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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도시답게 도심의 외곽은 언덕을 이루고 있다.
▲ 룩셈부르크 구도심의 동쪽 외곽. 요새 도시답게 도심의 외곽은 언덕을 이루고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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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 시티의 거리를 걷다 보면 가장 인상적인 것이 단정하면서도 반짝거릴 정도로 깨끗한 건축물들이다. 부자 나라의 수도답게 도시의 건축물들은 세련되고 옛 건물들도 잘 정비되어 말끔하게 보존되고 있다.

나는 쇼핑가가 밀집한 구도심의 대로를 벗어나 구시가 동쪽으로 조금 걸어가 보았다. 룩셈부르크를 안내하는 관광지도에는 유명 관광지가 번호로 적혀 있는데 그런 번호도 적혀 있지 않은 작은 골목길들이다. 골목으로 들어갈수록 인파도 줄어들고 결국은 호젓하게 산책할 수 있는 뒷골목이 나왔다.  

요새도시인 룩셈부르크 뒷골목답게 구도심 외곽 길은 언덕같이 경사져 있었다. 중세의 건물들 사이로 난 미로 같은 골목길들이 나의 길 찾기를 시험하고 있었다. 이 골목길들에 깊게 박힌 박석 위에는 세월의 흔적이 쌓이고 쌓여 반질반질 빛나고 있었다. 건물과 골목길은 옛 그대로인데 골목길을 걸어가는 룩셈부르크 사람들은 무척 세련됐다. 그런데 골목길과 사람들이 묘하게 어울리고 있었다. 아기자기한 옛길의 역사가 지금까지 그대로 룩셈부르크 현대인들의 삶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룩셈부르크의 옛 어시장, 피쉬 마르트

옛 건축물들을 정비하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다.
▲ 옛 어시장 뒷골목. 옛 건축물들을 정비하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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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찾아가는 곳은 룩셈부르크의 옛 어시장, 피쉬 마르트(Fёsch mart)가 있던 작은 골목길이다. 지도를 보면서 찾아도 도로 이름이 나와 있지 않아서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그 위치를 직접 물어보았던 곳이다.

나는 인포메이션 센터의 친절한 아주머니가 박력있게 박박 볼펜으로 칠해준 지도 위의 위치를 찾아 미로 찾기에 나섰다. 다녀보니 룩셈부르크의 구시가는 크지 않았다. 한번 지나친 곳도 다시 찾아가기에 부담없는 거리에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자신있게 길을 찾아나섰다.

지도에 그려진대로 대공궁전 후문 근처로 가 보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인포메이션 센터 아주머니가 표시해준 위치 근처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찾아보아도 옛 어시장의 자취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부근에서 옛 어시장 건물의 돌출 창문과 그 유명한 글귀가 보여야 하는데 도무지 나타나지 않았다. 사진으로 보면 돌출 창문이 독특하여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말이다.

평소에 외국에서 길 찾기에 나름 자신이 있었던 나를 자존심 상하게 하는 미로찾기였다. 나는 그리 멀지 않은 인포메이션 센터에 다시 가서 물어볼까하다가 관뒀다. 거기에 찾아가는 시간에 다시 한 번 찾아보기로 했다.  

물고기 조각 위에 식당 이름과 사람이 재미있게 조각되어 있다.
▲ 옛 어시장의 식당 간판. 물고기 조각 위에 식당 이름과 사람이 재미있게 조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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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당의 셰프가 마치 춤을 추듯이 흥겨워하고 있다.
▲ 레스토랑 간판. 식당의 셰프가 마치 춤을 추듯이 흥겨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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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 지도의 구도심 거리는 지도를 보며 상상했던 것에 비해 너무 작았기 때문에 계속 헷갈리는 것 같았다. 나는 주변을 왔다 갔다 하다가 대공궁전 동쪽 블록을 샅샅이 찾아보기로 했다. 자세히 보니 주변에 물고기가 그려진 간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벽에 대롱대롱 걸려 있는 철제 간판들의 예쁜 만화 같은 조각들이 시선을 확 잡아끈다. 가게 간판들만 놓고 봐도 독특한 맛을 낼 것 같은 식당들이다. 오래된 식당과 간판을 그대로 보존하는 룩셈부르크인들의 삶의 자세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나는 물고기가 그려진 옛 아치형 석축이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곳에는 로마시대 목욕탕에 남아있는 것 같은 타일형 모자이크가 벽에 붙어있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분명한 룩셈부르크 어시장의 흔적이었다.

생선 중에는 문어도 있고 오징어도 있고 작은 생선, 큰 생선이 함께 그려져 있다. 중세시대 당시 어시장에서 거래되던 생선들이다. 나는 이 생선 모자이크가 걸려있는 건물 1층 안으로 더 들어가 보았다. 마치 골목같은 통로가 건물 1층을 관통하여 이어져 있었다. 1층 내부에는 작은 정방형 공간과 우물이 있고 다시 동쪽의 거리로 통로가 뚫려 있었다.  

