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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인 위주로 1천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무참하게 처형되었다. 보통 "기축옥사"라 불리는 이 처형 사건은 무려 3년 동안이나 진행되었다.
서인(西人)의 젊은 인재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이 갑자기 집권 세력인 동인(東人)을 자처하자 선조가 이를 비판한다. 정여립은 벼슬을 버리고 전라도 죽도로 내려와 군사 조직 성격의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한 뒤 이를 점차 전국 규모로 키워간다. 정여립은 "목자(木子, 李이씨)가 망하고 전읍(奠邑, 鄭정씨)가 일어난다."거나 "천하는 공공의 물건(天下公物, 임금 개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라는 말을 일삼은 혁신적 사상가였다. 1589년 10월 정여립이 반란을 도모하고 있다는 고발이 선조에게 들어가고, 그를 따르던 세력의 일부가 체포된다. 정여립은 죽도에서 자살한다. 선조는 서인 정철에게 사건 처리의 책임을 맡긴다. 그 이후 3년에 걸쳐 정철은 선조의 지원을 받아 동인 세력 1천여 명을 죽인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까지 선조와 조정은 이 일에 매달렸다.
▲ 전라북도 진안군 죽도마을 서인(西人)의 젊은 인재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이 갑자기 집권 세력인 동인(東人)을 자처하자 선조가 이를 비판한다. 정여립은 벼슬을 버리고 전라도 죽도로 내려와 군사 조직 성격의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한 뒤 이를 점차 전국 규모로 키워간다. 정여립은 "목자(木子, 李이씨)가 망하고 전읍(奠邑, 鄭정씨)가 일어난다."거나 "천하는 공공의 물건(天下公物, 임금 개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라는 말을 일삼은 혁신적 사상가였다. 1589년 10월 정여립이 반란을 도모하고 있다는 고발이 선조에게 들어가고, 그를 따르던 세력의 일부가 체포된다. 정여립은 죽도에서 자살한다. 선조는 서인 정철에게 사건 처리의 책임을 맡긴다. 그 이후 3년에 걸쳐 정철은 선조의 지원을 받아 동인 세력 1천여 명을 죽인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까지 선조와 조정은 이 일에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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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사미인곡


김춘택(1670∼1717)이 제주도 유배 중(1706∼1710) 숙종을 생각하면서 지은 가사로, 정철의「사미인곡」과「속미인곡」을 모방하여 창작한 작품이다. 장덕순은 '송강의 전후 사미인곡이 연군의 노래인데, 이는 고려조의「정과정곡」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조선에 와서는 송강이 이 계통 가사의 원조라면 이를 직접 계승한 이가 김춘택'이라고 말한다. 

한때 대학 국문과 학생들의 필독서였던 장덕순의 <한국문학사> 중 '송강의 가사와 별사미인곡'의 첫 단락은 '정철은 선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재상까지 이른 정치인이면서, 또 16세기의 조선조 문학의 금자탑을 이룩한 위대한 시인이기도 하다'로 시작된다.

정철(1536∼1593)은 과연 선조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인가? 이 점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다만 정철이 '어부사시사'의 윤선도(1587∼1671), '조홍시가' 및 '태평사'의 박인로(1561∼1642)와 더불어 조선 3대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점만은 분명하다.

이 세 시인 중 윤선도는 임진왜란과 무관하지만 박인로는 경북 영천에서 의병에 뛰어든 것을 시작으로 뒷날 수군 장수로서 많은 활약을 했고, 정철은 전란 중 잠시 경기·충청·전라 지역 군대를 총괄하는 체찰사를 지냈다.

정철을 통해 생각해보는 임진왜란의 역사

일반적으로 "정철" 하면 시인을 떠올린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도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훈민가', '장진주사' 등의 제목을 들으면 저절로 정철이 떠오른다. 소설 '구운몽'의 저자 김만중이 자신의 문집 <서포만필>에서 "예로부터 좌해(左海)의 참된 문장은 오직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이 세 편뿐"이라고 극찬했다는 내용까지 교실에서 배웠고, 또 시험 문제로 만나기도 했다.

