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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란 말은 역사적 시효가 지나버려서 쓰는 사람이 없기도 하지만 반대로 개나 소나 마구잡이로 갖다 붙여도 되는 단어가 되었다. 본래의 효용을 잃어버린 과거의 단어가 되었다는 것이다.

교육혁명, 몸의혁명, 의식혁명, 산업혁명, 밥상혁명, 독서혁명, 자기혁명, 에너지혁명, 읽기혁명, 집중력혁명, 지역혁명. 스마트 폰을 놓고 책을 읽는 것 자제가 혁명이라서 일까? 이런 혁명들은 모두 다 책 이름이다. 그런데 '소농혁명'이라.

소농이라면 농사가 몇 평?

'혁명' 이야기 전에 '소농'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70-80년대 어디쯤 모임에 가면 늘 자기소개 시간에 "가난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나..."라고 시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소농의 자식이 아니면 낄 수도 없는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소농 자식만 사람이고 나머지는 반동(?)이라도 되는 듯이.

요즘으로 치면, 언론에 나오는 귀농자들이 "...서울의 일류대를 나오고..." 또는 "잘 나가는 대기업에 다니다가...."와 비슷하다 하겠다. 일류대학이나 대기업 출신이 아니면 귀농의 감동이 줄어 들 듯 말이다.

소농을 좀 까칠하게 다뤄보자.

유엔은 1970년부터 세계가 함께 공감해야 할 주제를 정하여 기념해 왔는데 2014년을 가족농의 해로 정했었다. 2011년에 열린 제66차 총회에서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족농을 소농과 혼용하기도 한다.

가족농이 되었건 소농이 되었건 이 말은 쓰는 시대와 나라에 따라 이해가 크게 달라 보인다. 작년 11월에 호주-뉴질랜드로 농업연수를 갔을 때 전형적인 가족농을 하는 '페닌슐라 유기농장'이라는 곳을 가서 농장 주인인 44세의 웨인쉴드와 얘기를 하는 동안 그가 이곳 외에 다른 곳에 농장을 하나 더 갖고 있다고 하기에 트럭을 타고 2-30분 가면 되려니 했다가 350킬로미터나 되는 곳이라 비행기 타고 간다는 말을 듣고 입을 딱 벌린 적이 있다.(졸저 '소농은 혁명이다' 281쪽)

소농에 대한 이해는 사람에 따라서도 다르지 않을까 싶다. 당장 우리나라에서도 논 3만평에 밭 2천 평 농사를 짓는 사람보고 와~ 대농이네! 라고 하면 당사자는 십중팔구 아니라고 손사래를 칠 것이다.

논 3만평 농사를 지어봐야 벌이가 빤하기 때문이고 대형 농기계로 일을 하니까 별로 힘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몇 평 정도가 우리나라 실정에 소농이라고 부를 만한 규모가 될까? 미안하지만 이런 질문 자체가 잘못 됐다고 본다.

다시 유엔으로 가서 개념을 살펴보자. 가족농 또는 소농이 무엇인지 윤곽이 보일 것이다.

"가족농과 소규모 농업의 인지도를 높이고 특히 농촌지역에서 지속가능한 개발을 도모하는 것이 목표."

유엔이 밝힌 가족농의 해 지정 취지다. 이 취지문은 '가족농'을 말하면서 별도로 '소규모 농업'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가족농은 규모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취지문의 뒷부분에 가면 보다 분명해진다.

"식량안보와 영양개선, 생활여건 향상, 빈곤·기아문제 완화, 환경과 생물다양성 보호, 지역경제 유지 등에 기여하도록 한다."

생태질서와 종 다양성

매우 중요한 지적이라고 본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거꾸로 뒤집어 보면 된다.

① 기존의 대규모 기업농은 먼저, 식량안보 문제에 아주 취약하다는 이야기다.

이 문제는 수입국, 수출국을 구분하지 않는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대규모 기업농은 가장 성장이 빠르고 가장 수확률이 좋은 종자를 심을 것이고 여러 화학농자재와 초대형 농기구를 쓸 것이다. 그만큼 위험도가 엄청 높다는 것이다. 왜 위험도가 높다는 것일까?

무엇 하나라도 까딱하면 거대규모 농사가 망가지는 것이다. 외부 환경변수건 내부 요인이건 상당한 위험부담을 안고 짓는 농사라 식량안보에 취약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나라 돈벌이 농사하는 농민들도 거의 투기농업, 카지노농업에 가까운 심리를 갖고 있다. "3-4년 꼴아 박아도 한 번만 대박나면 돼"라는 말을 공공연히 한다.

