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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 그림들
 인상주의 그림들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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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전후 빈 예술을 보고 우리는 인상주의와 표현주의 그림을 보러 옆방으로 간다. 먼저 인상주의 그림을 살펴본다. 이곳에는 앞에 언급한 알마 말러의 아버지 에밀 야콥 쉰들러의 풍경화 '도나우강변 카이저뮐렌의 증기선 선착장'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인상파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밀레(Jean-Francois Millet)의 '쟁기와 써레가 있는 샤이의 들판'이 있다. 이들은 인상주의라기보다는 사실주의에 가깝다. 느낌보다는 대상 또는 현실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인상주의하면 우리는 이들보다는 마네(Édouard Manet), 모네(Claude Monet),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 피사로(Camille Jacob Pissarro)를 떠올린다. 이들은 예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예술가의 주체성을 보여준다. 그들은 빛의 변화에 따른 대상의 변화를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이들은 또한 아카데미 중심의 기존의 화단에 반기를 들고, 화랑에 자기들만의 전시회를 열어 대중으로부터 평가받는 방식을 취했다.

이들 인상주의 화가를 통해 풍경화, 정물화, 인물화 등이 그림의 주류로 올라설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는 인상주의 그림 중 유명한 것은 별로 눈에 띄질 않는다. 그것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프랑스 사람이고, 또 유명한 그림이 대부분 파리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네 하면 수련 연작을 떠올린다. 르누아르 하면 통통하고 풍만한 여인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피사로 하면 풍경화를 떠올린다. 이곳의 인상주의 그림은 인물화가 많은 편이다.

고흐와 뭉크 그리고 쉴레도 만나고

고흐의 '오베르의 들판'
 고흐의 '오베르의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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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의 눈길은 오히려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와 뭉크(Edvard Jacob Munch: 1863-1944)에게 간다. 이들은 후기 인상주의 또는 청년양식에 속하는 화가다. 고흐는 자화상, 해바라기, 밀밭 그림으로 유명하다. 이곳에 있는 고흐의 그림은 1890년에 그린 '오베르의 들판'이다. 오베르는 파리 북서쪽 30㎞에 있는 조용한 시골 마을이다. 고흐는 오베르에서 1890년 5월부터 7월 29일 자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70일간 머물렀다.

그리고 70점의 그림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베르에서의 그림은 주로 들판이다. 그것은 조용한 들판에서 평안함을 찾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였다. 이때의 그림을 지배하는 색은 푸른색과 녹색이다. 이곳 벨베데레 미술관에 있는 '오베르의 들판'도 마음이 편안하다. 그러나 뒤로 가면서 고흐의 그림에 광기가 나타난다. '천둥 치는 밀밭', '까마귀가 나는 밀밭'에서 노란색과 검은색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삶에 대한 두려움과 예술적 격정을 그렇게 표현하다 세상을 떠났다.

뭉크의 '화가 헤르만과 의사 콘타르트'
 뭉크의 '화가 헤르만과 의사 콘타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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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는 우리에게 '절규(der Schrei)'로 잘 알려진 화가다. 절규는 표현주의를 앞서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작품은 1897년에 그린 '화가 헤르만과 의사 콘타르트'다. 고흐의 인물화와 마찬가지로 윤곽으로 부분을 강조하고, 세부적인 묘사는 생략했다. 화가 헤르만은 갈색 톤이고, 의사 콘타르트는 검은색 톤이다. 그 때문에 두 인물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이곳에 작품이 있는 표현주의 작가로는 페크슈타인(Max Pechstein),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야브렌스키(Alexej von Jawlensky) 등이 있다. 그러나 내 눈에 들어오는 그림은 게르스틀(Richard Gerstl: 1883-1908)이 그린 '파이 자매(Schwestern Fey, 1905)'다. 흰옷을 입은 두 여인이 나란히 앉아있는데, 뭔가 섬뜩한 느낌이 든다. 게르스틀은 철학과 음악에 관심이 많아 구스타프 말러, 아르놀트 쇤베르크 등 음악가와 교류했으나 쇤베르크 아내와의 염문으로 1908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에곤 쉴레의 작품들
 에곤 쉴레의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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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주의에 속하는 에곤 쉴레(Egon Schiele: 1890-1918)의 작품도 이곳에 상당히 많은 편이다. 그리고 유명한 작품도 여럿 있다. '포옹'(1917), '죽음과 소녀'(1915), '두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1915-17), '가족'(1918), '에디트 쉴레'(1918)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그림은 인물을 육감적으로 표현했다. 육체의 경우 음영과 색을 통해 근육을 강조했다. 그리고 색도 채도가 높은 원색을 사용했다.

쉴레의 그림은 내용적으로 죽음, 사랑과 불안이라는 주제를 보여준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그림이 어둡고 불안하다. 그리고 형식적인 면에서 선과 면 그리고 색에 새로운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 때문에 쉴레의 그림을 보면 누구나 그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 쉴레의 그림은 빈의 벨베데레 미술관, 레오폴트 미술관에 가장 많고, 고향인 툴른 미술관 과 어머니의 고향인 체스키 크룸로프 아트 센터에도 있다. 

