 진정 무모한 행위였다. 더 늙기 전에, 라는 단서가 붙지 않았다면 누구도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흐를 유, 얼음 빙. 빙하가 녹아 바다위를 흘러다니는 얼음 조각들.
▲ 유빙 흐를 유, 얼음 빙. 빙하가 녹아 바다위를 흘러다니는 얼음 조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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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뽀로 역에 도착한 쇄빙 인부들. 삿뽀로의 날씨는 생각만큼 춥지 않다.
▲ 삿뽀로역에서 삿뽀로 역에 도착한 쇄빙 인부들. 삿뽀로의 날씨는 생각만큼 춥지 않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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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당일, 인천 국제공항에 모여든 다섯 중년 사내들의 복장은 단연 돋보였다. 유빙 관광이 아닌 쇄빙 작업을 떠나는 인부들 모습이었다. 영하 40도에서도 끄떡없다는 종아리를 덮는 부츠를 신고, 히말라야 등산 복장을 하고 온 아저씨들은 공항복장의 새 역사를 쓰고 있었다. 짐을 최대한 줄여야 신속하게 이동한다는 말만 듣고 가급적 모든 것을 껴입고 쓰고 신고 온 것이다.

주위에서 힐끔거리는 것쯤이야 무시할만한 나이 아니던가? 외관상으로는 어떤 문제도 없었다. 인천 공항의 난방이 국제 기준을 지나치게 초과한 것 아니냐는 불만을 쏟아내기 전까지는. 발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열기가 온 몸을 뒤덮었다. 외부 방수는 가능했지만 내부에서 차오르는 물에 대한 대책은 없었다. 동상을 염려해서 신고 온 부츠가 땀띠와 무좀의 양식장으로 바뀌었다. 거기에 저가항공의 특성인 출발 시간 지연까지 겹쳤다.

하지만 그 정도의 고통쯤은 여행에 대한 설렘과 기대로 극복할 만한 것이었다. 전날 잠을 설쳐서인지 아침부터 감기 기운이 있었다. 일행 중에 감기약을 챙겨온 사람이 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한 봉지를 톡 털어 넣었다. 약이 좀 많다 싶었지만, 한방에 감기를 떨치고 놀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좁디좁은 비행기 좌석에 간신히 안고 나서부터 온 몸이 가렵기 시작했다.

가려운 부위를 열심히 긁다보니, 어느 순간 좌석이 한결 여유로워진 기분이 들었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불안과 혐오가 뒤섞인 시선을 보내며 반대편으로 몸을 웅크린 것이다. 비행기가 출발함과 동시에 손등과 목 부위부터 반점이 생기며 온 몸이 가렵기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약물 알러지였다. 여행에 들떠서 방심한 것이다. 나름 의료인이라는 사람이 아무 약이나 주워 먹다니.

승무원을 불러 항히스타민제가 있는지 물었다. 옆 사람에게는 약 때문에 발생한 알러지라서 전염되지 않는다고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고개는 끄덕이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점점 하얗게 변해갔다. 나와는 대조적으로. 약이 피부색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 동안, 온 몸을 쉴 틈 없이 긁고 있는 나와 발에 무좀균이 왕성하게 번식을 시작한 네 사람의 중년을 실은 홋카이도 행 비행기는 부지런히 창공을 가르고 있었다.

신 치토세 공항까지는 두 시간 반쯤 걸린다. 아침 9시에 공항에서 만나 12시에 비행기를 탔으니, 오후 3시 쯤 일본에 도착한 셈이다. 공항은 생긴 지 얼마 안되서인지 깨끗하고 규모가 컸다. 전철을 타기 위해 삼십분 넘게 걸어야 할 만큼 쓸데없이 컸다. 축축한 몸과 발에,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은 훈련소에서의 구보를 연상케 했다.

홋카이도 지역에서만 한정적으로 판매한다는 삿뽀로 맥주.
▲ 삿뽀로 클래식 맥주 홋카이도 지역에서만 한정적으로 판매한다는 삿뽀로 맥주.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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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을 타고 한 시간쯤 이동해서 삿포로 역에 도착했다. 기차 시간이 조금 남아서 역 근처 라멘집에 들어갔다. 걷고 타는 것 외에 일본에 와서 한 일이 없었기에, 일행은 삿포로 생맥주와 미소라멘을 시켜 놓고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 북해도 지역에서만 판매한다는 삿포로 클래식 생맥주는 소문대로 진하고 깊은 맛이었다. 소금에 절인 듯한 라멘 덕분에 연거푸 몇 잔을 들이키지 않았다면 말이다. 맥주를 팔기 위한 고도의 전략에 현혹된 느낌이었다.

땀으로 소실된 염분을 라멘으로 넘치게 보충하고 드디어 유빙 관람의 최대 장애물인 기차를 타러 갔다. 다섯 시간 반을 기차로 이동해야 볼 수 있다는 유빙이었다. 일생을 통틀어 다섯 시간 이상 기차를 타 본적이 없었기에, 더구나 눈 덮인 설국의 열차라는 말에 한편으로 기대가 되기도 했다. 외국 영화에 나오는 독립된 공간에 편하게 누워서 갈 수 있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 같은 분위기를 상상했던 것이다.

플랫폼에 서서 기차를 맞이하며 첫 번째 환상이 깨졌다. 대학 초년 시절 타던 통일호보다 조금 낡은 기차 한 대가 맥없이 터덜터덜 들어오는 게 아닌가? 타고 보니 침대칸은 고사하고 매점도 없는 다섯 량짜리 기차였다. 사람들이 편의점에서 한 봉지씩 챙겨 탈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다. 맥주 한 캔에 간단한 안주꺼리만 챙긴 우리는 덜컹이는 기차에서 배고픔을 견뎌야 했다.

더구나 오후 다섯 시만 되면 해가 지는 북해도의 날씨는 주위를 온통 암흑으로 만들었다. 설국열차가 아닌 탄광 안에서 움직이는 기차를 탄 셈이었다. 가져간 책을 읽다 지쳐 잠이 들고, 배고픔에 잠이 깨면 여전히 기차는 어둠속을 달리고 있었다. 대학 엠티 때 기차에서 노래도 부르고 맥주 마시며 떠들던 추억을 회상했던 중년 남성들은 침울했다. 타인에게 피해가 될까 숨조차 작게 쉬는 일본인들의 문화 장벽을 끝내 넘어 서지 못했다. 마침내 묵언 수행에 가까운 기차 여행은 자정이 다되어 목적지인 아바시리 역에 도착하며 끝이 났다.(계속)

여행 첫날 자정에야 도착한 아바시리 역. 전형적인 시골역이다.
▲ 아바시리 역 여행 첫날 자정에야 도착한 아바시리 역. 전형적인 시골역이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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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홋카이도, #아바시리, #유빙, #신 치토세 공항, #항히스타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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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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