② 대농 또는 기업농은 영양문제도 안고 있다는 것이고 (농민들의) 생활여건도 열악하다는 말이다.
<소농은 혁명이다>표지
▲ 책 이름 <소농은 혁명이다>표지
ⓒ 살림과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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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유엔은 가족농(소농)을 통한 영양개선, 생활여건 향상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규모 있는 기업농 농산물의 영양가와 음식으로서의 값어치는 거의 쓰레기 수준이라 하면 될 것이다. 가공과 양념으로 밥상에 오르는 실정이니까 하는 말이다.

그런 농민들은 외형이야 번지르르 할지 모르나 일종의 현대판 농업노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물선택도, 파종시기도, 농사 면적도 사실 다 자본이 주도하는 시장 변수에 따른 외부요인으로 결정한다. 그러니 종이라고 하는 것이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대농의 생활여건도 말도 아닌 것이다.

취지문이 지적하는 하나하나가 오늘날의 시민건강과 농민현실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있다.

가족농의 해 취지문은 빈곤과 기아 문제가 초국적 농업기업과 유통, 가공 기업 때문이라고 우회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뒷부분에 언급된 "종의 다양성과 지역경제 유지 등에 기여한다"는 지적을 보면 소농(가족농)에 대한 중요함과 기대가 묻어난다.

이제 소농이 뭔지 개념이 잡힐 것이다. 절대 농사 규모가 중심이 아닌 것이다. 지역의 사회적 경제에 참여하면서 가족의 몸 노동에 크게 의지하는 농사를 짓고 생태질서와 종 다양성을 해치지 않는 농사가 소농인 것이다.

그러자면 자연히 큰 규모의 농사로는 불가능 할 것이다. 생태질서와 종 다양성을 해치지 않는 농기계가 어떤 수준일지는 작물과 지역에 따라 따져 볼 수 있다고 본다.

도시인도 소농으로 살 수 있다

"식량안보와 영양개선, 생활여건 향상, 빈곤·기아문제 완화, 환경과 생물다양성 보호, 지역경제 유지 등에 기여하도록" 하는 것은 꼭 농부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인스턴트 음식을 안 먹는 것이라든가 육식을 끊고 채식을 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된다.

그래서 유엔이 정한 '가족농의 해' 취지문에 합당한 삶을 소규모 농사를 짓는 농부에 한정하지 않고 '소농적 삶'을 사는 사람들로 확장 할 수 있는 것이다.

7월 2일. 농업진흥청 앞에서 열린 대규모 유전자조작식품(지엠오 GMO)반대 집회 참석자들의 반 이상이 도시의 이용자들이었다. 생협 소속 조합원이 대부분이었다. 그들도 소농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 할 것이다. 지엠오 식품은 식품 적격성도 문제려니와 생명다양성 파괴와 환경오염의 주범이기 때문이다.

해충 저항성 콩과 제초제 저항성 옥수수를 만들어내면서 위대한 발명이라도 되듯이 선전하지만 사실은 더 지독한 살충제와 제초제를 마구 뿌리게 했다. 지엠오가 신체건강에 위해하냐 여부를 가지고만 왈가왈부 하는 것은 지엠오 논쟁의 핵심이 아니다. 지엠오는 농부들을 임대농노예(소작노예)로 전락시켜 빈곤에 빠지게 한다. 아르헨티나가 전형적인 사례가 된다.

지역경제에 기여하기는커녕 초국적 대자본의 이익에 충실한 것이 지엠오라서 지엠오에 반대하는 도시인들은 소농의 지지라라고 할 수 있다.

자 그러면 재미삼아 퀴즈 하나 풀어보자. 소농적 삶을 사는 사람 알아맞히기다. 어떤 사람이 있어 소주와 막걸리 또는 연어 회를 좋아한다고 하자. 이 사람은 소농적 삶을 사는 사람일까 아닐까. 질문이 생뚱맞을 것이다. 한 번도 연결 지어서 생각해 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소주나 막걸리는 단순한 술 취향인데 무슨 소농적 삶 운운 하느냐고.

어떤 밥상 앞에 앉는가도 소농의 기준

이상한 질문은 상식에 벗어나는 쪽이 해답에 가깝다. 그래야 질문으로서 존재감이 있다. 소주와 막걸리, 연어 회를 좋아하는 사람은 '소농사람'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초국적 식품회사와 국제교역, 유전자조작 식품을 지지하기에 그렇다. 설탕의 200배 당도를 지닌 합성감미료 아스파탐을 즐기는 사람이기에 반 소농적 삶을 사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이러다가는 막걸리나 소주 한 잔도 마음 놓고 못하란 말이냐고 반발심이 생길 수 있다. 우리 식탁에 반 소농적인 생명파괴 음식이 하도 범람하는지라 이런 일이 벌어진다. 아스파탐을 안 먹기로 작정했다면 '페닐알라닌 함유'가 무슨 말인지 알아야 한다.