충북 진천 정철 사당 송강사의 봄
 충북 진천 정철 사당 송강사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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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오늘은 정철의 생애를 둘러싸고 임진왜란에 대해 알아볼까 한다. 그의 문학에 대해서는  '마을 한 곳이 절경 세 곳을 자랑'과 '<장진주사>가 명작? 그렇다면 당신은 주당!' 두 편의 기사를 쓴 바 있으므로 그만하면 정철에 대한 예의는 갖췄다고 스스로 믿는다.

우선 김만중이 말한 ' 좌해'라는 용어의 의미부터 곰곰 생각해 본다. 좌해는 조선을 가리키는 용어로, 한자의 뜻만 말하면 바다의 왼쪽이다. 기준점을 중국에 둔 것이다. 황제가 있는 중국을 중심에 놓고 볼 때 그 왼쪽에 있는 나라, 조선인들은 스스로를 그런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

정철 묘비에 '정철은 유명조선좌의정'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물론 이는 정철에게만 적용된 용어가 아니다. 당시 조선 사회 모두의 관용적 표현이었다. '유명조선좌의정'은 대략 '명나라의 속국 조선의 좌의정'이라는 뜻이다.
▲ 정철 묘비 정철 묘비에 '정철은 유명조선좌의정'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물론 이는 정철에게만 적용된 용어가 아니다. 당시 조선 사회 모두의 관용적 표현이었다. '유명조선좌의정'은 대략 '명나라의 속국 조선의 좌의정'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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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해와 마찬가지 인식을 보여주는 어휘는 정철의 묘비에도 새겨져 있다. 묘비명은 정철의 대표 관직을 '有明朝鮮左議政(유명조선좌의정)'으로 소개했다. 유명조선은 명나라의 속국 조선이라는 뜻이다.

심지어 선조는 1601년 3월 14일자 <선조실록>에 '왜적을 평정한 것은 오직 명군의 은혜'라면서 '우리 장수들은 적장의 머리 하나 베거나 적진 하나 함락한 적이 없었다'라는 명언(?)까지 남겼다. 물론 선조의 말은 사실도 아니지만, 선조 본인은 국왕으로서 임진왜란에 대한 대비를 어떻게 하였기에 조선 장수들이 적장의 머리 하나 베지 못했다는 극언을 할 수 있었을까?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한 준비 실태

류성룡의 <징비록>에 '그때부터 우리 조정에서는 일본을 경계하기 시작했다'라고 시작되는 부분이 있다. 여기서 '그때'는 일본에 갔던 통신사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 일행이 돌아온 1591년 1월 이후를 뜻한다. 그런데 이 대목은, 황윤길은 일본이 전쟁을 도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한 반면 김성일은 그 반대로 침략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당시 집권 세력인 동인(東人)이 서인(西人)인 정사 황윤길의 보고를 묵살하고 같은 동인인 부사 김성일의 견해를 채택함으로써 당시 조선 조정이 전쟁에 대해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다 하니 흔히 알려진 것과는 아주 다른 증언이다. 류성룡의 기록을 더 읽어보자.

'그때부터 우리 조정에서는 일본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경상감사에 김수, 전라감사에 이광, 충청감사에 윤선각을 임명하여 무기를 준비하고 성과 해자를 건설하도록 했다. 특히 경상도에 많은 성을 쌓고, (경북)영천·청도·대구·성주·안동·상주, (경남)진주·삼가·부산·동래 등지에는 병영까지 새로 만들거나 고치도록 했다. 국경 사정에 밝은 인물을 뽑아 남쪽 삼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방어를 맡도록 한 것이다.'

국경 사정에 밝은 인물을 뽑아


군사권을 가진 감사에 임명된 김수, 이광, 윤선각은 모두 문관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총사령관에 해당되는 도원수를 맡은 김명원도 문관이었다. 그 무렵만 해도 문관과 무관에 대한 차별이 심하여 중요 군사 직책도 최고위직은 모두 문관이 맡았고, 무관에게는 그 아래 자리가 주어졌다.

