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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다.
여기서 세상은 미국이고, 나는 흑인인 자신이다.
책은 "세상과 나 사이"라는 리처드 라이트의 시를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어느 날 아침 숲속을 거닐다 갑자기 그것과 마주쳤다. 
비늘 덮인 떡갈나무와 느릅나무가 파수를 선 풀밭 공터에서 그것과 마주쳤다. 
그 현장의 그을린 온갖 것들이 일어서며 세상과 나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책에는 수도없이 많은 미국에서 흑인들이 겪은 참혹사들이 등장한다. 누구도 정리하지 않은 사건들을 일부러 기록해놓은 것처럼. 새삼 깨닫는다. 그냥 그런 사고가 있었구나하고 지나쳤던 일들이 이렇게나 반복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에 대해서 모른척 했다.

타네하시 코츠는 아들이 살아갈 세상이 어떤 곳인지 무척 현실적으로 설명한다. 얼마나 가혹한지, 얼마나 차별적인지를 가감없이 이야기한다. 그는 몽상가로 사는 것을 경계한다. 오히려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하기를 바란다. 흑인들에게 꿈은 어쩌면 "백인이고 싶은 욕구, 백인인 것처럼 말하고 싶은 욕구, 백인인 것처럼 생각하고 싶은, 다시 말해 자신이 인간의 설계 결험을 뛰어넘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싶은 욕구(221)"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고 오히려 그 꿈이 "세계에 어떤 짓을 해 왔는지 눈을 뜨게(221)" 해야한다고 말한다. 몽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곧 비관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흑인이라는 정체성을 곧추 세우고 "검은 에너지의 온기, 우리 특별한 세상의 온기(221)"의 아름다움을 한껏 느끼고 발산하게 하려는 것이다.

세상은, 그러니까 미국은 백인 권력이 난무한다. 피부색의 차이가 차별이 되는 것은 권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차별은 몸의 훼손으로 이어진다. 정희진은 추천사에서 이 책이 흑인의 신체 훼손의 역사라고 말했다. 그리고 권력은 "몸이 부여한 정체성의 지도를 찢을 수 있다(234)"고 했다. 또 몸은 사회적이라고 말하면서, 몸이 언제나 해석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한 방울의 규칙은 실로 놀랍다. 한 방울이라도 흑인의 피가 섞이면 그는 인간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벗어날 수 없었다. 우리가 걷는 땅에는 지뢰선이 깔려 있었어. 우리가 숨쉬는 공기엔 독이 있었고, 물은 우리의 성장을 방해했다. 우리는 벗어날 수 없었다. (47)"

그곳은 벗어날 수 없는 현실, 백인의 폭력은 정당화되면서도 흑인에게는 비폭력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벗어날 수 없는 세계였다. 생각해보면 어디나 그렇다. 힘을 가진 자들의 폭력은 언제나 정당화되고, 소수자들은 아주 작은 빈틈도 분노의 대상이 된다. 책을 읽으면서 소수자로서 여성과 흑인이 닮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자신의 정체성을 숨길 수 없다는 점도, 여러 형태로 신체의 훼손을 당하게 된다는 점도 모두 닮았다. 흑인이 백인의 노예가 되어, 몸에 대한 주권을 백인이 쥐고 흔드는 것처럼, 여성은 남성에게 성적 유희의 대상이 되어 몸이 훼손된다.

가끔씩 일터에서 느끼는 감정도 비슷하다. 조직에서 나이가 어린, 직급이 낮은 여성으로 사는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조직적 폭력은 언제나 정당화된다. 그리고 폭력의 대상이 되는 나이가 어리고 직급이 낮은 여성에게는 언제나 비폭력의 도덕성을 요구한다. 싸가지가 없다느니, 태도가 불손하다느니 하는 것들이 다 그런 맥락이다. 직급이 높은 남성은 소리를 질러도, 무례해도, 일을 개발새발해도 괜찮다. 그런데 직급이 낮고 나이가 어린 여성은 할말을 할 뿐인데도 싸가지가 없다느니, 너무 뻣뻣하다느니와 같은 말을 수도 없이 들어야할 뿐 아니라 작은 실수도 허용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우리 사회의 폭력은 일상에 만연하다. 고용의 형태, 출신대학, 학력, 돈 등 누구에는 있고 누구에게는 없는 모든 것이 폭력이 된다. 폭력의 피해자는 다시 자신이 가진 어떤 것을 통하여 폭력을 행사하므로써 사회의 질서를 유지시킨다.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는 우리는 폭력을 휘두르는 주체가 되기도 하고 폭력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나는 비폭력의 도덕성을 말하는 게 아니라, 흑인들에게 유난히 이런 도덕성이 요구되는 것 같은 느낌을 말하려는 거다. 사실 그 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내가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자유를 사랑하는 이 사람들을 평가하는 게 전부였지. 다시 말하면, 세븐일레븐 주차장에서 나오는 아이들에 견주어서, 전선 연장 코드를 휘두르는 부모에 견주어서, 그리고 '그래, 깜둥이 새꺄,  이제 어쩔래?'라는 맞폭력에 견주어서 그들을 평가했던 거다. 나는 내가 알고 있던 나라에 견주어서, 살인을 통해 땅을 획득하고 노예제로 그 땅을 길들인 나라에 견주어서, 세계 구석구석으로 군대를 파병해 영토를 넓혀 가는 이 나라에 견주어서 그들을 판단했지. 이 세계, 현실의 세계는 야만적인 수단으로 지켜지고 통치되는 문명이었다.(53-54)"

히네하시 코츠는 이런 말도 안되는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질문하는 건 이제 필수적(55)"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계속적으로 질문을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이 나라를 든든히 받치고 있는 폭력, 흑인 민권 운동의 달 동안 눈꼴사나울 만큼 전시되는 그 폭력과 '그래, 깜둥이 새꺄, 이제 어쩔래?'하는 익숙한 폭력이 무관하지 않다는 거였다. 그리고 이 폭력이 마법처럼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라 애초 설계된 내용의 일부였고, 그 설계의 결과(56)"라는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비인간으로서 대하는 폭력적 세계로부터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세계의 변화가 그들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역사는 온전히 우리 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151)"라고 말하는 그는 "흑인들의 삶에 일어났던 모든 위대한 변화 속에는 우리의 개인적 통제력을 넘어선 사건들, 순수한 선은 아니었던 사건들의 작용(151)"임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사회의 변화라는 것이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그것은 우리의 영역 밖의 일임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네하시 코츠는 아들에게 투쟁하라고 요구한다. 그것은 투쟁이 "승리를 안겨주기 때문이 아니라, 명예롭고 건강한 삶을 보장하기 때문(151)"이며, 존엄성을 지키는 일(154)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투쟁의 결과는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는 내내, 이것이 비단 흑인들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어떤 순간에 내가 느끼는 열패감, 낙심과 아주 비슷했다. 현실의 냉혹함에 대해서 매우 직설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면에선 비관적 현실과 마주하는 것이 힘들기도 했다. 결국 히네하시 코츠는 아들이 어줍잖은 꿈 대신 현실을 직시하고, 그러한 세계에서 어떻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세상과 나 사이>, 타네하시 코츠, 열린책들, 2016.09.05, 1만 3800원



세상과 나 사이 - 흑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타네하시 코츠 지음, 오숙은 옮김, 열린책들(2016)


태그:#히네하시 코츠, #흑인, #흑인 아버지, #인종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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