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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주말은 내내 박탈당했다. 학생 때는 토익학원을 다녔고, 취업 대비 스터디를 했다. 첫 직장은 대기업이었다. 누가 봐도 빠듯한 마감 기한에 일을 마치려면 주말에도 나와 일해야 했다. 내 뒷자리에 앉던 대리는 회사 내에서 가장 일을 잘했다.

늘 벌건 두 눈을 껌뻑거리던 그는 나에게 다들 이렇게 사는 거고, 어딜 가든 똑같다고 얘기했다. 그는 자주 아팠다. 난 아프지 않았지만, 평일엔 집에 가서 쓰러져 자기 바빴다. 토요일에야 여자 친구와 저녁 약속을 잡았다. 그마저도 한 시간씩 미루다가 수 시간이 늦어지곤 했다. 밤늦게 잠깐 차 한 잔 마시고 헤어지는 데이트가 잦아졌다. 얼마 후, 여자 친구와 완전히 헤어졌다. 양복 입고 쳇바퀴 구르듯 느껴지던 대기업의 일상은 내 몸뿐 아니라 마음도 굳게 만들었다. 조금은 충동적으로 그만뒀다.

드라마 만드는 일을 하는 동안은 옷이 훨씬 편했다.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었다. 다만, 그만큼 상사가 사람을 부리는 것도 쉬웠다. 처음, 내가 촬영 현장에 갔을 때 누구도 나의 정확한 직함을 부르지 못했다. 두 가지 일을 했기 때문이었다. 예산을 최대한 아끼려던 상사는 드라마 현장에서 연출부와 제작부 일을 동시에 할 사람이 필요했고, 평균보다 터무니없이 적은 급여를 주며 내게 두 가지 임무를 맡겼다. 조금 발끈했다. 제작이사는 그럴 때마다 열정과 배움, 인내와 같은 단어를 들이밀었다, 그 단어들은 내가 가졌던 약간의 반항심을 들어 올려 내버리는 지렛대가 되었다.

햄버거나 김밥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밤샘 촬영을 하는 건 놀라움이 낄 틈 없는 예삿일이었다. 나와 같은 곳을 바라봤던 젊은 스텝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의지했고, 온 힘을 다해 드라마를 완성했다. 하지만, 촬영장에 거의 오지 않던 상사는 강남에서 낮술을 자주 마셨다. 난 늘 평소 자신의 진보적인 정치색을 뽐내듯 말하던 상사를 의심했었다. 드디어 어느 날, 그가 "젊은이들은 돈을 조금 주고 막 굴려도 된다"고 얘기하는 것을 뒤에서 들었다. 앞뒤에 무슨 문장이 있었는지는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았다. 다음 해가 오기 전, 그만뒀다.

'저녁 있는 삶' 이란 말이 오랜 전부터 들렸었다. 요원해보였지만 재취업을 모색하며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재고 또 쟀다. 그런데 이제 질렸다. '저녁 있는 삶'은 차치하고서라도 '주말 있는 삶' 정도라도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이 있다는 것. 주말의 시간을 자기 의지대로 보낼 수 있는 것. 나의 주말이 외부에 의해 박탈당할 때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주말을 보낼 것이라는 상상을 해봤다. 나보다 더 만족스런 주말을 보내는 사람도, 나보다 더 어쩔 수 없는 주말을 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최근의 주말은 이상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이유로 한 공간에서 같은 행동을 하려고 모였다. 이번 주 토요일 밤엔 정점을 찍었다. 유례없는 200만에 가까운 수의 사람들이 같은 주말을 보냈다.

수많은 사람들의 주말이 이렇게 응집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원래 주말은 어땠을까. 앞으로 그들이 더 바라는 주말의 단상은 뭘까. 자못 궁금해졌다. 그 현장에 가 보기로 했다.

나는 3호선을 타고 경복궁역에서 내리기로 했다. 그곳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과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하지만, 이미 가는 지하철 칸칸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득 찼다. 그 어떤 출 근 길에도 볼 수 없었던 만원 지하철 속에서 간신히 부대끼는 몸을 지탱하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5차 범국민대회 풍경
 5차 범국민대회 풍경
ⓒ 남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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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역 7번 출구에 내렸다. 한때 자주 쏘다니던 산책길이었다. 광화문 일대 빌딩숲을 걸으며 고즈넉한 바람을 맞고 산책하는 것을 즐겼었다. 그런데, 오늘은 좀 달랐다. 빌딩숲마다 가득 찬 건 바람만이 아니었다. 촛불이 가득 찼고, 수많은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난 주 친구 결혼식에서 인상 깊게 들었던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스쳐갔다.

본격적으로 걷기에 앞서 밥부터 먹기로 했다. 식당마다 줄을 서있는 사람들은 번호표처럼 '하야하라.', '퇴진하라' 같은 피켓을 들고 있었다. 뒷골목의 한 식당을 들어갔다. 하나 남은 자리에 앉았다. 분식을 파는 식당이었는데, 촛불이 놓인 테이블 위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식사를 하고 있었다. 라면과 만두 같은 것을 먹고 있는 것을 유심히 보지 않는다면 분위기 좋은 이태리 레스토랑에 온 건지도 모를만한 착각이 들었다. 식당안의 사람들은 전부 뉴스를 봤다. 그리고 저마다 하나의 이름을 접시위에 얹어 얘기하고 있었다.

