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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구미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앞에 세워진 높이 5미터짜리 박정희 동상.
 경북 구미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앞에 세워진 높이 5미터짜리 박정희 동상.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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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국면 맞이한 박정희 100주년 기념사업

지난 4월 26일 구미참여연대가 발표한 '박정희 뮤지컬 사업 반대' 성명 보도 자료를 시작으로 '박정희 100주년 기념사업'이 구미를, 그리고 전국을 뜨겁게 달구었다. 시비 28억 원을 들여 제작한다는 박정희 뮤지컬의 전면 취소를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7월로 접어들어 '박정희 100주년 기념사업'이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구미참여연대를 비롯한 지역 시민·사회단체의 연이은 성명과 항의 시위, 그리고 누리꾼의 비판이 사이버 공간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구미시 예산결산특별위원회는 지난 5월 26일 별다른 반응 없이 뮤지컬 관련 예산을 통과시켰다. 그렇게 기념사업 추진 의지를 불태우던 구미시와 경상북도가 최근 갑자기 태도를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그 변화의 시작은 "경북도, 박정희 대통령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7월 7일자 경상북도 첫 공식 보도 자료였다. 여전히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이라는데 무엇이 달라졌냐고? 누군가는 의아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엄청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지금껏 사용하던 '탄신'이라는 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구미시는 앞으로 '박정희 탄생 100돌'이라는 공식 용어를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국어사전을 찾아보자. '탄신: 임금이나 성인(聖人)과 같이 높거나 훌륭한 사람이 태어난 날', '탄생: 귀한 사람이나 높은 사람의 태어남을 높여 이르는 말'로 나온다. '임금'이나 '성인', 아니 '반신반인'의 존재였던 박정희가 '귀한 사람', 혹은 '높은 사람'으로 하강한 것이다.

지난 3개월 동안의 치열한 문제 제기에도 공식 보도자료 하나 발표하지 않던 구미시였다. 그러던 중 처음 발표한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이라는 보도자료에서 단어가 공식적으로 바뀐 셈이다. 그러므로 '박정희 100주년 사업'의 시작을 알리는 발표라기보다 '박정희 100주년 사업'의 재검토 발표로 읽을 수밖에 없다.

구미지역 시민단체들은 지난 5월 25일 오전 구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박정희 전 대통령 100주년 기념행사 계획을 취소하라고 촉구했다.
 구미지역 시민단체들은 지난 5월 25일 오전 구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박정희 전 대통령 100주년 기념행사 계획을 취소하라고 촉구했다.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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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제사상이 300억? 끝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동안 '박정희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은 그 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비공개였다. 구미시는 2015년 10월~12월까지 전 조직이 동원된 다섯 차례의 검토회의를 거치면서 '탄신 100주년 사업'을 계획해 왔다.

구미참여연대가 찾아낸 '박정희 100주년 사업' 예산은 지난 6월 중순까지만 해도 40여억 원으로 추산되었다. '박정희 뮤지컬' 제작 28억 원을 비롯해 기존의 추모제와 몇몇 기념사업을 더하면 총 예산이 대략 40여억 원이 넘어선다는 추산이었다. 대부분의 언론도 그 추산을 이의 없이 인용하면서 '박정희 100년 사업'은 40억짜리 사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구미시가 추진 중인 '박정희 탄신 100주년 기념 사업' 관련 문건
 구미시가 추진 중인 '박정희 탄신 100주년 기념 사업' 관련 문건
ⓒ 구미참여연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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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초순, 그동안 정보공개를 거부해 오던 구미시가 일부 자료를 공개했다. 그러면서 기념사업 예산이 불어나고, 심지어 "60억 원 정도" 규모라는 시의원들의 발언까지 나왔다. 이에 기념사업의 규모가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클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7월 4일에 이르러서는 구미경실련의 성명을 인용하며 "기념사업 전체 예산이 300억을 넘는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산 자들의 행복'이 아니라 '죽은 자의 제사상'을 차리기 위해 엄청난 예산이 책정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구미시와 경상북도는 이에 뚜렷한 설명 한마디 없었다. 온 나라가 시끄러울 정도로 비판과 비난이 쏟아졌지만 시의회도, 도의회도 제대로 된 토론 한 번 없이 예산을 통과시키고 있었다.

박정희 뮤지컬에서부터 전국 새마을의 날 행사, 새마을 합창제, 국제 새마을 학술대회 등 새마을 관련 행사를 비롯하여 자연보호헌장 선포 기념식까지. 그리고 산업단지의 날 기념식, 경부고속도로 개통 기념식, 심지어는 민방위의 날 기념식, 향토예비군의 날 기념식이 검토될 정도였다. 이런 행사들이 모두 추진된다면, 2017년에는 그야말로 '과거 회귀적인' 행사가 한 달에 한 번 꼴로 구미에서 펼쳐질 상황이었다. 그것도 2000~3000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행사로 말이다.