김명원 아래에서 부원수를 맡은 신각은 무관 출신이었는데, 김명원이 1592년 5월 2일 한강 방어를 포기하고 평양으로 떠나버리는 바람에 군대가 해산되었을 때 약간의 병사들을 모아 5월 16일 해유령(蟹諭嶺,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연곡리)에서 약탈을 나온 왜적들을 기습, 조선 육군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신각은 이내 처형되었다. 김명원이 선조에게 '신각이 제멋대로 부대를 이탈하는 바람에 왜적을 막을 수 없었다'라고 허위 보고를 한 때문이었다. (신각과 해유령 전투에 대해서는 기사 '임진왜란 육지전 최초 승리 장군, 참수되다' 참조)

하지만 실제로 성곽이 새로 잘 축조된 것은 아니었다. 1392년 건국 이래 200년 동안 큰 전쟁 없이 지내온, 즉 전쟁 준비와 관련하여 성 쌓기 등의 노동에 동원된 적이 없는 백성들의 불평불만은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일본군이 무슨 수로 바다를 건넌단 말이오?

류성룡도 <징비록>에 전임 성균관 전적(정6품) 이로(李魯)가 자신에게 "이 태평성대에 무슨 성을 쌓는단 말이요? 당치도 않소"라면서 "내가 살고 있는 (경남 합천)삼가 지방만 해도 앞에 정진 나루터가 가로막고 있어 왜적이 결코 뛰어넘을 수 없소.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무턱대고 성을 쌓는다며 백성들을 힘들게 하니 정말 답답한 일이오" 식의 편지를 보내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넓은 바다를 가로질러 쳐들어온 왜구들을 제대로 저지하지 못한 일도 많은데 가느다란 냇물로 막을 수 있다니 내가 더 답답했다. 그런데도 당시 사람들 중에는 그런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았고,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홍문관도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게다가 경상도와 전라도에 쌓은 성들도 규모만 커다랄 뿐 쓸모가 없었다. 본래 험한 산을 활용하여 쌓은 진주성은 방어 요새로 충분했는데, 성이 작다면서 동쪽 평지로 옮겨 새로 크게 짓는 바람에 (1593년 6월) 적의 침입을 받자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성은 규모가 작더라도 튼튼한 것이 가장 중요하거늘, 무조건 크게만 지어 낭패를 본 것이다.

이런 일은 전쟁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기 때문으로, 그 결과 나라의 힘이 한곳에 집중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병법 활용, 장수 선발, 군사 훈련 방식 등 모든 면에서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전쟁이 발발하자 줄곧 지고 말았다.'

전쟁 준비 소홀에 대한 류성룡의 증언은 계속 이어진다.  

'임진년(1592) 봄에 신립과 이일을 파견해 변방을 돌아보도록 했다. 이일은 충청도와 전라도로 가고, 신립은 경기도와 황해도를 순시했다. 한 달이 지나 그들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들이 조사해 온 것은 고작 활과 화살, 창과 칼 따위뿐이었다. 군과 읍에는 문서로만 무기가 있을 뿐 실제로는 무기가 없는 상태였다.'

신립과 이일이 '국경 지대의 성곽들과 무기 준비 상태에 이상이 없다'라는 취지의 보고를 한 때는 4월 1일이었다. 일본군이 쳐들어 와 부산진성을 함락시키는 4월 14일로부터 불과 13일 전, 조선 조정은 그런 상태였던 것이다.

수군 해체 명령까지 내리는 선조와 당시 조선 조정

그렇게 일본의 침략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으로도 모자라 선조와 조정은 수군에 해체령을 내렸다.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바로 그날 <선조수정실록>에는 수군을 없앤다는 명령을 수사(水使)들에게 내려보낸 기사가 실려 있다. 기사는 '해도(海道, 바다를 끼고 있는 도)의 주사(舟師, 수군)를 없애고 장수와 병사들은 육지에 올라와 싸우고 지키도록 명했는데, 전라수사 이순신이 "수륙(水陸)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안 됩니다" 하고 반대하여 호남의 주사만 홀로 온전히 남았다'라고 증언한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조선 지도부는 어째서 수군 해체령을 내렸을까? 그들은 '섬오랑캐들은 바다의 수전에 능숙한 반면 말을 타고 싸우는 기전에 서툴고, 우리나라는 기전에 장점이 있어도 수전에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적들이 전함으로 맞싸우지 않고 지는 체하며 그들을 육지에 끌어들인 다음 기병으로 공격하면 거의 물리칠 수 있다.(<세조실록>1457년(세조 3) 1월 16일)'라고 오판한 결과였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까지 200년에 걸친 통일 전쟁을 하며 일본군이 쌓은 경험은 모두 육지전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요약하면, 선조와 조정은 수군 해체 명령을 내리고, 백성들의 불만이 높다는 이유로 성 축조 등을 사실상 포기하고, 군사와 무기도 준비하지 않는 등 거의 전쟁을 대비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 직전 3년 내내 '정여립의 난'을 둘러싼 피바람에만 몰두해 있었다.

