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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9월 1일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 치밀하게 집권을 준비해오던 전두환은 1980년 5월 광주의 참혹한 학살 이후 대통령에 취임한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한 장면
 1980년 9월 1일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 치밀하게 집권을 준비해오던 전두환은 1980년 5월 광주의 참혹한 학살 이후 대통령에 취임한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한 장면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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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울의 봄'이 한창인 1980년 4월에 군에 입대했다. 육군 논산훈련소에서 전반기 육군 기본교육을 마치고 후반기교육(중화기)을 받을 때 광주에서 '사태'가 터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광주에서 고교를 졸업한 나는 가족과 친구들 안부가 걱정되어 며칠간 기간병 내무반 불침번을 자원했다. 기간병 내무반에 가야 신문-방송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본 '폭도'라는 시커먼 동판활자와 불타는 광주MBC 건물 영상이 잔상으로 남아 있다.

후반기 교육을 마칠 즈음 훈련소에서는 전라도 출신 훈련병들에게 강제로 '위문편지'를 쓰게 했다. 그때만 해도 연말이면 여학생들이 '국군장병 아저씨'에게 위문편지를 쓰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거꾸로 군인더러 고향의 가족-친지에게 위문편지를 쓰라는 것이었다. 편지의 처음과 끝(인사말)은 자유롭게 썼지만 본문은 내용이 정해져 있었다. 오래되어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골자는 '폭도들이 폭동을 일으켰으니 동요하지 말고 생업에 전념하라'고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강제 위문편지는 1인당 10통이 할당되었다. 당시 공무원인 부친은 광주시에 근무하느라 고향(전남 곡성)과 광주에서 두 집 살림을 했다. 나는 광주에 있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차마 보낼 수가 없어 부모님과 형제들 앞으로 쓴 똑같은 편지를 각각 두 집으로 보내는 방식으로 할당량을 채웠다. 강제로 편지를 쓰게 해놓고선 우표값조차 이등병 월급에서 깠던 것으로 기억한다. 혼란스런 정변기였지만, 벼룩의 간을 빼먹는 파렴치한 정부였다.

아웅산 테러에서 전두환 살아오자 울분 터뜨린 후배

자대에 배치되니 고참들이 저녁마다 수송반 차고지로 집합시켰다. 한 고참은 집합시킨 열에서 '전라도 출신으로 대학 다니다 입대한 신병'은 따로 '일보(一步) 앞으로'를 시켰다. 그 고참은 주먹으로 가슴팍의 명치를 때리면서 린치를 가했다. 사유는 한 가지였다. "데모한 놈들 때문에 비상이 걸려 휴가를 못 간 것"에 대한 분풀이였다. 고졸인 그 고참은 '전라도 출신 대학 재학생=데모 학생'이라는 고정관념이 박힌 단순한 사람이었다. 졸병으로 내려갈수록 매타작의 횟수가 배가되는 이른바 '줄빳다'라는 것도 처음 맞아봤다.

이듬해 전두환 정권이 출범할 무렵, 한 일이라곤 편지를 쓴 것뿐인 내게도 12.12와 5.18 당시 복무한 군인들에게 주어진 '국난극복기장'이라는 것이 주어졌다. 검문소에 근무할 때는 수배중인 박관현(5.18 당시 전남대 학생회장)과 마주치면 잡아야 할지, 모른 체할지를 고민했으나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럭저럭 군생활을 마치고 83년에 복학했다. 학원자율화 조치(1983. 12. 21)가 시행되기 전이었다. 그때만 해도 캠퍼스는 '짭새 천지'였다(학원자율화 조치 이후 1984년 2월 말이 되어서야 대학 내에 상주해 있던 경찰력이 철수하고 제적생들이 학교로 돌아왔다).

학내에서는 몇 사람만 모여도 짭새들이 해산시키거나 연행해가던 엄혹한 시절이었다. 대학에 복학하니 광주-전남 출신 재학생들이 호남향우회라는 이름으로 5.18 추모제를 지냈다. 모든 옥외집회가 금지되었지만 5.18 추모제만큼은 유일하게 허용된 학내집회였다. 나도 이날만큼은 추모제를 마치고 예비군복을 입고 짱돌을 던지며 시위에 참여했다.

