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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대선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2002년 11월 13일, 한국의 언론은 여의도를 주목했습니다. 국회에 주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농민운동, 아니 한국 전쟁 이후 최대 규모로 열린 30만 농민대투쟁에 주목한 것입니다.

농민과 노동자, 학생, 시민 등 참가 인원 13만 명, 전국 각지에서 대절해 타고 온 버스만도 3000대에 가까웠습니다.

그렇지만 농민들의 분노는 3000대의 버스로도 다 감당되지 않았습니다. 광주에서는 500명이 넘는 농민들이 차가 부족해 올라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결국 전세버스를 타지 못한 농민들은 대중교통까지 이용해 가면서 여의도 한강 고수부지에 모였습니다.

대선 직전에 이루어진 대회인 만큼 대선후보들도 행사장을 찾았습니다. 당시 한나라당 후보였던 이회창 후보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 국민통합21의 정몽준 후보가 참석해 농업을 지키겠다고 앞다투어 연설했습니다. 이 때 노무현 후보가 날아온 계란에 맞은 유명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절박함이 농민을 움직이다

10만 명이 넘는 농민들이 여의도를 찾은 것은 농업의 상황이 너무나 절박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농민들은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식량주권은 나몰라라하는 한국 정부는 농민들의 생존권을 제대로 보장해주지 않았습니다. 운이 나빠 많이 생산되는 작물을 심으면 제 값을 받지 못해 그 해 농사는 포기한 셈 쳐버리고, 우연히 가격이 괜찮은 작물을 심으면 가격이 올라간다고 외국에서 농산물을 수입해 역시 제값을 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나마 정부에서 수매를 통해 가격을 보장해 주었던 쌀마저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조금씩이나마 오르고 있던 쌀 수매가가 2001년 10% 가까이 하락한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보루마저 위협받고 있었던 셈입니다.

특히 2003년 한-칠레 FTA와 2004년 WTO 재협상을 앞두고 농민들은 더 큰 우려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칠레 FTA는 한국 과수 농가에 적잖은 피해를 예고하고 있었으며 WTO 재협상은 쌀개방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에 위태로운 한국 농업에 치명타를 안길 수 있다는 우려를 던져주었습니다.

이런 절박함이 농민들을 움직였습니다. 농업이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농민들의 목소리를 전달하지 않는다면 농업은 무너질 것이라는 위기감이 10만이 넘는 농민들을 움직인 것입니다.

다른 시야, 굳은 의지

30만 농민대투쟁을 제안한 것은 여주군 농민회였습니다. 여주군 농민회는 비교적 부농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렇지만 다가올 한-칠레 FTA와 WTO 재협상을 그냥 두고 보면 미래가 없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조직력을 총동원해 농민의 힘을 보여주고 정치력을 가질 수 있는 행사를 치러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전체 농민의 10%를 모아보자는 제안을 했고 이것이 '30만 농민대투쟁'이라는 사업으로 된 것입니다.

그때까지 전국농민대회의 규모는 약 2만 명 정도, 30만 명을 모으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시야와 준비자세로 대회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2002년 1월 17일 첫 제안이 이루어지고 3월 12일 전국의장단 회장단 연수, 3월 19일 전국 간부 활동가 토론회를 거치면서 30만 대투쟁의 내용이 다듬어지고, 4월 24일 9기 1차 임시중앙위원회에서 최종 계획이 결정이 되었습니다.

30만 농민대항쟁의 가장 주요한 수단은 마을 간담회와 이장단 조직화였다고 합니다. 이전처럼 몇 명의 농민회 회원을 만나는 것으로는 30만 대투쟁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마을 전체를 움직여야 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겁니다.

각 시·군 농민회는 면이장단협의회와 군협의회에 적극 결합하여 이장단 설득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워낙 절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10월 31일 WTO 쌀수입개방반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저지 전국이장단 기자회견 및 11월 13일 30만 농민대항쟁 투쟁선포식에 100명의 이장들이 참석하고 6,800명의 이장선언을 이루어 내는 큰 성과를 만들었습니다.

여름부터는 마을 간담회도 많이 진행했다고 합니다. 농민회의 면지회간부들이 일반 농민을 직접 만나고, '30만 농민대투쟁'을 해설하는 사업을 진행하면서 성과를 냈습니다. 지역별로 강사단을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전 마을순회교육을 성사했습니다.

이장이 움직이고 농민을 직접 만나자 마을 전체가 움직였습니다. 30만 대투쟁을 제안했던 여주군의 경우 11월 13일 4000명의 농민이 대회에 참가했다고 합니다. 2002년 여주군의 농가 인구가 약 3만 3천명 정도였다고 하니 여주군에 있는 농민 중 10% 이상이 대회에 참가한 것입니다.

이 땅의 주인으로, 정치의 주인으로

이 투쟁이 처음부터 성사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없었습니다. 2002년 1월 17일 첫 제안에서도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대로는 물러설 수 없다는 결기와 목숨 걸고 한판 큰 싸움을 벌여보자는 결의, 그리고 대중에 대한 신뢰가 결국 30만 대투쟁을 성공적으로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박훈식 전농 20주년기념사업회 편찬위원회 사무국장은 2011년 한국농정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30만 대투쟁의 결과 직접 농민을 만나가면서 명맥만 유지하던 농민회 분회, 지회가 다시 살아나고 농민회 조직도 단단해졌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 때 얻은 자신감으로 FTA투쟁, WTO투쟁, DDA(도하개발아젠다)투쟁도 해나갔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농민대투쟁을 주도했던 전국농민회총연맹이 민주노동당을 지지하여 정치세력화 하는 것까지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2004년과 2008년, 농민 국회의원도 탄생할 수 있었고 지역에서 농민 군의원, 시의원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30만 대투쟁의 결과 항상 피해를 받고 수세적이었던 농민들이 이 땅의 주인으로 정치의 주인으로 나서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2015년 현재, 민중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정부는 민중들의 삶을 보듬어주기는커녕 역사마저 과거로 돌리며 친일, 친미, 독재미화, 반북 이데올로기 공세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임에도 제대로 된 야당은 보이지 않고 민중들은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미래를 개척했던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민중들이었습니다. 2002년 농민들이 30만 대투쟁을 통해 이 땅의 주인으로, 정치의 주인으로 나서려고 했던 것처럼 2015년 11월 우리들도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민권연대 홈페이지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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