과거 이곳에 있었던 어시장에서 어떤 생선이 거래되었는지를 알려준다.
▲ 생선 모자이크. 과거 이곳에 있었던 어시장에서 어떤 생선이 거래되었는지를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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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의 통로를 통해 밖으로 나가보았지만 아주 작은 골목길만 있고 내가 찾던 사진 속의 길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서쪽 블록으로 나가서 카메라에 찍힌 사진들을 되돌려보았다. 그런데 내가 찍은 사진 한쪽 구석에서 그렇게 찾던 돌출 창문이 허탈하게도 사진의 배경으로 찍혀 있었다. 자료로 찾아보았던 사진에서는 넓어보였던 어시장 앞길이 방금 전에 돌아왔던 바로 그 작은 골목길이었던 것이다. 작은 골목길을 찾은 작은 기쁨 속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시장 골목 주변은 오랜 건축물들을 보존하기 위한 공사가 여기저기서 진행 중이었다. 나는 카페와 레스토랑 사이에 자리 잡은 이 돌출 창문 앞에 가서 섰다. 참 멋지게 새긴 이 돌출 벽면에는 세 방향으로 창이 세 개나 나 있었다. 멋진 인테리어 장식용으로 보이는 이 창은 실은 누가 이 건물에 접근하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망을 보는 곳이었다. 건축물은 실생활의 필요에 의해서 발달한다고 하는데 외침을 살피기 위해 만들어진 이 돌출형 창문은 룩셈부르크의 건축을 또한 아름답게 발전시켰다.  

어시장의 이 건물이 나를 여기까지 끌어들인 것은 또 다른 데에 이유가 있었다. 이 돌출 창문에 중세 룩셈부르크인들이 남긴 유명한 글귀가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룩셈부르크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어시장에 남아있는 글귀에 대해 물어보았었다.

어시장 건물에 남아있는 중세 룩셈부르크인들의 글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 변함없이 유지되기를 바라고 있다.
▲ 어시장 건물의 글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 변함없이 유지되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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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시장 건물에 무슨 글이 적혀 있는데요. 무슨 뜻인가요?"
"아, 그건 '우리는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그대로 보존하기를 원한다.(Mir wӧlle bleiwe wat mir sin.)'라는 뜻이에요." 
"왜 그런 글귀를 건물 밖에 적어놓은 거죠? 무슨 사연이 있을 것 같은데..."
"짐작하시겠지만 구도심 외곽의 어시장은 서민들이 생활하던 장소였어요. 그들은 그들의 소박한 삶이 그대로 유지되고 17세기에 세워진 그들의 삶의 터전이 변함없이 유지되기를 바랐던 거죠."   
"아하, 나 이대로 살게 내버려두라는 의미군요!"

글귀의 효과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시장의 이 건축물과 글귀는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글귀 중앙에 살짝 박아놓은 룩셈부르크 대공 가문의 붉은 사자 문장(紋章)도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자신들은 가장 작은 나라에 사는 서민들이지만 외적이나 귀족들이 우리를 괴롭히지 말고 그냥 내버려둬 달라는 의미같이 보였다. 오랜 삶의 터전인 집들과 골목들을 부수지 말고 제발 보존해달라는 의미로 들렸다. 옛 건축물의 이 글귀는 프랑스와 네덜란드, 독일과 같은 강대국 사이에 끼어 살고 대공의 지배를 받으며 살던 룩셈부르크인들의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룩셈부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내부가 소박하고 엄숙하다.
▲ 성 미카엘 성당. 룩셈부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내부가 소박하고 엄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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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옛 어시장의 작은 골목길을 나와 주변 골목길에 자리한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구시가의 동쪽 블록 지역은 옛 건물들을 보수하는 공사들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역사박물관을 지나 박물관 앞거리에서 내려가는 동쪽 끝에는 성 미카엘 성당(Eglise St. Michel, Saint Michael's Church, St. Méchels kierch)이 있었다.

성당 탑의 왼쪽에 2차 세계대전 당시 생긴 동그란 포탄 자국이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전혀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2003년~2004년에 진행되었다는 보수공사 때 말끔하게 복원된 것 같다. 역사 오랜 노란 빛의 성당 입구는 건물의 크기에 비해 작은 문이었다. 미사가 없는 시간인데 다행히 작은 출입문이 열려 있어서 성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입장하면서 보니 성당에 들어올 때는 정숙을 유지하라는 문구가 있어서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파이프 오르간의 장엄한 소리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 성당의 파이프 오르간. 파이프 오르간의 장엄한 소리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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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내부는 약간 어두움이 느껴지는 곳이다. 마치 작은 도시에 있는 성당같이 소박한 모습이며 웅장한 성당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성당 내부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중후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성당 안 좌석에 앉아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들었다.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성당의 장엄함과 잘 어울렸다. 룩셈부르크를 대표하는 노트르담 성당에 비해 화려함은 덜하지만 파이프 오르간 소리 속에 엄숙함이 더 돋보이는 성당이다.

