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경북 영천에서 하양, 대구를 지나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금호강의 풍경. <징비록>에는 용궁현감 우복룡이 이 강가에서 하양 의병 수백 명을 죽이고는 적을 참살했다고 보고하여 안동부사로 크게 승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북 영천에서 하양, 대구를 지나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금호강의 풍경. <징비록>에는 용궁현감 우복룡이 이 강가에서 하양 의병 수백 명을 죽이고는 적을 참살했다고 보고하여 안동부사로 크게 승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경북 예천) 용궁현감 우복룡이 고을 군대를 거느리고 가던 중 (경북) 영천 길가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그때 하양 (의병) 군사 수백 명이 그 앞을 지나게 되었다. 군사들은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지나갔다. 우복룡이 괘씸히 여겨 "너희들은 반란군이로구나" 하고 꾸짖었다.  

하양 군사들은 (권응수 방어사에 가라는 박진) 병사의 공문을 내보였다. 하지만 우복룡은 자기 군사를 시켜 그들을 포위한 다음 모두 쳐죽여 시체가 들에 가득했다. 그러나 (김수) 순찰사는 도리어 우복룡에게 공이 있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그래서 우복룡은) 정희적을 대신하여 안동 부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하양 군사들의 가족인 고아, 과부들은 (조정에서 내려온) 사신을 만나기만 하면 말머리를 가로막고 울면서 원통한 사정을 호소했다. 그러나 우복룡은 이미 이름이 높던 터라 아무도 그들을 위해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우복룡 사건을 기록으로 전하는 진원지는 <징비록>

이 사건은 조경남(1570∼1641)의 <난중잡록>과 신경(1613∼1653)의 <재조번방지>에도 전하지만, 특히 유성룡(1542∼1607)의 <징비록>에 실려 있다. 문화재청 누리집은 <징비록>을 두고 '임진왜란 이전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의 구원병 파견 및 제해권의 장악에 대한 전황 등이 가장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소개한다. 국보 132호의 영광이 <징비록>에 안겨진 근거를 짐작하게 해주는 해설이다. 

되풀이해서 말하면, 유성룡은 <징비록>을 통해 '임진왜란 이전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의 구원병 파견, 제해권의 장악에 대한 전황 등'을 다른 임진왜란 관련 서책이나 문서들보다 '가장 정확하게 기록'했다. 즉, 해설문만으로는 우복룡 기사가 '등'에 포함되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 문화재청의 해설이 '우복룡' 기사와 같은 <징비록>의 사례들까지도 '가장 정확하게 기록'된 것으로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못 된다는 말이다.

문화재청은 <징비록>이 저술된 시기를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유성룡이 조정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지낼 때'로 보고 있다. 1598년에 고향 안동으로 돌아온 유성룡은 1607년 타계했다. <징비록>은 빠르면 1598년부터 집필이 시작되었고, 늦으면 1607년에 완성되었을 것이다.

안동의 유성룡 유적으로, 보물 414호인 충효당의 마루(왼쪽)와 사적 260호인 병산서원의 만대루
 안동의 유성룡 유적으로, 보물 414호인 충효당의 마루(왼쪽)와 사적 260호인 병산서원의 만대루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어떤 이가 '나라의 기강도 없고 지배층의 책임감도 없는 사례'로 우복룡의 의병 대량 학살 사건을 거론했더니 '우복룡의 자손 된다는 이가 일방적인 매도라고 반박하는 편지'를 보내왔다는 글을 발표했다. 필자는 그 글에서 '임진왜란 당시 좌의정, 영의정, 사도 도체찰사(四道 都體察使, 4개 도의 군사 일을 모두 지휘하는 직책)란 중책을 맡았던 이가 쓴 기록이요, 그 친필 필사본이 국보 제 132호로 지정되어 있는 책에서 인용한 것인데 그것이 일방적인 왜곡이라니 대꾸할 말이 없었다'라고 토로했다.

글을 꼼꼼하게 읽을 줄 모르면 이 글의 필자가 말하는 '일방적인 왜곡'의 참뜻을 오해하게 된다. 필자는, 임진왜란 당시 최고위급 권력자였던 사람이 쓴 국보 책의 내용은 모두가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징비록>에서 우복룡의 예를 인용한 자체를 '일방적인 왜곡'으로 매도해서는 옳지 않다고 항변하고 있다.