그해 10월 대학도서관 화장실에서 우연히 광주 후배를 만났다. 그 후배는 화장실에서 나를 보더니 "버마 아웅산에서 폭탄이 터졌는데 전두환만 살았다"는 '비보'를 전하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안타까움과 울분을 터뜨렸다(당시 공식수행원과 수행 보도진 17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 시절 5.18을 겪은 광주 출신 운동권의 정서는 그랬다. 만약 그때 이 후배의 바람대로 테러가 '성공'해 전두환 대통령까지 아웅산 묘소에서 목숨을 잃는 상황이 벌어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나는 당시 복학생이었기 때문에 비상소집에 대한 불안감과 군사적 긴장감은 느꼈지만, 보복과 응전으로 인한 전면전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전두환은 서둘러 귀국하자마자 "명백한 북한의 도발이며, 반드시 단호히 응징할 것"이라는 성명을 내고,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비상국무회의와 국정자문회의를 열었다.

전두환, 무력보복 계획 장군들 말리고 김일성 특사 만나

미얀마 아웅산국립묘지. 1983년 10월 9일 북한이 전두환 당시 대통령과 수행단을 겨냥해 폭탄테러를 자행한 이후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됐던 아웅산국립묘지(정식명칭 순난자묘)가 지난 6월 1일부터 일반에 공개됐다. 북한의 폭탄테러로 당시 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기자 등 수행단 17명과 미얀마인 7명이 사망하고 50명이 부상당했다. 이후 그동안 미얀마 독립 영웅인 아웅산 장군 서거일인 7월 19일 '순난자의 날'을 맞아 가끔 일반인에게 개방을 했지만, 보안 문제 등의 이유로 개방을 하지 않았다. 사진은 지난 6월 20일 오후 방문했을 때 모습.
 미얀마 아웅산국립묘지. 1983년 10월 9일 북한이 전두환 당시 대통령과 수행단을 겨냥해 폭탄테러를 자행한 이후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됐던 아웅산국립묘지(정식명칭 순난자묘)가 지난 6월 1일부터 일반에 공개됐다. 북한의 폭탄테러로 당시 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기자 등 수행단 17명과 미얀마인 7명이 사망하고 50명이 부상당했다. 이후 그동안 미얀마 독립 영웅인 아웅산 장군 서거일인 7월 19일 '순난자의 날'을 맞아 가끔 일반인에게 개방을 했지만, 보안 문제 등의 이유로 개방을 하지 않았다. 사진은 지난 6월 20일 오후 방문했을 때 모습.
ⓒ 유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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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연구위원(성균관대 국가경영전략연구소)에 따르면, 당시 군부에서는 '이것은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전면전을 벌이든지 최소한 우리도 암살단을 보내 김일성을 처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비등했다. 또한 휴전선에 접한 육군 1군단과 6군단은 병사들을 완전무장시키고 북진할 준비를 마쳤으며, 육사 12기 중심의 장교집단이 특수부대 30명을 평양에 투하해 주석궁을 폭파한다는 '벌초계획'이라는 김일성 암살 작전을 세우고 모의훈련까지 마친 뒤에 대통령의 승인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은 무력 보복 계획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당하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반발에 그는 직접 전방 부대를 찾아다니며 지휘관들을 설득 내지 위협했다고 한다. '내 명령 없이 한 사람이라도 움직였다간 반역으로 간주하겠다.' 그리고 10월13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100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희생자 장례식을 치르고, 20일에는 대통령 특별담화에서 '이것이 우리의 평화 의지와 동족애가 인내할 수 있는 최후의 인내이며, 다시 도발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응징할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사실상 무력 보복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대내외에 밝힌 것이다." (함규진, 1910~2010년 가상역사 '만약에' : 아웅산 테러가 '성공'했다면, 한겨레21, 2010. 5. 6)

전두환은 2년 뒤에 85년 9월 자신을 죽이려 했던 김일성의 특사를 비밀리에 면담했다. 박철언 당시 안기부장 특보가 허담 노동당 비서의 서울 비밀방문 및 회담을 주선했다. 장세동 안기부장과 박철언 특보는 그해 10월 평양 주석궁을 답방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두 차례의 특사 접촉을 가졌지만 더 이상의 진전이 없자, 북한은 이듬해 1월 팀스피리트 훈련을 핑계로 모든 남북회담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전두환이 자신을 폭사시키려 한 김일성과, 특사를 중간에 두고 간접 대화를 나눈 사실은 한참 뒤에 밝혀졌다.

