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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는 인권이 아니다'고 말하는 사람들

역사를 나서기도 전에 엄청난 소음이 들려왔다. 소리의 근원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2번 출구 너머 덕수궁에서 커다란 마이크 앰프 소리와 함성,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2번 출구와 3번 출구의 교차로에는 '동성애는 인권이 아닙니다'라고 쓰인 펼침막을 든 사람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었고 그 옆에서는 둘러앉아 통성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도 보였다. 시청역 2번 출구 분위기는 월드컵 거리 응원전을 방불케 했다.

출구를 반쯤 가로막은 펼침막을 지나 2번 출구로 나서려는데 파란 조끼를 입은 청년이 사람들을 돌려세웠다. 출구 앞이 번잡해서 나가도 돌아 들어오게 될 테니 3번 출구로 나가라는 것이었다.

등 뒤에 '동성애 퀴어 축제 반대 국민대회'라는 문구가 새긴 그 청년은 집회 참가자와 일반 시민들을 엄격히 구분해서 통제하지도 않았다. 과연 2번 출구 앞은 집회 참가자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앉아서 버스 정류장에조차 접근할 수 없었다.

다른 스태프에게 출구 앞을 통제할 수 없느냐고 물었지만 난처한 표정만 지었다. 그는 그저 교회를 따라 봉사하러 온 청년일 뿐 상황을 통제할 권한은 없다고 말했다. 시민들의 항의를 받은 역무원이 2번 출구로 나서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승객들이 나설 수 있게 출구 앞만이라도 비워둘 수 없느냐고 묻자 '역사 밖의 일이라 권한이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오히려 역무원들도 승객들을 3번 출구로 유도하는 데 합류했다. 시청역 곳곳에서 불거진 혼란은 네댓 명의 역무원으로 손써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동성애 퀴어 축제 반대 국민대회'가 열리는 덕수궁 앞에 도달하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다. '2016 퀴어 문화 축제' 반대 문구가 적힌 펼침막과 그보다 더 많은 태극기가 눈에 띄었다.

무대 위에서도 선글라스를 끼고 정장 위에 야광 안전조끼를 입은 남자들이 열정적으로 태극기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보라색 팔찌를 찬 여성 시민 두 명이 무대를 배경으로 환하게 웃으며 '셀카'를 찍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동성애 퀴어 축제 반대 국민대회' 장소 근처에서는 서울 광장 조례 개정을 위한 서명이 한창이었다.
 '동성애 퀴어 축제 반대 국민대회' 장소 근처에서는 서울 광장 조례 개정을 위한 서명이 한창이었다.
ⓒ 이택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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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입구와 돌담길 쪽으로 향하는 길은 무대에 완전히 가로막혀 있었다. 음향 영상 장비가 자리 잡아 한층 좁아진 길을 힘겹게 거슬러 오르고 있는데 누군가 '서울광장 조례개정을 위한 서명'을 부탁했다. '동성애자'들에게 광장을 내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특정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들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그들이 택한 것은 역설적으로 광장에 모이는 것이었다.

광장 사용 조건이 '허가제'로 변경되면 광장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누구일까.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광장 취지라면 공존을 인내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은 광장에 설 자격이 있는 것 아닐까.

잡념의 와중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인파를 뚫고 가까스로 무대 뒤편 덕수궁 입구에 도착했는데 문화재청 직원들이 나와서 접근 목적을 물었다. 집회 참가자들이 입구를 가로막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시청역 킨코스 처마에서 비를 피했다. 그런데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 있던 한 중년 남성이 '2016 퀴어 문화 축제'가 열리는 서울 광장 쪽을 바라보며 시원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래. 저것들 다 씻겨 내려가라."

그는 덕수궁과 서울 광장의 '시합'이 '우천 취소'로 끝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퀴어 문화 축제에 나타난 록스타

퀴어문화축제포스터
 퀴어문화축제포스터
ⓒ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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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치고 도착한 서울 광장은 경찰의 삼엄한 경비 아래 있었다. 경찰 바리케이드가 '2016 퀴어 문화 축제' 현장을 둘러치고 있었는데 덕수궁과 마주보는 횡단보도 앞만 열려 있었다.

입장 티켓이 없는 축제 특성상 드나듦은 자유로웠지만 간간히 경찰들이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이것저것을 묻는 모습이 보였다. 경찰에게 물었더니 초대장을 확인 중이라고 대답했다. 확인하는 대상은 대개 노인들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샌 노인이 경찰들에게 입구에서 저지당하고는 "경찰이 못된 놈들을 보호한다"고 언성을 높이는 모습이 보였다. 축제 스태프가 초대장을 보여 달라고 하자 경찰에게 달려와 막무가내로 휴대전화를 내미는 노인도 보였다. 광장 안까지 들어와 있던 한 노인은 축제 스태프와 실랑이가 붙어 한참 소리를 지르다가 나가기도 했다. 그는 서울광장에서 덕수궁 방향으로는 바로 건너지 못하게 통제하는 경찰을 뿌리치고 덕수궁 쪽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과연 노인들에게만 보낸 초대장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축제 장소로 들어서는데 덕수궁 앞 스피커 소리가 울타리 너머까지 따라와 서울 광장에 쩌렁쩌렁 울렸다. 축제 무대에도 커다란 공중 스피커에서 빠르고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맞은편에서 흘러나온 소리를 잦아들게 할 만큼 크지는 않았다. 보통의 축제 공간이 잠시 현실을 잊기 위해 조성되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축제의 열기를 가라앉히기에 충분한 소음이었다.