갑자기 페닐알라닌이 왜 튀어 나올까? 아스파탐이 들었다는 것을 이렇게 표기한다. 이용자를 헷갈리게 하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페닐알라닌이 국민적 상식이 되는 때가 되면 '둘신'이나 '시클라메이트'라는 말로 이용자들을 또 헷갈리게 할지도 모른다.

합성착색제나 합성감미료 등 모든 합성식품들은 생물체를 매개로 하지 않고 무기물에서 순수하게 물리화학적으로 만든 인위적 식품이라 자연생태계를 혼란에 빠뜨리므로 소농적 범주에 들 수 없다. 소농은 이제 사회인문적 개념인 것이다.

내가 <<소농은 혁명이다>>에 실린 <소농, 이것이 진짜 혁명이다>는 글을 쓴 때가 2012년 6월이었다. 장장 200자 원고지 75매나 되는 논문 수준의 분량이었는데 이 글이 실린 <<녹색평론>> 125호, 2012년 7-8월호가 발매되자 여기저기서 강의 요청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노동당 농업위원회와 한 살림 조합원의 요청이었다.

당시 나는 녹색당 당적을 갖고 있었는데 노동당에는 이전의 진보신당에서 활동하던 옛 동지들이 많이 있었다. 소농에 대한 가벼운 토론이 진행되었는데 소농은 삶의 방식이자 철학이라는 점에 동의했다. 도시와 농촌을 구분하지 않고 '소농적 삶'을 적용할 수 있다는 주장에도 많은 사람들이 동의했다.

혁명이라는 단어가 굴러다니는 폐지만큼도 취급되지 않던 때에 이 글에서 굳이 혁명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생활전환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건강 서적으로 김철 선생의 <몸의 혁명>이 나와 있었고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 혁명>도 출간된 때다. 혁명은 더 이상 피 냄새를 품기는 것이 아니었다. 교육혁명, 몸의혁명, 의식혁명, 산업혁명, 밥상혁명, 독서혁명, 자기혁명, 에너지혁명은 다 일상의 전복을 요구하는 책들이다.

체제나 제왕이 혁명의 대상이 아니라 일상의 삶이 혁명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은 총칼의 지배에서 이데올로기의 지배, 자본의 지배, 시장의 포로로 넘어 왔으며 전일화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소농은 혁명이라고 부르짖는 것이다.

퀴즈를 하나 더

깡 시골 농협에 부속 매장이 있는데 상호가 '파머스마켓'이다. 농민들의 협동조합 신용사업기관인 은행의 공식 명칭이 'NH농협은행'이다. 이것들은 소농적 언어일까 아닐까? 둘 다 '아니오'이다. 물론 내 기준이다.

그렇다면 수수께끼라 하지 않고 퀴즈라고 썼는데 이건 어떨까? 전국에 무슨 무슨 '센터'가 범람하는데 '원(院)'이나 '중심'이라 하지 않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원보다도 중심보다도 센터가 훨씬 친숙하게 들리고 의미전달도 빠르다면 우리는 뼛속까지 반 소농적 삶으로 오염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길거리 주유소 간판에서 '엘피지'라는 간판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안 보이고 'LPG'만 들어 서 있다는 것은 온 나라의 얼과 혼이 망가졌다고 주장하면 무리일까? 그래서 혁명인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혁명적 전환을 시도해야 할 정도로 중증이다. 농민이건 도시민이건 남자이건 여자이건 노인이건 어린이이건 다 '소농 혁명'에 나서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소농해서 먹고 살 수 있나

어디서건 모임에서 농사 짓는다고 소개를 하면 곧바로 난처한 질문을 받게 된다. "무슨 농사 짓느냐?"는 질문이다. 참 난처하다. 애써 대답을 하면 또 더 난처한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평 당 소득이 얼마나 되나요?"라는 질문이다.

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이 내가 지은 집을 보면서 하는 질문도 비슷할 때가 있다. "이런 집 지으려면 평당 얼마나 들어요?"라는. 정말 난처한 질문이다. 아니, 속된 말로 무식한 질문이다.

옛날에는 뭐 하냐는 질문에 농사 짓는다고 하면 끝이었다. 농사 짓는 사람은 먹을 것 다 심는다. 무슨 농사 하는지는 물을 필요가 없다. 팔기 위해 농사 짓는 게 아니라 먹기 위해 농사를 짓기 때문이다. 그게 기본이고 남는 것을 팔아서 다른 생필품을 산다.

과일은 집 뜰에도 심고 밭가에도 심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농사가 파는 것을 목적으로 작목을 선택하고 지역을 선택하는 '경영인'이 되었다. 농업의 산업화, 농장의 공장화가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소농은 곧 골병이라는 말이 있다. 농기계도 안 쓴다, 비닐멀칭도 안 한다, 거름도 안 넣는다면서 맨 몸으로 농사를 지으려다보니 몸이 망가진다는 것이다. 그 말은 다른 말로 하자면 먹고 살기 힘들다는 얘기다. 소농 해서는.