서로 다른 두 기록


비변사가 아뢰기를, "용궁현감(龍宮縣監) 우복룡은 여러 고을이 무너질 때 유일하게 자기 고을을 지켰을 뿐 아니라 나가서 싸우기까지 하였으니 그 공로가 적지 않습니다. 특별히 중한 가자(加資)를 주어 다른 사람들을 권장시키소서" 하니, 상(임금)이 따랐다. - <선조실록> 1592년(선조 25) 5월 15일

사간원이 아뢰기를, "성천부사(成川府使) 우복룡은 전일 용궁현감으로 있으면서 임진년 변란 때에 죄없는 사람을 많이 죽여 죄악이 가득 차고 원망이 쌓였는데 형벌을 면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관작을 보존하고 있어서 남방 사람들이 통탄해 하지 않는 이가 없고 심지어 전기를 지어 그 죄악을 드러내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다시 목민관으로 삼을 수 없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상이)  체직(파면)시키라고 답하였다. - <광해군일기> 1612년(광해군 4) 2월 12일

의병 수백 명을 반란군으로 몰아 죽였다?

문제는, 그 필자가 '사람은 장단점이 있고 공과가 있게 마련이니 우복룡에게도 필시 공적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중요한 것은 왜군이 해상으로 쳐들어 온 직후에 우리 군사 다수를 (우복룡이) 살상했다는 기막힌 사실'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점이다.

또 <경산 시지>(1997년)에도 '수백 명에 이르는 하양 의용군은 이름 없이 사라지고 오랜 세월 동안 하양 향민의 입으로만 전해져 왔다, 다만 임진왜란의 위기를 구한 공신 유성룡의 <징비록>에 하양 의군의 원통한 죽음이 적혀 있어 하양 향민의 구전을 사실로 뒷받침하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둘 다 <징비록>에 근거하여 우복룡 사건을 '사실'로 단정하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하양 의군 위령비
 하양 의군 위령비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과연 우복룡의 의병 대학살은 역사적 진실일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이는 결코 그냥 넘어가서 안 될 일이다. 아무리 흘러간 일이라 하더라도 정확하게 진상을 규명하여 억울한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해 주어야 한다. 그날 금호강변에서 죽은 군사들이 정말 반란군들이라면 우복룡을 국사에 복권시켜 주어야 마땅하고, 만약 의병들이라면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후손들의 마음을 다독여 주어야 한다.

'임진(壬辰) 하양(河陽) 의군(義軍) 위령비(慰靈碑)',  이름만 보아도 1592년 4월 30일 죽은 하양 의병 수백 명을 기리는 추모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경산 시지>에 '1974년 12월 30일 하양 읍민이 주동하여 구성된 하양충렬표창사업회(河陽忠烈表彰社業會)가 하양읍 사무소 구내에 (이 비를) 건립'했다고 기술되어 있고, 경산시와 경산문화원이 1996년 공동 간행한 <경산문화유적 총람>에도 '1974년 12월 30일 하양읍민이 주동하여 구성된 하양충렬표창사업회에 의하여 하양읍 사무소 경내에 건립'되었다고 나온다.

그런데 경산문화원이 2001년 펴낸 <경산의 문화유적 기문(記文)>에는 '용궁현감 우복룡이 하양군을 반군으로 몰아 포위하여 모두 죽이고 허위 전과 보고를 하여 안동부사로 승진하는 원통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이후에도 무고한 죽음에 대한 설원이 이루어지지 않음에 400여 년 전 원통한 고혼을 달래고자 1975년 2월 하양충열포창(褒彰)사업회에서 하양공원(하양읍 금락1리 개나리아파트 B동 뒷산) 내에 위령비를 세웠다'라고 적혀 있다. 건립 주체의 이름과 건립 연월일만이 아니라, 건립 장소까지 다르다.

위령비의 위치는 하양읍 사무소가 아니라 개나리아파트 뒤

출간처를 살펴볼 때, 1996년의 <경산문화유적 총람>과 2001년의 <경산의 문화유적 기문> 발간에 모두 관계되는 곳이 경산문화원이다. 이는 상식적으로 2001년의 기록이 맞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런 판단을 믿고 '아낙고개길 21'에 있는 개나리아파트를 찾아간다.

