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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 정도의 설 연휴가 지나고, 난 다시 야자실(야간자율학습실)로 등교했다. 연휴 동안 왕복 열두 시간인 시골에 다녀오느라 공부도 제대로 못 했는데, 푹 쉰 것도 아니다. 불편하고 찜찜하다.

여덟시 반, 벌써 난방이 켜져 있다. 조급해진 마음을 붙들고 빨리 책상 앞에 앉아 책을 펴고, 친구들 모두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노트북을 꺼내 인강을 듣는다. 불안한 마음 진정시키는 데는 최고다. 신기하다. 내가 공부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안정이 되는, 아주 이상한 학년이 되었다.

하지만 앉은 지 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영 집중이 되지 않는다. 설날 잠깐씩 본 티비 때문일까. 보고 싶은 영화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카페인 듬뿍 든 커피를 한 모금 삼킨다. 이래서 쉬면 안 돼.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집중 못하는 나도, 설날도, 영화도 모두 원망스럽기만 하다.

정신차리고 다시 공부를 시작한다. 밤 열시가 되고, 야자실을 나갔다. 친구랑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 도중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피식 웃으며 "야 나 방금 뇌진탕 걸릴 뻔 했어" 하니 친구 하는 말.

"야, 조심해. 우리 뇌진탕 걸리면 안돼. 고3이잖아."

12년 동안 외운 답, 대입 전형 앞에서는 무용지물

201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시험장.
 201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시험장.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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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고3 생활을 견디다 보면 주변 사람들과 마찰이 잦아진다. 엄마아빠는 당연하고,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도 말썽이다. 서로 예민해진 상태라 사소한 문제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실제로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친다. 괜찮다며 위로해 주는 노래 가사에 울컥해 밤새 콧물을 훌쩍이고, 익명 게시판에 누군가 써준 힘내라는 내용 몇 줄에 위안을 받기도 한다.

평소에 의지하던 곳과는 전혀 다른 데에서 속내를 드러낸다. 나를 모르기에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 사람, 내가 울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 자꾸만 약해지는 모습을 보이기 일쑤다. 답답한 마음에 주변 사람을 붙잡고 하소연 해보지만, 어른들은 '지금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수능 끝나고 생각하자'라고만 말한다. 그리고는 그건 힘든 게 아니라는 핀잔을 덧붙이기도 한다.

진짜일까? 진짜 수능만 끝나면 모든 일들이 깔끔하게 정리될까? 일년 간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느라 망친 몸 상태, 생활 습관들.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은 탓에 불어버린 살, 악화된 인간관계. 일년간의 수험 생활을 끝내면 이 모든 게 정말 마법처럼 해결되어 있을까.

'찐한' 커피를 마시고, 공부하지 않는 자신을 끊임없이 자책하며 성적표 앞에선 죄인이 된다. 흔한 우리나라 고3의 모습이다. 십이년 동안 정해진 답을 외우면서 공부했는데 대입 직전엔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남들과 다른 창의력이 요구된다.

아이러니하다. 한 번도 우리들의 생각을 정답으로 인정해 준 적 없으면서. 너무하다. 남이 정해준 대답에 맞춰서 살기 바쁜 우리들에게는 논술, 면접은 너무 힘든 일이다. 경쟁률도 너무나 높고, 하다보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또 누군가 만들어준 모범답안을 공부한다.

다들 이러다보니 꿈을 잃기 쉽다. 내가 뭣 때문에 바늘구멍보다 좁은 이 대입의 길로 뛰어들어왔는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게다가 간간이 들려오는 청년 실업, 문과 채용률 0% 등 무서운 말들이 우릴 더욱 움츠러들게 한다.

보통 검사, 변호사, 기자 같이 사회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큰 목표를 가진 친구들이 문과에 많이 있는데, 꿈을 짓밟기 딱 좋은 멘트들이다. 이러면서 우린 점점 꿈을 잃어간다. 꿈을 잃었는데, 행복할 리 없다. 어렸을 때는 분명히 하루빨리 꿈을 정하라고 했으면서 막상 정해놓고 나니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뉴스나 인터넷에서 '한국 학생들 행복지수 꼴찌'라는 기사가 나오면 왠지 반갑다. 하나라도 더 찾게 되고, 보게 된다. 아니 그게 왜 반가워? 하겠지만, 어차피 우리 힘든 건 똑같고 이 일상이 변하지 않은 것도 맞고. 누군가 빨리 자료로 이 사실을 입증해줬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얼른 알아 달라고. 우리 이렇게 힘들다고 말이다.


태그:#고삼, #교육,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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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진 곳을 왜곡 없이 비추고, 가려진 세상을 섬세하게 묘사하겠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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