남북대화가 끊기고 1년여 뒤인 87년 11월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해 아랍에미리트 수도 아부다비에 기착한 뒤 방콕을 향해 가던 KAL 858편 보잉 707기가 버마 근해 상공에서 폭발해 탑승객 전원(115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안기부 수사 결과, "88서울올림픽 참가신청 방해를 위해 대한항공 여객기를 폭파하라"는 김정일의 친필 공작지령을 받은 북한 공작원 김승일-김현희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희생자는 대부분 중동 노동자였다. 북한은 '남조선 당국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했으나 김현희의 자백과 수많은 증거는 북한을 가리켰다. 미국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88년 1월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12월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노태우는 이듬해 7월 남북동포간의 상호교류 및 해외동포의 자유로운 남북왕래를 위한 문호 개방, 남북간의 소모적인 경쟁-대결외교 지양 및 남북대표간의 상호협력, 북한과 한국 우방과의 관계 개선 및 사회주의 국가와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상호협조 등 6개항의 대북정책을 담은 7.7선언을 발표했다. 7.7선언은 이후 남북고위급회담을 통한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과 소련-중국 등 사회주의권과의 수교 등 북방정책 추진의 시발점이 되었다.

테러로 고립된 북한, '고난의 행군' 거치며 핵을 통한 생존 모색

테러지원국으로 등재된 북한은 91년 9월 남한과 함께 유엔회원국이 되었지만 동구권이 몰락한 가운데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었다. 북한은 1950년 한국전쟁 때부터 적성국교역법의 제재를 받아왔다. 테러지원국으로 등재된 이후로는 미국 수출관리규정의 교역통제물품목록(Commerce Control List)에 근거해 군수품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 전용될 수 있는 민수용 물자의 수출도 엄격히 제한되었다. 한-미 민간 지원으로 설립된 남북한 합작 사립대학인 평양과학기술대의 경우, CCL 규정에 묶여 컴퓨터 반입이 금지되어 개교에 어려움을 겪다가 테러지원국 해제 이후 2010년에 개교할 수 있었다.

미국이 국제사회와의 교역 통로를 막는 적성국교역법 대상국은 북한과 쿠바 두 나라뿐이었다. 북한은 2008년 11월 테러지원국 해제와 함께 적성국교역법 대상국에서 해제되었다. 2015년 쿠바가 마지막으로 대상국에서 해제됨으로써 미국의 법적인 적성국은 지구상에 없다. 현재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된 국가는 이란과 수단, 시리아 등 3개국이다. 그러나 북한은 2008년까지 무려 20년 동안 미국이 주도한 교역봉쇄와 국제제재를 받았다. 그 기간은 잇따른 가뭄으로 식량난과 경제 파탄에 직면한 북한이 내부적으로 작동한 '고난의 행군'(1995~1999) 및 핵개발 역사와 중첩된다.

앞에서 썼지만, 돌이켜보면 군복무 3년을 포함해 대학에 다닌 7년의 대부분은 전두환 집권 7년과 겹친다. 나의 청년기를 지배한 폭압적 독재자였던 전두환도 분단 관리라는 대통령의 소임을 위해서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김일성과 대화한 '대인배'였다. 그 뒤를 이은 노태우도 박철언을 밀사로 보내 민간인 115명을 살상한 테러의 공작 지령을 내린 김정일과 대화했다. 전두환-노태우는 군인 출신이기에 전쟁의 참화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라마 '응팔'이 나의 80년대를 소환했기 때문일까? 나도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지만, 박근혜의 '역주행'을 보면서 새삼 전두환-노태우 시절이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북핵 20년과 박근혜의 '역주행' 2편으로 이어집니다)



태그:#북핵, #아웅산, #전두환, #노태우, #테러지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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