개나리아파트 주변의 도로명이 '아낙고개 길'이다. 아낙고개라는 지명이 특이하다. 경산시립박물관 누리집의 '경산문화대사전'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남정네들은 모두 군에 가고 여자들만 모여 살았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생겼다. 하양의군위령비는 바로 그 아낙고개에 세워졌다.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싸움터로 간 남정네들이 살아서 걸어올라야 할 그 고개가 죽은 영혼들을 위로하는 영원한 이별의 하늘길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양읍 금락1리 개나리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B동 뒤 울타리 쪽으로 가면 텃밭으로 올라가는 작은 샛문이 나 있다. 이 샛문에서 오른쪽의 5m가량 위에 하양의군위령비가 가시덤불과 잡목 속에 처연하게 서 있다.
 하양읍 금락1리 개나리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B동 뒤 울타리 쪽으로 가면 텃밭으로 올라가는 작은 샛문이 나 있다. 이 샛문에서 오른쪽의 5m가량 위에 하양의군위령비가 가시덤불과 잡목 속에 처연하게 서 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하양의군위령비는 찾아온 이에게 슬픔과 당혹감을 안겨 준다. (위의 사진이 잘 보여주는 것처럼) 빗돌은 온통 가시덤불과 잡목에 뒤엉킨 채 버려져 있다. 우복룡의 의병 대학살 사건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이럴 수는 없다. 점점 임진왜란의 참상이 잊혀져 가는 것만 해도 너무나 슬픈 현상인데, 출세욕으로 가득한 가짜 관료에게 어처구니없이 학살된 의병들에 대한 후대인들의 추모마저도 이렇게 푸대접받아야 하는 것일까. 당혹스러운 일이다. 반대로, <징비록>에 나오는 우복룡 의병 대학살 기사가 사실이 아니라면? 당연히 이 비는 철거되어야 한다.

하양의군위령비에 참배한다. 날카로운 가시가 옷을 찢는다. 행여 얼굴이나 손등에 피범벅을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하면서 몸을 조심스레 움직인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머리를 맴돈다.

'하양 군사들의 가족인 고아, 과부들은 (조정에서 내려온) 사신을 만나기만 하면 말머리를 가로막고 울면서 원통한 사정을 호소'했다는데, 사건 당시 좌의정이었고, 그 후에는 영의정이었던 유성룡은 어째서 6년이나 되는 세월 동안 그 일에 대해 듣지 못했을까? 안동부사에 불과한 우복룡을, 그것도 의병 수백 명을 학살한 반역자를 왜 유성룡 등 조정 대신들은 점점 출세시켜 주었을까.

하양읍 사무소의 예전 터에 세워져 있는 '임진 창의 제공 하양 사적비(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여러 하양 선비들의 일을 기록한 비)'
 하양읍 사무소의 예전 터에 세워져 있는 '임진 창의 제공 하양 사적비(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여러 하양 선비들의 일을 기록한 비)'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왜 아무도 이 사건을 말하지 않았을까?

전국의 기라성 같은 전국의 의병장들도 이 정도 어마어마한 사건이면 어떤 경로로든 들었을 터이다. 그런데도 억울하게 죽은 수백 의병들의 고아와 아내들을 위해 '말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일까.

특히 하양의 김거, 김응룡, 박붕, 박응량, 박응성, 신해, 안천민, 장여란, 정변문, 정변함, 정변호, 진심, 최대기, 최문병, 허경윤, 허대윤, 허응길, 황경림 같은 의병장들은 어째서 침묵을 지켰을까. 우복룡에게 학살당한 수백 의병들은 곧 자신들의 동지이자 전우이고, 고향 후배들이며 친인척이 아닌가.

혹 의병장 최응담과 같은 인식 때문인가. <경산 시지>에 따르면 최응담은 '적의 화살에 부상을 당한 것이 심하여져 (중략) 병이 위독하자 (중략) 난리는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죽음의 신호가 먼저 오니 이룬 공도 없이 나라의 벼슬을 함부로 받을 수는 없다'면서 '창의(倡義, 의병) 일기와 격문 등을 불태우게 하고' 자신의 이름도 대기(大期)에서 응담(應淡)으로 고쳐 '행적을 감추려' 했다.

의병 활동의 공로로 벼슬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도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최응담도 그런 연유로 의병 학살 사건을 묻으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 자명하다. 의병장 본인은 관직을 맡지 않더라도 억울하게 죽은 의병 군사들의 한은 풀어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복룡 의병 대학살 사건은) 오랜 세월 동안 하양 향민의 입으로만 전해져 왔다'는 <경산 시지>의 표현대로라면 의병장 최동보, 의병장 최문병, 의병장 황경림도 각각 자신의 문집 <우락재실기> <성재실기> <면와실기>에 이 일을 기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1612년(광해군 4) 2월 12일 조정은 이 사건을 이유로 우복룡을 관직에서 내쫓는다. 당일 <조선왕조실록>에는 '남방(영남) 사람들이 (우복룡 사건의 발생과 조정의 처리에 대해) 통탄해 하지 않는 이가 없고 심지어 전기를 지어 그 죄악을 드러내는 경우까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째서 유성룡은 '아무도 그(죽은 의병의 가족)들을 위해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징비록>에 적었으며, 도대체 왜 의병장들은 우복룡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조정에 요구하는 일과, 문집에 남겨 '역사의 심판'을 구하는 일을 하지 않았을까?


태그:#우복룡, #임진왜란, #하양의군위령비, #유성룡, #하양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