성 미카엘 성당은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같은 이름의 성 미카엘 성당보다 규모는 더 작지만 훨씬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며, 룩셈부르크에 현재 남아있는 종교시설 중 가장 오래된 곳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려시대 초기인 987년에 이미 미카엘 성당이 세워졌고 11세기에는 룩셈부르크 요새 내에서 룩셈부르크 백작을 위한 예배 성당으로 발전하였다. 이후 수백 년 동안 계속 재건된 성당은 1688년에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미카엘 천사가 악의 상징인 드래건을 힘차게 짓밟고 있다.
▲ 미카엘 천사 조각상. 미카엘 천사가 악의 상징인 드래건을 힘차게 짓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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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의 이름에 걸맞게 성당의 내부와 외부에는 미카엘 대천사의 조각상이 곳곳에 있다. 미카엘 천사는 이 성당의 수호천사이다. 출입문 옆 건물 외벽에도 성 미카엘의 석상이 있고, 성당 내부 벽면에도 드래건과 싸우는 성 미카엘 조각상이 있다. 미카엘 성당의 날개 달린 천사 미카엘은 왼손에는 방패를 들고 오른손에는 횃불같이 생긴 칼을 들고 두 다리는 드래건을 마음껏 짓밟고 있다. 성 미카엘은 악의 무리이자 성경에서 사탄으로 묘사되는 드래건에 맞서 싸우는 성당의 수호신인 것이다.

그런데 웃음이 나오는 것은 이 미카엘 천사가 마치 인형같이 묘사되어 좀 어수룩하게 보인다는 점이다. 연약해 보이는 몸통에 비해 칼을 든 오른쪽 팔뚝은 울룩불룩한 근육질인데다가 비대칭하게 보일 정도로 크다. 드래건을 누르고 있는 다리는 마치 아이의 다리처럼 작고 가늘다. 드래건은 미카엘 천사보다도 작아서 전혀 위협이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이 미카엘 조각상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고졸한 옛 문화재들을 떠올렸다. 우리나라 선인들의 문화재 같이 룩셈부르크 시민들의 고운 감성과 여유, 그리고 유머감각이 이 조각상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미카엘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한편의 현대회화를 보는 듯 화려하다.
▲ 스테인드 글라스. 미카엘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한편의 현대회화를 보는 듯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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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도 전통 가톨릭 성당의 엄숙한 분위기를 따르지 않고 있다. 스테인드 글라스 위에는 마음껏 그린 작품들이 남겨져 있다. 모자이크 같이 자유롭게 그려진 스테인드 글라스의 배경은 마치 현대 회화 같은 선의 구획 속에 있다. 그 안에는 다양한 파스텔 톤 색상들이 채워져 있고 보는 사람들이 알아보기 쉽도록 그림 속의 성인들도 간략한 필치로 그려져 있다. 이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과거 스테인드 글라스의 전통을 깨트린 파격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이 스테인드 글라스 속에도 이 성당의 수호신인 미카엘 성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찾아보았다. 역시 미카엘은 한 스테인드 글라스 오른쪽 아래에서 오른손에 칼을 높이 들고 드래건을 열심히 무찌르고 있었다.

미카엘 천사는 외침이 많은 기독교 국가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미카엘 성인은 성당을 지켜주고 그 지역을 지켜주며, 그 나라를 지키고 사탄, 마귀로 상징되는 드래건을 무찌른다. 그래서 당연히 미카엘 성당은 룩셈부르크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성당이 되었고, 가장 역사가 오랜 성당이 되었던 것이다. 주변 강대국들의 수많은 침략과 지배를 받았던 룩셈부르크인들은 수호천사인 미카엘 천사가 지금도 자신들을 보호해 주기를 바라고 있고 수많은 악의 군대와 맞서 싸워줄 것이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작고 아름다운 나라, 룩셈부르크를 수호천사인 성 미카엘이 열심히 지켜주기를 기도해 보았다. 자신들의 삶과 집들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룩셈부르크인들의 소박한 소망도 미래에도 계속 지켜지기를 기원했다.

작은 뒷골목, 시골 성당 같은 작은 성당의 정겨움이 나를 자꾸 기도하게 만들고 있었다.  룩셈부르크는 작은 것의 매력이 무엇인지를 거듭해서 알려주는 묘한 매력의 땅이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여행기 500여 편이 있습니다.



태그:#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 여행, #룩셈부르크 시티, #어시장, #미카엘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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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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