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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세상 모든 엄마들의 잔소리는 엇비슷했다. "당근 안 먹으면 키 안 커." "방 좀 치워라." 어릴 적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말을 그대로 따라할 때마다, 엄마들의 잔소리에도 뿌리 깊은 역사와 전통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세상이 진화할수록 엄마들이 챙겨야 할 잔소리도 조금씩 불어났다. 사이버 세상이 도래한 요즘, 새롭게 추가된 잔소리는 이랬다. "게임 좀 그만 해." "스마트 폰 좀 그만 봐." 하루에 열댓 번도 더 앵무새처럼 떠들었다. 아무리 퍼부어도 달라질 기미가 없을 땐 비장한 각오로 최후통첩 하듯 말했다.

"엄마 말 안 듣는 아이는 우리 집 아이가 아니야! 나가!"

그림책을 펼치자 화가 난 엄마 돼지가 아기 돼지들을 향해 이렇게 호통치고 있었다. 책 테두리가 누렇게 변색된 책장 위로 하마처럼 입을 크게 벌린 채 시뻘겋게 달아오른 엄마 돼지의 얼굴이 보였다. 그 모습은 영낙없이 며칠 전 너에게 보여줬던 내 낯빛이었다. 그날 넌 악을 쓰듯이 말했다.

"이런 게 집이야? 게임도 엄마 맘대로, 공부시간도 엄마 맘대로. 도대체 내 마음대로 하는 게 뭐야? 내 친구들이 뭐라는 줄 알아? 그런 집에서 어떻게 사냐고 그래. 엄마 같은 독재자가 세상에 어디 있어? 나, 집 나갈 거야!"

일주일에 세 번 하는 게임 시간과 하루 두 시간씩 약속한 공부 시간에 넌 불만이 많았다. 학원도 다니지 않는 네가 공부 시간을 얘기할 땐 조금 멋쩍었다. 급기야 집을 나가겠다는 비장의 카드를 뽑아든 너를 향해 엄마의 으름장도 평소와는 달라져야 했다. 막상 그 말을 하는 순간 오금이 저려왔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당당해야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앞으로 남발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나가고 싶으면 그렇게 해. 집을 나갈 경우는 딱 하나야.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싶을 때. 정신적 독립은 물론 경제적 자립까지 혼자 책임지겠다는 각오가 섰다면, 그래도 괜찮아."

엄마의 단호한 어조에 네 얼굴빛은 조금씩 사위어갔다. 엄마의 가슴은 제 속도를 찾지 못했다. 집 나가겠다는 자식은 처음이어서 제대로 부모 노릇을 하는지 불안했다. 어쩌면 넌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억압받는 느낌을 항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았으면서 사사건건 제지 하는 엄마의 태도가 못마땅했으리라. 중학생이 되어서야 스마트폰을 갖게 된 아이는 전교생 중 혼자라며 울변을 토할 때도 있었다. 반 친구는 매일 게임을 하는데, 왜 우리 집에선 안 되는지 억울해 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엄마도 고민이 많았다. 내 아이만 하지 않는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친구의 말 한 마디는 부모의 말보다 강력해졌다. 요즘 같아선 청와대에 '청소년을 위한 인터넷 사용법안'을 제정하자고 탄원서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다. 글자를 배우듯 인터넷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먼저 배웠으면 좋겠다. 영화 관람에 나이제한이 있듯 인터넷 게임과 스마트 폰에 대한 기준이 마련됐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게임을 방해하는 못된 부모로 남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토라진 너의 마음 속엔 부모에 대한 반감만이 쌓여갔다. 약속한 게임 시간을 어기는 쪽은 너였는데, 그럴 때마다 터무니없이 인색한 규칙이 문제라고 짜증을 냈다. 마침내는 '독재자'라는 나쁜 꼬리표까지 받게 되었다.

집 나간 돼지들이 "우리 집이 최고야"를 외치기까지

글 그림 야규 마치코/ 옮긴이 고향옥
▲ <집 나가자 꿀꿀꿀> 겉표지 글 그림 야규 마치코/ 옮긴이 고향옥
ⓒ 우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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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가라는 엄마 돼지의 불호령에 도리어 신이 난 아기 돼지들은 분주히 짐을 챙겼다. 그때 열려진 방문 사이로, 엄마 돼지의 모습이 살짝 보였다. 아기 돼지들의 옆을 무심하게 지나치는 엄마 돼지의 발걸음이었다. 그런 엄마 돼지의 배포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만약 네가 가방에 짐을 꾸렸다면, 엄마는 어땠을까. 다행히 넌 방문을 세게 닫는 소란 밖에 피우지 않았지만. 순간 무심히 너의 말을 지나쳤더라면, 그런 후회가 날아들었다.