정여립이 서실을 차려놓고 동조 세력과 더불어 활쏘기 연습을 하는 등 활동 무대로 삼았던 천반산 아래 죽도마을 쪽에서 흘러내려오는 금강의 겨울 풍경
 정여립이 서실을 차려놓고 동조 세력과 더불어 활쏘기 연습을 하는 등 활동 무대로 삼았던 천반산 아래 죽도마을 쪽에서 흘러내려오는 금강의 겨울 풍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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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은 1546년(명종 1)에 태어났다. 1570년(선조 2) 과거에 급제한 뒤 이율곡 등 서인들의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아 세상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그런데 서인이던 정여립이 1584년부터 갑자기 집권 세력인 동인 쪽에 줄을 서버렸다. 그는 서인의 집중적인 미움을 받게 되었고, 선조로부터도 비난의 말을 들었다. 결국 그는 동인 세력의 강력한 천거에도 불구하고 관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선조실록>1585년(선조 18) 6월 16일


선조가 "정여립의 짓(이율곡을 헐뜯은 일)은 사람의 상식에 맞지 않기 때문에 내가 처음에는 떠도는 말이 아닌가 여겼는데, 뒤에 들으니 참으로 헛말이 아니었으므로 반측무상(反側無狀, 두 마음을 품고 함부로 행동함)한 자라고 전교(傳敎, 명령을 내림)하였다"라고 말했다.

그 후에도 정여립은 동인 내에서 변함없는 인망과 영향력을 누렸다. 특히 그의 명망은 전라도 일대에서 매우 높았다. 감사나 수령들은 다투어 정여립의 집을 찾았다. 그는 진안 죽도마을에 서실을 지어놓고 군사 조직 성격의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달마다 활쏘기 모임인 사회(射會)를 열었다.

대동계의 조직은 점점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1589년 10월, 정여립과 대동계가 한강물이 꽁꽁 언 때를 이용하여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서울로 진격하기로 했다는 고발이 조정에 접수되었다. 조정이 체포령을 내리자 정여립은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집을 떠나, 평소 자주 머물렀던 죽도로 피신했다가 마침내 자살했다.

송강사 입구 정철 신도비. 왼쪽으로 홍살문이 보인다.
 송강사 입구 정철 신도비. 왼쪽으로 홍살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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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동인 위주로 1천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무참하게 처형되었다. 보통 "기축옥사"라 불리는 이 처형 사건은 무려 3년 동안이나 진행되었다. 심지어 동인의 영수였던 이발까지도 정여립의 집에서 그의 편지가 발견되었다는 죄목으로 고문을 받던 중 옥에서 죽었고, 우의정 정언신도 정여립과 9촌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했다. 묘향산에 머물던 서산대사도 끌려나와 선조가 직접 취조하고 고문하는 친국(親鞫)을 받았고, 사명대사도 강릉부로 잡혀나와 조사를 받았다.

기축옥사의 총지휘자가 되어 1천여 명을 죽이는 정철

기축옥사의 총지휘자는 서인의 영수 정철이었다. 선조는 '정철이 개인 감정이나 당파에 따라 억울한 사람을 몰아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은근히 (정철을) 부추겼다.(이이화 <조선과 일본의 7년전쟁>)'

하지만 선조는 정여립 사건이 마무리된 후에는 오히려 '정철이 정여립 사건을 이용하여 자기 세력 확대에 골몰하고 있다'라는 동인들의 주장에 솔깃해졌다. 결국 선조는 1591년 2월 정철을 파직해버렸다.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라고 주장하자 '조정의 기강을 마음대로 하여 그 위세가 세상을 뒤덮을 지경'이라면서 그를 내쫓아버렸다. 이때 이후 정철의 정치적 생명은 사실상 끝났고, 다시 정권은 동인으로 넘어갔다. 