5차 범국민대회 풍경. 식당 앞에 줄이 길다.
 5차 범국민대회 풍경. 식당 앞에 줄이 길다.
ⓒ 남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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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든히 배를 채우고 몇 명의 사람들과 주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안경을 쓴 유순한 인상의 청년 강진구씨(25세)를 처음 만났다.

"전 캐나다에서 왔습니다. 잠깐 한국에 왔어요. 평소 주말엔 취업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만, 요즘은 계속 뉴스만 봤어요. 이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나오게 됐습니다. 앞으로 이런 주말을 보내고 싶진 않아요."

충북 제천에서 온 신지원양(16세)은 아버지를 따라 같이 왔다고 했다.

"전 주말에 친구들과 놀거나, 늦잠을 자요. 오늘은 아버지와 같이 나왔는데 너무 추워요. 주말이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울산에서 올라온 연인도 있었다. 홍아무개씨(31세)와 김아무개씨(31세)는 울산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다. 홍씨는 주말을 포기하고 서울에 올라온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저는 평소 주말에 등산이나 테니스와 같은 운동을 즐겨요. 주중에 쌓인 피로를 해소하는 저만의 방식이에요. 진실에 대한 규명이 꼭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국민의 목소리에 힘을 실으려고 왔어요."

향후 그는 주말에 사진을 배워 여행하고 풍경 사진을 집중적으로 찍어보고 싶다고 했다.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김씨도 한마디 보탰다.

"저도 주말에 필라테스나 등산 등 운동을 즐겨요. 남자친구와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기도 하고요. 국민 한 명 한 명이 모이면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믿어서 오게 됐어요. 전 인생의 버킷리스트가 100개정도 있어요. 앞으로 주말에 해야 할 것이 많아요. 빨리 이 시국이 정리됐으면 좋겠어요."

서울 쌍문동에서 직장동료들과 함께 온 이준섭씨(29세)도 만났다.

"결혼 한 이후 주말에 아기를 돌보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편이에요. 오늘은 아내 혼자 아기를 보고 있어요. 무엇보다 서민들도 살기 좋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지금보다 좀 더 여유롭고 나아진 주말을 보내고 싶네요."

서울에서 온 임병윤씨(50세)는 꽤 이른 시간부터 나온 것 같았다. 추위에 얼굴이 빨갛게 일어나 있었다.

"전 주말에 가족들과 등산을 가는 편입니다.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것은 특별한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SNS의 영향으로 젊은이들이 더 많이 참여한 것 같고, 저보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도 보여서 기분이 좋습니다. 이제 그만 내려오셨으면 좋겠어요. 주말에 다들 고생하잖아요."

서울 금천구에서 온 이예진씨(27세)는 털모자와 장갑 등을 단단히 챙겨 나왔다.

"주말에 열심히 취업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수많은 국민들이 춥지 않은 주말을 보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나왔어요. 앞으로도 주말에 집회가 있으면 계속 나올 예정이에요."

일산에서 온 이승재씨(36세)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난히 상기된 표정이었다.

"주말에 운동하고 될 수 있으면 휴식을 취하는 편이죠. 하지만 이번 주말엔 당연히 나와야 할 것 같더군요. 물론, 저는 운동하고 여유롭게 취미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주말을 꿈꿉니다."

대구에서 온 박아무개씨(25세)는 처음에 수줍어했지만, 이야기를 나눠보니 강단이 느껴졌다.

"평소 주말엔 취업을 대비한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최근의 사태를 지켜보다 너무 화가 나서 올라왔습니다. 국민들이 왜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할까요. 계속되는 불통이 정말 화가 나게 만들었어요. 전 그저 대단한 것 없는 평범한 주말을 보내고 싶어요."

서울 금천구에서 온 윤아무개씨(40세)는 가로등 밑에서 담배를 태우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영화 일을 하며 글을 쓰고 있어요. 주말엔 집에서 푹 쉬는 편이에요. 이 시국이 정리됐으면 좋겠어요. 하루 빨리 제 방식대로 보내던 주말다운 주말을 보내고 싶네요."

의정부에서 온 김아무개씨(27세) 역시 벤치에 앉아 친구와 잠깐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당연히 한주동안 피곤했으니까 주말엔 집에서 쉬는 편이죠. 하지만 이번 주엔 국민의 권리를 행사하러 나왔어요."

광화문 일대를 걷고, 사람들의 주말을 짧은 시간동안 들어봤다. 난 주말을 내 의지대로 쓰고 싶다고 생각해 왔다. 이번 주말, 난 온전히 내 의지대로 다른 사람들이 어떤 주말을 보내는지에 관한 호기심을 풀러 나갔다. 그런데 이번 주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대로 주말을 보내는 건지, 어쩔 수 없는 이유에서 주말을 보내는 건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오늘은 첫눈이 내려서인지 밤이 깊어 갈수록 조금 추운 주말이었다.


태그:#주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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