"BH가 뭐에요?", '금기어' 한마디에 날아간 그들의 꿈

수많은 시민의 반대에도 박정희 기념사업을 밀어붙이던 경상북도와 구미시의 태도가 돌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구국의 영웅, 박정희 대통령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이라는 경상북도와 구미시의 기념사업 명칭이 갑자기 '박정희 대통령 100주년 기념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대표님, BH가 뭐에요?"
"BH가 누군데 경상북도가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지요?"

그렇다. 경상북도와 구미시의 태도가 돌변한 이유는 시민들의 의사를 수용한 것도 아니고, 그들이 갑자기 박정희 우상화의 문제점을 깨달았기 때문도 아니다. 'BH 등 관계 기관과 협의'라는 문구가 들어간 문서가 유출되었기 때문이다.

BH(청와대) 관련 문건을 우리 구미참여연대는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청와대와 협의"라는 문건이 <오마이뉴스> 등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하면서 경상북도와 구미시는 허둥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관련기사 : 박정희 기념사업, '청와대와 협의' 문건 드러나). 결국 박정희 뮤지컬 제작을 취소한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하고, 그 이후에야 '탄신'이라는 용어가 '탄생'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태도 변화는 시민들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라기보다 대통령에 대한 '심기 경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비난의 불똥이 대통령에게까지 튀지 않게 하기 위한 고육지책인 셈이다. 그러니 그들의 변화는 진정한 변화가 아니라 일시적인 후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박정희 100주년 기념사업'의 시작과 재검토에 이르기까지 '시민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첨단산업도시 이미지 버리고 '박정희 마케팅' 열 올린 구미시

구미시는 스마트폰·반도체 공장 단지가 대거 들어선 곳이고, 전자산업으로 상징되는 첨단산업도시이다. 비록 이제는 과거의 화려했던 이미지는 제법 퇴색했다. 하지만 구미시는 최근 스마트 산업인 모바일 융합산업, 탄소산업과 의료산업, 3D 프린팅 산업 등을 주력 산업으로 육성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그 공언과는 달리 현 남유진 시장이 재임한 10여 년 동안 구미시는 첨단산업의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 새마을 이미지와 독재자의 어두운 기운을 덮어쓰려 하고 있다. 구미시는 그것이 '박정희를 역사관광 상품화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강변한다. 박정희로 인해 성장한 구미에서 박정희를 테마 상품화하여 미래 먹거리를 만드는 것이 '구미의 숙명'이라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1000억이 넘는 예산을 투자하여 박정희를 부각한 구미시의 선택은 시민의 삶을 안중에 둔 것이라고 보기 힘들고, 도시의 미래 먹거리를 고민한 것도 아닌 것 같다. 800억이나 투입한 '새마을 테마공원'이나 200억을 투자한 '박정희 역사박물관', 28억이 들어갈 예정이었던 '박정희 뮤지컬', 300억으로 추정되던 '100주년 기념사업'은 구미를 '1970년대로 퇴행하는 도시'의 이미지로 만들 뿐이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미래의 먹거리가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적 사욕을 채우기에 적합한 이미지였으며, 현 정권에서 손쉽게 선택받을 수 있는 테마를 찾아낸 것에 불과했다. 차기 도지사를 꿈꾼다는 '남유진 시장의 정치적 치장을 위하여 수많은 혈세가 동원되고 있다'고 많은 시민이 비난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고 그들의 지나친 박정희 마케팅은 결국 그 딸 박근혜 대통령의 '심기 경호'를 위해 후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반대 세력 거세당한 구미, 기득권 세력 독주

TK로 상징되는 지역이 대부분 그러하듯 구미시는 조직화한 반대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도시이다. 수십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박정희 100주년 사업'이 일부 시민단체의 문제 제기로 전국적인 이슈가 되었다. 박정희 기념사업에 가장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구미참여연대는 회원 120명의 작은 단체다. 하지만 구미시의회는 제대로 된 토론 한 번 없이 예산을 통과시켰다. 시의회에 야당의원이 2명 있지만 그들은 애초에 저항할 의지조차 없는 것 같았다.

구미에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어 있지 못하며 시민사회 영역은 매우 협소하다. 반면 관변 단체는 보조금을 받으면서 기득권 진영의 든든한 기반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야말로 반대 세력이 거세당한 토양에서 기득권 세력의 독주가 판치는 상황이다.