진짜 집을 나갈 의도였다면, 일부러 말하지는 않았을 텐데. 집을 나가고 싶을 만큼 답답한 네 마음을 읽어달라는 하소연에 괜한 못질을 해대었다. 자립이니 독립이니, 고리타분한 단어들을 동원해 이번에도 부모의 권위만 견고히 쌓아올렸나 보다.

보다 살기 좋은 다른 집을 찾기 위해 돼지 삼형제가 길을 나섰다. 이 겁 없는 아기 돼지들이 부르는 가출송의 제목을 붙이자면 "집 나가자 꿀꿀꿀"이 아닐까. 피식 웃음이 새어나오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뜨끔거렸다.

"찾으러 갈래, 다른 집을/ 좋은 엄마가 있는 집을/ 집 나가자, 꿀꿀꿀"

엄마 돼지의 잔소리에서 벗어난다면, 아기 돼지들의 세상은 핑크빛 행복일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을 어디에도 아무런 조건 없이 마음대로인 집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아기 돼지들은 다른 동물들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저마다 다른 조건들과 부딪쳤다.

토끼네 집 식사메뉴는 오로지 당근 일색이었다. 토끼네 집에서는 없었던 새로운 규칙이 악어네 집에서는 지켜졌다. 악어네 집에서는 간식을 먹은 뒤 자기 싫은 낮잠을 자야했다. 다른 집을 찾아갈 때마다 저마다 다른 조건들이 문패처럼 걸려 있었다.

할 수 없이 돼지 삼형제는 마을 공터에 이불로 집을 지었다. 날이 저물었다. 이불집 앞으로 엄마 쥐와 아기 쥐들이 지나갔다. 꼬마 돼지들은 문득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그때 밥 먹자는 엄마의 부드러운 음성이 바람결에 실려 왔다. 세상 모든 갈등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마법 같은 말이 바로 "밥 먹자"가 아닐까. 어둠에 젖은 이불집을 내버려둔 채 아기 돼지들은 진짜 집으로 달려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욕조에 앉아 합창 하듯 돼지 삼형제가 말했다.

"우리 집이 최고야!"

이 경쾌하고 아름다운 하모니가 우리 집에서도 울려 퍼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협박 아닌 협박으로 겨우 너의 발걸음을 붙잡은 엄마에게 이 황홀한 감탄사는 머나먼 국경에서나 들릴 법한 말이었다. 무작정 길 위로 내쫓은 엄마 돼지의 통 큰 지혜가 부러울 따름이었다.

더욱 부러운 건 아기 돼지들이 마음껏 활보했던 마을의 여럿 이웃집이었다. 그런 이웃집이 있다면 당장 아이들을 집밖으로 내몰아도 좋을 듯 했다. 그 이웃집 덕분에 아기 돼지들은 세상엔 지켜야할 나름의 질서와 규칙이 있음을 깨우쳤다.

토끼네 집 아줌마와 악어네 집 아저씨가 들려줬던 이야기는 엄마 돼지의 잔소리와는 사뭇 달랐다. 화난 엄마 돼지와는 달리 이웃집 어른들은 아기 돼지들의 질문에 친절하게 답해줬다. 다른 집 아이한테는 되는 것이 정작 자기 자식한테는 왜 안 되는지, 참으로 요상한 일이었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밀착된 감정이 오히려 대화의 걸림돌이 될 때가 많았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의 속담은 요즘 같은 세상에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부모 외엔 딱히 다른 어른을 만날 기회조차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편리해진 신세대 주거문화의 가장 큰 부작용은 '이웃과의 단절'이었다. 집안의 울타리가 견고해질수록 아이들의 시야는 점점 좁아질 뿐이었다. 어쩌면 비좁은 집안에서 즐길 유희 거리로는 게임과 스마트폰이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이해하는 진짜 이유들은 집 밖 너머에 있다. 집을 뛰쳐나간 아기 돼지들이 "우리 집이 최고"라는 만고의 진리를 알게 된 것처럼. 눈으로 확인하고 직접 부딪쳐보지 않으면 그 어떤 진실도 내 것이 될 수 없다. 그런 아이들 곁을 바라봐줄 마을 어른들이 있다면, 집 밖 세상이 훨씬 믿음직스러울 텐데.

"집 나가자 꿀꿀꿀" 입을 모아 노래했던 아기 돼지들의 명랑한 재잘거림이 굳게 잠긴 현관문 사이로 들려오는 듯 했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집을 나가겠다고 설쳐대는 아들 녀석 때문에 문득 집 밖 세상이 궁금해지는 하루였다.

덧붙이는 글 | <집 나가자 꿀꿀꿀> 글 ․ 그림 야규 마치코 / 옮긴이 고향옥 / 웅진닷컴/ 값 8500원



집 나가자 꿀꿀꿀

야규 마치코 지음, 웅진주니어(1999)


태그:#사춘기, #그림책 편지, #집 나가자 꿀꿀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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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혼자를 핑계로 혼자만이 늘릴 수 있는 힘에 대해 모른척 합니다. -이병률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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