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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기억속 DMZ의 밤은 시끄러운 소음으로 남아 있습니다. 33년 전 대학 2학년때 교련 훈련의 일환으로 받은  전방입소 교육 당시 기억 때문입니다.

전두환 정권은 학생들을 예비병력화 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등학교부터 군사교육인 '교련'을 정규과목으로 가르쳤는가 하면 대학교에서도 이 같은 군사교육이 이어졌습니다.

또 이러한 군사교육의 일환으로 1학년때는 문무대 입소 2학년 때는 전방입소를 실시했습니다. 그에 대한 대가도 상당했습니다. 2학년 동안 교련과목을 이수하면 3개월 복무단축의 혜택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김포 애기봉 오르는 길에 세워진 해병대의 구호가 인상적 입니다.
 김포 애기봉 오르는 길에 세워진 해병대의 구호가 인상적 입니다.
ⓒ 추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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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부대 입소는 1983년 5월경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최전방인 철원에 위치한 6사단으로 입소한 후 사나흘간 FEBA(Forward Edge of the Battle Area, 전투지역전단) 지역에서 훈련을 한 후 GOP(일반전초)에 투입된 것은 목요일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현역 사병 2명 그리고 입소한 대학생 2명이 1조가 되어 경계근무에 투입되었습니다. 이날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다름 아닌 밤새 이어졌던 남북간의 치열한 선전방송이었습니다.

수킬로 앞 북쪽에서는 "위대한 김일성 수령 동지...."라는 대남선전 방송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이에 맞서 남쪽에서는 대북방송으로 당시 유행하던 노래를 틀고 있었습니다.

양쪽의 선전방송은 산에 부딪힌 후 메아리치면서 1980년대 남북 간 날카롭게 대치하는 시대상황을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남북 간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선전방송은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멈추었습니다. 북쪽이 대남선전방송을 멈추는가 했더니 남쪽에서도 틀어대던 노래를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동틀 녘까지 이어지는 것은 적막함 그 자체였습니다. 소음이 컸던 것에 반비례해 고요함은 더 짙게 느껴졌습니다. 남북 간 선전방송 소음을 대신한 것은 이름모를 산새의 울음소리였습니다. 여기에 새벽 안개속에 드러나던 기나긴 철책선의 모습은 3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 기억속 깊숙하게 들어박혀 있습니다.

애기봉 표지석 입니다.
 애기봉 표지석 입니다.
ⓒ 추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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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을 이어져 오던 대남 대북 선전방송은 노무현 정권 당시인 지난 2004년 6월 장성급 군사회담에서 심리전을 중단하기로 합의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지난해 8월 비무장지대 목함 지뢰 사건을 계기로 남북 간 대남 대북 선전 방송이 재개되었습니다. 북핵 실험 등 남북간 갈등이 높아질수록 정부는 대북선전 방송 출력을 높이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대남 대북 방송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궁금해 하던 중 기회가 생겼습니다. 남북간 갈등이라는 독특한 사례를 관광상품으로 만들고 있는 'DMZ관광'이 'DMZ 방문을 포함하는 안보 투어 프로그램'을 상품으로 개발했습니다. 언론사기자들을 상대로 하는 팸투어 프로그램에 김포 애기봉 방문이 있다고 해서 주저 없이 신청을 했던 것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대북제재의 가장 큰 수단인 양 내세웠던 대북 방송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고 또 이에 맞서 북한쪽 대남방송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더해 한강하구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중국어선 단속을 먼 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습니다.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 촬영장소를 알리는 동판 입니다.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 촬영장소를 알리는 동판 입니다.
ⓒ 추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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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남 대북 방송 그리고 북핵 실험 이후 DMZ의 모습은 어떨지를 궁금해 하면서 공덕역에서 모인 후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민통선을 지나면서 해병대 병사의 인원점검후 버스는 좁은 길을 구불구불 지나더니 얼마 안 되어 애기봉에 도착했습니다.

애기봉은 성탄 트리 점등과 함께 남북 갈등의 한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이날 찾은 애기봉에서 제가 머리속에 그리던 그런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애기봉 전망대는 새롭게 건물을 짓는다는 이유 때문인지 낡고 쇠락한 모습이었습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멀어진 남북간 관계를 상징이라도 하듯 애기봉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북녘 땅은 운무에 가리워져 흐릿한 모습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애기봉에서 바라본 남북의 산하는 그저 조용하고 평화로운 모습 뿐이었습니다.

마주보이는 개풍군 하조강리 북녘 들판 또한 그지없이 평화롭게만 비쳤습니다. 망원경으로 바라본 북녁땅에는 마을 주민 세 명이 논에 물을 대기 위해서인지 수문 비슷한 것을 둘러싸고 뭔가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애기봉에서 바라다 보이는 북녘땅 입니다. 개풍군 하조강리라고 했습니다.
 애기봉에서 바라다 보이는 북녘땅 입니다. 개풍군 하조강리라고 했습니다.
ⓒ 추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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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인 지난 2008년 개성관광을 다녀온 적 있는데 당시와 비교해 북녘의 산들이 많이 푸르러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8년전 북한은 산의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면서 나무다운 나무를 볼 수 없고 60년대 우리네 산처럼 벌거숭이였던데 비해 지금은 제법 짙푸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기봉 전망대에 상주하고 있다는 해설사에게 대북방송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물어보니 현재 대북 방송용 확성기는 강화도 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기대했던 중국어선 단속 현장과도 이 곳은 멀었습니다. 강화도까지 보이기는 하는 것 같은데 애기봉 앞 조강(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강화도에 이르는 강)에서부터 눈에 들어오는 범위까지 그 어떤 배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애기봉에서 바라본 한강 하류 쪽 모습입니다.
 애기봉에서 바라본 한강 하류 쪽 모습입니다.
ⓒ 추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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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실험으로 남북 간 갈등이 높아지고 있다지만 이곳에서는 그 어떤 변화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평화 그 자체였습니다. 애기봉을 내려오는 길에 길가에 핀 참나리가 그 자태를 뽐내고 있는 가운데 호랑나비 한 마리가 꽃을 탐하고 있었습니다.

참나리 꽃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참나리 꽃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 추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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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이 오니 참나리 꽃은 피고 호랑나비는 또 그 꽃을 찾아 새로운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거미줄에 꽃잎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거미줄에 매달린 꽃 잎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거미줄에 매달린 꽃 잎이 인상적이었습니다.
ⓒ 추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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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가지만 또 새로운 세월이 다가오듯 대자연의 순리에 있어 남북 간 갈등은 티끌도 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수십 년이 흐른 후 제 건강이 허락해 또 다시 이 곳을 찾게 된다면 그때의 모습이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 남북은 통일이 되어 있을지 아니면 더욱 첨예하게 갈등이 깊어졌을지 말입니다.

무심하게 지저대는 산새 소리에 2016년 6월 어느날 애기봉의 평화는 그렇게 지켜지고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애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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