바로크 시대 조각가 메써슈미트의 고통과 고뇌

메써슈미트의 두상들
 메써슈미트의 두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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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보고 나서 나는 메써슈미트(Franz Xaver Messerschmidt: 1736-1783)의 조각실로 간다. 조각실에는 1770년경 메써슈미트가 만든 두상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 두상들(Charakterköpfe)의 표정이 가관이다. 모두 찡그린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시 작가 자신의 정신이 불안하고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메써슈미트는 1760년대까지 궁정조각가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때 만들어진 작품이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 청동상이다. 그러나 1770년대 들어 세 가지 이유로 그는 프레스부르크(Pressburg: 현재 브라티슬라바)로 떠나게 된다. 그는 병이 들어 작품 활동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해 작품 주문이 감소했다. 그리고 제국 수상인 카우니츠(Kaunitz)와의 불화로 1774년 빈 미술 아카데미 교수직을 그만두어야 했다.

양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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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고독과 정신병에 시달렸다. 그리고 환각과 편집증, 고독과 두려움, 고통과 고뇌라는 인간의 내면적인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 예술을 통해 그 감정들을 외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찡그린 얼굴 연작이다. 기록에 의하면 메써슈미트는 모두 69개의 두상을 만들었고, 그 중 16점이 이곳 벨베데레 미술관에 있다.

우리는 이 중 14점을 볼 수 있다. 12점이 원형으로 창문 쪽을 향하고 있고, 2점은 창문 앞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다. 이들 작품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눈과 눈썹 그리고 입과 목이다. 이들은 사형수의 얼굴, 어릿광대의 얼굴, 새처럼 주둥이를 내민 얼굴, 흉악한 얼굴, 양의 얼굴, 두통으로 고통스러운 얼굴, 찡그린 얼굴 등을 하고 있다. 메써슈미트를 통해 예술은 아름다움의 추구가 아닌, 추함과 광기의 표현으로 변해간다.

마주 보고 있는 두 얼굴
 마주 보고 있는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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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추함과 왜곡을 예술로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크의 열정이 바로크의 쾌락을 거쳐 로코코의 퇴폐와 광기로 타락해 갔기 때문이다. 예술은 아름다움뿐 아니라 추함도 추구할 수 있다. 예술은 또한 완성만을 향해 가는 게 아니라 파괴를 지향할 수도 있다. 메써슈미트를 통해 나타나기 시작한 왜곡이,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의 광기, 낭만주의에서의 어둠,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한 연구로 이어져 예술의 지평이 넓어지는 긍정적인 역할도 하게 되었다.      

에체 호모: 이 사람을 보라

이곳 벨베데레 미술관에는 볼 것이 더 많이 있다. 표현주의 이후 나타난 신즉물주의(Neue Sachlichkeit), 1930년대 망명예술 등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유명화가나 작품은 드문 편이다. 1945년 이후 20세기 작품도 많다. 그중에는 훈더르트바써 이름 정도만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시대 예술이 있다. 여기서 동시대란 1970년 이후를 말한다.

벨베데레 미술관 남쪽에는 21세기 하우스(21er Haus)가 있다. 이것은 2001년 말까지 현대미술관으로 역할을 하다가, 2011년 11월 21세기 하우스로 문을 열었다. 이곳에는 20세기 전후 현재 미술품을 수집하고, 새로운 예술을 보여주기 위한 전시를 지속적으로 열고 있다. 21세기 하우스는 벨베데레 궁전 밖에 별도의 건물로 존재하지만, 벨베데레의 오스트리아 미술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에체 호모: 이 사람을 보라
 에체 호모: 이 사람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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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베데레 미술관 상궁 계단을 내려오면서 나는 마지막으로 하낙(Anton Hank)의 청동 조각품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를 감상한다. 1920년 전후 만들어진 작품으로 높이가 230㎝나 된다.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 예수를 연상케 한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이름은 '마지막 인간(Der letzte Mensch)'이다. 제목으로 봐서는 더 이상 예수 같은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염원을 표현한 것 같기도 하다.

벨베데레 정원에서 아쉬움을 달래다

스핑크스가 있는 정원
 스핑크스가 있는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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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을 나온 아내와 나는 벨베데레 궁전 남쪽 정원으로 간다. 정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스핑크스다. 스핑크스는 날개 달린 사자로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스핑크스의 가슴이 너무나 육감적이다. 이것은 로코코적인 예술양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 정원의 길 양쪽으로 웅크리고 앉아 있는 스핑크스는 궁전과 정원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정원이 완성된 것은 1725년이다. 정원을 만들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수로이다. 수로는 정원의 식물들이 살아가는데도 중요하고, 정원을 아름답게 하는 분수의 설치에도 꼭 필요하다. 현재 정원에는 12개의 분수가 가동되고 있다. 상궁과 하궁 사이에 놓인 정원은 표고차가 23m다. 그래서 정원이 상단, 중단, 하단의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베스트의 '비엔나의 방'
 베스트의 '비엔나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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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내는 상단 정원만 보고, 상궁을 돌아 다시 남쪽 정원으로 향한다. 궁전 옆에는 프란츠 베스트(Franz West)의 '비엔나의 방(Room in Vienna)'라는 조각품이 세워져 있다. 이 작품은 로마와 런던을 거쳐 이곳 빈에 왔으며, 2015년 4월 13일부터 10월 31일까지만 전시된다.

알루미늄을 재료로 한 세 개의 추상적인 형태로, 관객은 이 작품에 앉거나 서거나 누울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대부분의 예술이 보여주는 관객과의 거리감을 없애는 특색이 있다. 이처럼 만져보고 느껴보고 이용해 봄으로써 상호 교감하고 소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베스트에게 있어서 예술은 사용하고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이어야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2012년 세상을 떠났다.


태그:#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와 청년양식, #표현주의, #메써슈미트의 '찡그린 얼굴들', #벨베데레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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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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