사실, 소농 아니라 뭐를 해도 요즘 먹고 살기 힘들다. 다들 아우성이다. 쌓아 놓은 돈이 있지 않고서는 취미로 농사짓는 게 아닌데 먹고 사는 게 걱정 될 수도 있다.

그런데 한 번 차분히 자신에게 물어 볼 필요는 있다. 먹고 살려면 얼마나 벌어야 하는가. 그만큼 벌면 나는 행복할 것인가. 꼭 그렇게 벌고, 쓰고 살아야 하는가. 내가 쓰는 돈들이 다 나를 살리는 지출들인가 나를 도리어 지치게 하는 지출들인가.

이 세상은 먹고 살기 힘들게 누군가가 조종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는가.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고 명목 소득이 높아져도 만날 아등바등 온 식구가 새벽부터 밖에 나가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이 좀 수상하다고 생각 해 본 적은 없는가 말이다.

유기농과 자연농이 뜬다고 하니 대형 농산물 매장에 유기농 매대가 생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기 인증제가 생겨나고 유기농 인증기관이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아울러 부정 엉터리 가짜 유기농 인증 제품들이 뉴스에 나오고 고발사태가 일어났다. 우리의 일상이 돈벌이가 최고의 목표가 되었기에 이런 일들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소농은 삶의 선택이고 지구를 가꾸는 정원사

소농은 농사 방법만도 아니요 새로운 고수익 모델도 아니다. 삶의 선택이고 삶의 전환이다. '벌어먹고 사는'문제도 새로운 시선으로 접근하는 것이 진정한 소농이라 하겠다. 시장에 의존하지 않는 삶, 내게 필요한 재화는 내 손으로 장만하는 삶. 자긍심과 자존감을 회복하는 삶.

2011년 8월에 나온 어느 여성지에 재미있는 실험결과가 소개된 적이 있다. 자연재배와 유기재배, 일반 화학농사로 지은 당근과 오이, 무를 세 개씩을 가지고 부패실험을 한 기사다. 이와 유사한 자료와 실험이 참 많다.

그래서 그 차이들이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일반 화학재배 농산물은 바로 썩어서 악취를 풍기지만 자연재배 농산물은 천천히 시들어 갈 뿐이라는 결과치 말이다.

놀라운 것은 4년이 지났는데도 자연재배 무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그 힘이 어디에 있을까? 아주 간단하다. 자연을 속이지 않고 자연의 흐름대로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다. 자연을 속이지 않았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정직했다는 말도 된다.

소농은 이런 삶을 본으로 삼는다. 자신을 속이지 않고 자연과 이웃을 착취하지 않는 삶이다. 현대의 모든 문명병들은 우리가 자연과 멀어진 거리 만큼에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쩌면 자연과 작별하고 침몰하는 난파선 위에서 잔치판을 벌이며 취해 있다고나 할까. 자연에 가깝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그만큼 신성성을 회복하고 있다고 봐도 되겠다.

현대인은 정신과 몸과 마음이 고도 비만상태다

그 고도비만 상태를 전제로 '먹고 사는'문제를 접근하면 해답이 없다. 부풀어 터질 때까지 팽창하는 것이 헛된 욕망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애들 공부나, 집이나, 통장 현금이나, 전자통신 기기나, 음식이나, 자동차나 이런 것들이 과시하기 위한 욕망의 거물에 걸려들었다면 만족이 있을 수 없다. 욕망을 채우는 접근이 아니라 욕망을 버리거나 제어하는 접근이 소농의 삶이다.

최근에 생협에 자연농산물 매대가 생기고 있고 유기농과 자연 소농재배를 구별하는 움직임이 번지고 있다. 참 고무적인 일이다.

예로부터 가장 못난 농부는 풀만 좋은 일 시키는 농부이고 그다음 보통의 농부는 농작물만 키워대는 농부고, 가장 훌륭한 농부는 땅을 살리는 농부라고 했다. 세상도 살고 작물도 살고 자기도 사는 선택이다.

기껏 땅을 살려놨더니 땅 주인이 돌려 달라는 경우가 있다. 자기 땅 없이 남의 땅 빌려서 농사짓는 사람의 애환서린 하소연이다. 그러나 참 농부는 어떤 경우에도 땅을 살리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흙을 살리는 농사 과정에 이미 농부 자신의 몸과 영혼이 건강하게 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고 덤으로 경제 문제도 잘 풀린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잘 만들어 놓은 땅을 주인에게 돌려주게 되는 게 아까워서 함부로 농사짓지 일은 없다. 자동차 보험료가 아까워서 일 년에 가벼운 교통사고 한 두 번 나기를 바라는 바보가 아니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벽신문>과 <녹색당> 행사에서도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소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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