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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교육비를 놓고 '진실게임'을 벌이는 어른들의 볼썽사나운 싸움박질이 점입가경이다. 누리과정(만 3∼5세 무상 보육·교육 공통 프로그램) 예산 편성을 둘러싼 중앙 정부와 지방 교육청간의 공방은 논란만 커져가는 가운데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4조 원에 달하는 누리과정 예산을 중앙 정부는 '줬다'고 하고, 지방 교육청은 '못 받았다'고 한다. 4조 원은 도대체 어디로 갔나?

누리과정은 정책적 취지에도 불구하고 도입 초기부터 우려를 안고 있었다. 2012년 당시 이명박 정부는 만 5세 누리과정 도입 7개월 만에 3~5세로 확대 시행을 발표했다. 무상급식 반대 등 보편적 복지 확대 반대 입장을 보여왔던 여당의 입장과는 거리가 먼 결정이었다. 당연히 대선을 의식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쏟아졌다. 이어서 박근혜 후보는 0~5세 무상보육 공약을 내걸고 선거에 당선됐다. 정책 시행에 따른 재정 대책은 부실했다.

중앙 정부는 학생수가 줄어드는 추세로 본다면 현 교육교부금에서 누리과정 집행이 가능할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였다. 현재 지방 교육청의 재정 적자는 예산 대비 10%에 육박할 정도로 심각하다. 거기에 누리과정이 확대되면서 보건복지부에서 담당하던 어린이집 예산까지 지방 교육청이 맡게 됐다. 한마디로 살림살이도 힘든 마당에 지출 항목만 늘어난 셈이다.

헬조선에서 복지 축소하는 정부

누리과정 예산을 둘러싼 중앙 정부와 지방 교육청의 '공방전'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일 뿐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현상을 관통하는 '맥락'이다. 박근혜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기초노령연금 20만 원 지급 공약을 파기해 공분을 샀다. 지방자치단체의 유사 중복 사회보장사업을 정비한다는 명분으로 지자체에서 자율적으로 시행해오던 복지 사업의 25.4%를 전면 금지시켰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사회경제적 위기가 증폭되고 있는 마당에 이 정부의 복지 정책은 축소, 파행이라는 내리막으로 치닫고 있다.

복지 파행과 축소의 피해는 고스란히 해당 복지의 수요자들인 국민에게 돌아간다. 이것은 개별 정책 시행에 따른 효과를 따지는 수준을 넘어서는 복지 철학에 관한 문제다. 누리과정만 보더라도 그렇다. '저출산'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공 보육을 확대해 마음 놓고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국공립 보육시설 확대를 통한 공공 보육의 기반 강화와 무상급식, 무상교육, 아동수당과 같은 복지 정책의 획기적인 개선이 필요하다. 박근혜 정부의 0~5세 무상교육은 결국 파행을 빚고 있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괜찮은 정책이었다.

복지 정책은 개인과 가정에 맡겨진 '돌봄'을 국가와 사회가 책임지는 방식, 즉 '공공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반대로 복지를 사적 영역에 계속 묶어두려고 한다면 필연적으로 '돌봄 불평등'이 확대된다. 특히 '금수저, 흙수저'와 같이 계층간 격차가 확대되고 부가 세습되는 불평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복지의 공공성은 포기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다.

돌봄이 사적 영영에서 개인의 책임으로 환원되면 돌봄 서비스는 개인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능력에 따른 선택의 문제가 된다. 이제 아이 돌봄의 질은 전적으로 부모의 경제력에 좌우된다. 어떤 아이는 고가의 사설유치원에 가겠지만, 어떤 아이는 교육은 커녕 방임의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 이 매커니즘을 지배하는 것은 공공성이 아니라 시장 논리다. 누리과정 파행에 따른 무상 보육 정책의 후퇴는 복지의 계층 간 격차를 확대하고 돌봄 불평등을 확산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를 거스른다.

돌봄은 왜 '민주주의'의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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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봄 민주주의> 표지 .
ⓒ 아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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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 결핍'과 '민주주의 결핍'은 강한 상관성을 갖는다. 미국의 정치학자 조안 C. 트론토는 저서 <돌봄 민주주의>에서 "돌봄이 공적 영역이 아닌 사적 영역에 국한되어 다루어진다면 심각한 반민주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105쪽) 했다. 사적 영역에 맡겨진 돌봄은 철저히 개인의 선택이 된다.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적 사회관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개인적 선택은 자유, 평등, 정의로운 결과로 귀결되지 않는다.

저자가 보기에 차별과 배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돌봄의 책임을 민주주의의 중요한 과제로 인식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함께 돌봄'이 가능하도록 하는 정치적 조건, 즉 공적 영역에서의 평등한 돌봄 서비스가 제공되어야 한다.

저자는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데서 더 나아가 돌봄 노동의 측면에서도 민주성이 확보되어야 한다고 본다. 돌봄이 개인적, 사적영역으로 매몰될수록 돌봄 노동은 저평가되거나 여성의 노동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강하다. 또한 인종적, 민족적, 계급적 위계 속에서 돌봄 노동이 특정 부류의 저임금 노동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저자는 같은 맥락에서 남성이 여성에 비해 돌봄의 의무를 지지 않는 것도 돌봄의 '무임승차권'이라는 표현에 빗대어 비판한다. 이렇게 돌봄이 수행되는 양상은 구조적으로 계층간 불평등을 고착화시키는 데 기여한다. 이러한 시각은 돌봄 노동에 대한 여성주의적 접근이면서, 돌봄 노동의 위상 재정립을 위한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데 도움을 준다.

돌봄의 성격 상 '함께 돌봄'은 정치로 풀어야만 할 필요가 있는 정치적 관심사다. 저자는 "돌봄과 자유를 위해 모든 사람이 평등한 가능성을 갖는 돌봄 제도를 통해 인간의 상호 의존성을 가장 잘 조직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은 광범위하고 다양한 합의와 이견의 민주적 과정을 필요로 한다"(109쪽)고 했다.

"세상을 바꾸는 방법은 존재한다. 돌봄을 위한 충분한 자원을 제공하고 우리의 돌봄 책임을 재검토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자신과 타인을 돌보는 데 다시 한번 동참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뢰의 수준을 높일 수 있으며 불평등의 정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며 모든 이를 위한 진정한 자유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332쪽)

저자는 "정의란 공공선을 위한 지속적인 돌봄"이라고 했다. 돌봄 민주주의 확립은 계층간 격차가 확대되고 복지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한국 사회가 갖추어야 할 필수적 조건이다. 돌봄 서비스가 필요한 곳에 국가가 응당 복지 정책을 제공함은 물론, 사회 전반적으로 돌봄 노동에 대한 위상 정립도 중요한 과제다. 지금처럼 정부가 공공 복지의 발목을 잡고 돌봄을 사유화하고 불평등의 확산을 막지 못한다면 민주주의의 민주적 발전도 어려울 수 밖에 없다.

덧붙이는 글 | <돌봄 민주주의> (조안 C. 트론토 지음 / 아포리아 펴냄 / 2014.4.)

이 기사는 이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yes24.com/xfile340)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돌봄 민주주의 - 시장, 평등, 정의

조안 C. 트론토 지음, 김희강.나상원 옮김, 아포리아(2014)


태그:#누리과정, #돌봄 민주주의, #공공복지, #보육대란, #무상보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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