구미 참여연대가 만든 카드뉴스. "당신은 어디에 살고 계시나요?"
 구미 참여연대가 만든 카드뉴스. "당신은 어디에 살고 계시나요?"
ⓒ 구미참여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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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의 이성적 판단마저 잠든 것은 아니다. 구미참여연대가 '박정희 뮤지컬'을 이슈화하고 '구미시 vs. 성남시' 비교 카드뉴스를 온라인에 올리면서 구미에 대한 외부의 비난은 매우 뜨거웠다. 구미는 박정희 숭배자들만이 사는 곳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구미에 여전히 많은 사람이 살고 있고, 시민들의 상식마저 모두 잠든 것은 아니다. 지난 5월, 구미YMCA에서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의 70%가 박정희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76%의 응답자는 '현재의 추모 사업이 과도하다'고 답하였다. 그리고 구미를 상징하는 것은 '박정희'가 아니라 '금오산'이라고 답했다.

구미YMCA의 여론조사. 구미시에 거주하는 만 19세 이상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박정희 기념사업' 예산에 관해 '과하다'는 평가가 많았다.
 구미YMCA의 여론조사. 구미시에 거주하는 만 19세 이상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박정희 기념사업' 예산에 관해 '과하다'는 평가가 많았다.
ⓒ 구미참여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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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YMCA의 여론조사. 구미시에 거주하는 만 19세 이상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구미 상징' 1위는 '박정희'가 아니었다.
 구미YMCA의 여론조사. 구미시에 거주하는 만 19세 이상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구미 상징' 1위는 '박정희'가 아니었다.
ⓒ 구미참여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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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하자면 '박정희 고향이 구미이니 고향에서 대접할 정도의 적당한 추모 사업은 하되, 지금 구미시가 추진하는 과도한 우상화와 세금 쏟아 붓기 사업은 하지 말라'는 뜻 아닐까. 그리고 참여연대에서 실시한 '찬반 스티커 붙이기' 투표에서는 거의 90%가 넘는 시민들이 '박정희 뮤지컬' 제작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얼마 전 구미참여연대에 가입한 한 회원은 '박정희 동상 세우기' 모금활동에 앞장섰던 과거를 회고하는 내용의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리기도 했다. "그것이라도 세우면 관광객도 오고, 그러면 좀 먹고살 수 있을까 싶어서" 새마을회원으로 활동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구미시의 '박정희 100년 사업'을 바라보는 많은 시민의 심정도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지난 5월 20일 구미참여연대 회원이 구미시청 본관 앞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다. '박정희 뮤지컬' 찬반 의견은 구미 시민들에게서 받은 것이다.
 지난 5월 20일 구미참여연대 회원이 구미시청 본관 앞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다. '박정희 뮤지컬' 찬반 의견은 구미 시민들에게서 받은 것이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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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공식입장 발표 없는 구미시, 지속적 감시 필요

구미시는 아직도 '박정희 뮤지컬' 제작 취소 여부와 관련해 구체적인 입장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박정희 100주년 기념사업'과 관련한 어떠한 공식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다. 다만 "아직은 결정된 바 없다"고 말했을 뿐이다. 지난 12일 구미시에서 열린 반대의견 단체와의 간담회에서도 구미시장은 박정희 기념사업의 규모와 '박정희 뮤지컬'에 대한 입장을 끝내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건의사항을 듣고 결정하겠다'는 자세만 보였을 뿐이다.

수많은 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인데도 시민들에게 의견을 구하고 이를 제대로 반영하는 시스템이 가동된 적이 없는 걸까. 잘못된 행정에 대해 사과한 적이 없는 지금까지의 습성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에 구미시가 상황의 변화에 따라 태도를 바꿀 가능성은 언제든지 열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기념사업'에 시민들의 지속적인 감시가 필요한 이유다. 

삶을 바꾸는 정치, 우리는 그 끈을 놓지 않을 것이다. 구미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공공연히 기득권에 저항하는 것은 '당랑거철'('사마귀가 앞발을 들고 수레를 멈추려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과 같은 형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1000억 원이 넘는 혈세를 자신들의 정치적 사욕을 위하여 쏟아 부으면서 '구미의 미래를 위한 선택'이라고 말하는 정치가 계속되는 한, 우리는 거기에 맞설 수밖에 없다.

남유진 구미시장이 말한 것처럼, 통계상 구미시는 평균 연령 34세로 젊은 도시에 속한다. '박정희 뮤지컬' 제작 시도는 과도한 예산 투입을 통한 기념사업 중 하나로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는 정치 흐름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였다. 구미참여연대는 구미에서 젊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정치가 이루어지는 날까지 우리는 계속 부딪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황대철 시민기자는 구미참여연대 공동대표입니다.



태그:#박정희 기념사업, #구미참여연대, #구미, #박정희 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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