그러나 서울 광장에 선 사람들은 태연히 축제를 즐겼다. 중앙 무대 앞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공연 팀을 향해 환호를 보냈고, 울타리를 따라 설치된 수많은 부스 앞으로도 사람들이 북적였다. 성소수자 단체만이 아니라 진보 정당, 청년 단체, 기업, 언론 등이 부스를 열어 축제 참가자들을 맞이했다. 특히 유성 기업 노동자 고 한광호씨의 시민 분향소 옆으로는 퀴어 문화 축제를 지지하는 기독교 단체들의 부스가 나란히 서 있었다.

길 건너편 기독교 단체들을 떠올리며 부스에 다가서는 순간이었다. 시청역 5번 출구 쪽 경찰 울타리 너머에서 가슴팍에 '주 예수'라고 적은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기독교 단체들 부스 쪽을 내려다보며 확성기로 이런저런 말들을 건네고 있었다. 처음에는 축제참가자들도 마주 목소리를 높였다. 경찰 바리케이드에 기대어 언성을 높이고 욕을 하는 모습이 언론에서 자주 본 '시위대' 모습과 같았다.

그러나 곧 바리케이드 안쪽에서 변화가 생겼다. 6색 깃발이나 자신이 속한 단체의 깃발들이 울타리 앞에 속속 세워졌다. 한 참가자는 남자를 직접 상대하는 대신 울타리 너머에게 행인들에게 전단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축제참가자들은 곧 여유를 되찾았다. 남자가 말을 이어갈 때마다 욕설 대신 환호를 지르거나 박수를 쳤다. 사람들이 모여들수록 환호가 커졌는데  그 모습이 록스타와 관객들 같았다.

노출이 심한 옷이나 성기 모양의 장식을 겉으로 내단 옷을 입은 사람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무대 위의 공연 팀들의 의상도 일상복보다는 노출이 더 했다. '퀴어 축제' 라고 하면 언론에서 흔히 접하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자로서의 성'을 표출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정체성을 '드러냈고' 거기에 타인의 허락이 필요 없을 뿐이었다.

Love conquers hate

퀴어 문화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퍼레이드
 퀴어 문화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퍼레이드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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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 30분 퍼레이드가 시작됐다. 쪽문으로 먼저 나가 퍼레이드를 기다렸다. 반동성애 단체들이 퍼레이드를 에워싸고 모여들었다. 바리케이드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둘러싸고 쏟아지는 적의 공성전을 보는 기분이었다. 거리로 나간 퍼레이드 참가자들이 더 큰 적의를 마주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됐다. 그러나 퍼레이드 참가자들은 적군 사이를 헤집는 절망적인 패잔병들이라기보다 강바닥을 긁고 바다로 나가는 강과 같았다.

퍼레이드 참가자들은 물처럼 웃고 즐기며 서울 시내를 흘렀다. 반동성애 단체 회원들이 야유를 보내도 흔들리지 않았다. 특히 머리 하얗게 샌 노인이 마치 청년 같은 열정으로 행렬을 뒤따르며 성경 구절을 말할 때는 더 크게 웃고 환호를 보내며 'Love conquers hate(사랑은 증오를 이긴다)'를 몸으로 입증하고 있었다. 그들은 강물에 대고 외치는 고함과 욕설이 그저 강물에 씻겨 내려갈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행렬이 명동으로 꺾어 들어갈 때쯤 섞여들었다. 차로 가득한 주말의 도로를 웃으며 걷는 기분이 그 무엇보다 자유로웠다. 한 편으로는 '성 소수자들에게 이 자유는 오늘 하루로 끝'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은 제한된 자유나마 누릴 수 있는 광장과, 모든 야유를 씻어 내리는 퍼레이드에 몸을 맡기고 있지만 내일은 다를 것이다. 오히려 노골적인 야유와 혐오가 쏟아졌던 덕수궁 앞 풍경이 현실과 가까울 것이다. 버스 한 대가 이유도 없이 커다랗게 경적을 울리며 지나갔다.

퍼레이드가 끝나고 서울 광장을 떠나며 처음 마주한 것은 '동성애조장, 에이즈확산, 세금폭탄'이라는 문구였다. 문구가 적힌 펼침막을 들고 있는 것은 초등학교 고학년에 갓 접어든 것 같은 아이들이었다. 그날 찍은 모든 사진이 그러했듯 아이들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펼침막으로 얼굴을 가리는 아이가 '아는 것'이라고는 얼굴을 가려야겠다는 사실뿐이었다. 옆을 지나던 한 여성이 '아이들에게 이런 걸 들게 할 수 있느냐'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성소수자들은 서울 광장에서 벗어나면 곧 '정상인'들의 행렬 속으로 흔적도 없이 스며들 것이었다. 펼침막을 들고 있던 아이들과 아이들에게 그걸 들려준 사람도, 분노해 허공에다 소리를 지르던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서로 혐오하고 혐오를 피해 정체를 숨겨야만 하는 현실은 장애, 소득, 성별, 인종, 학력 등 모든 기준을 차별의 근거로 삼는 풍토와도 무관치 않다. 저 회색도시 아래 6가지 색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모든 소수자들의 삶이 죽은 듯이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태그:#2016 퀴어 문화 축제, #퍼레이드, #동성애 퀴어 축제 반대 국민대회, #서울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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