정여립의 활동 무대이자 그가 죽은 죽도마을에서 아래로 본 금강 풍경
 정여립의 활동 무대이자 그가 죽은 죽도마을에서 아래로 본 금강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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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사건이 잠잠해진 1590년 3월, 조선통신사 일행이 일본으로 출발했다. 일본이 정말 침략할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무엇을 노리고 있는 것인지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통신사 정사는 황윤길, 부사는 김성일, 서장관은 허성, 수행무관은 황진이 맡았다.

통신사는 이듬해인 1591년 1월 부산으로 돌아왔다. 부산에 당도한 황윤길은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부터 황급히 파발마에 실어 조정으로 발송했다. 하지만 김성일은 생각이 달랐다. 김성일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풍신수길이 말 그대로 우리 땅을 빌려 명을 공격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는 우리나라에 쳐들어올 마음인지, 또는 국내용의 어떤 정치적 책략을 염두에 둔 행위인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국가 전체가 전쟁 준비 태세에 돌입할 수는 없소. 전쟁이 없는데도 그런 식으로 정치를 몰고 가면, 그렇지 않아도 굶주림과 질병에 빠져 허덕이고 있는 우리 백성들을 더욱 고통 속으로 빠뜨리는 학정이 될 뿐이오. 최소한, 왜적이 내일 당장 전쟁을 일으켜 바다를 건너오는 것처럼 선동해서 백성들을 세금과 부역의 고통으로 몰아넣는 일은 결코 있어서 안 되오."

송강사 경내의 정철 시비
 송강사 경내의 정철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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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두 사람은 선조에게 정반대의 보고를 했다. 요약하면, 임진왜란 직전 3년 동안 선조와 조정은 성을 쌓거나 군사 훈련을 시키는 등 구체적으로 전쟁에 대비하는 사업을 펼치지 않았다.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두 사람조차 의견이 달랐다. 집권 세력 동인은 같은 동인인 김성일의 견해를 따랐다. 게다가 선조와 동인들은 터무니없는 수군 해체령까지 내렸다. 임진왜란 직전 3년 동안 조선 조정은 '정여립의 난'에 매달려 여념이 없었다. 류성룡은 당쟁 등의 일화를 모은 <운암잡록>에 이렇게 썼다.

'3년이 채 못 되어 연루되어 죽은 자가 거의 1천 명에 이르렀다. 정여립과 (그의 부하) 변사의 시체를 싣고 와 백관이 늘어선 곳에서 머리를 자르고, 그 머리를 철물교 밑에 걸었다. 그의 처자를 주륙하고,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묘를 파냈다. 그의 집은 더러운 연못으로 만들었고, 그가 살던 금구군을 전주에 소속시켰다.

10년에 걸쳐 사람과 소의 전염병이 이어지고 5∼6년에 걸쳐 태백성(금성)이 대낮에 나타나고 흰 무지개가 수도 없이 해를 꿰뚫었다. 도성에 검은 기운이 자주 돌아다니는 따위의 변고도 잦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여립의 난으로 말미암은) 큰 옥사가 일어났고, 거의 마무리되자 임진왜란의 화가 닥쳐 도성이 뒤집어졌다.'

오늘 정철의 사당 송강사를 둘러보며 임진왜란 초기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본다. 어째서 조선 조정은 그토록 임진왜란 준비에 허술했을까? 정여립의 난은 실제로 그가 계획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정철 등 서인들이 조작한 것일까? 사건이 일어난 지 420년이 더 지났는데도 여전히 논란이 끝나지 않고 있는 정여립의 난, 그 실체가 궁금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정철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선조의 앞잡이가 되어 사람들을 죽였을까? 장덕순은 그가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고 했는데, 정철 본인도 그렇게 믿었을까?

송강사 신도비 왼쪽으로 산길을 200미터가량 들어가면 나오는 정철 묘소
 송강사 신도비 왼쪽으로 산길을 200미터가량 들어가면 나오는 정철 묘소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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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정철, #정여립, #죽도, #신각, #해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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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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