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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와곳을 오가던 길에 본 지진피해 지역의 모습은 참담했다. 사진 위에 카트만두가 보인다. 그러나 바로 아래 무너진 집이 흔적은 풍경의 아름다움을 생각할 수 없이 아프다. 사진 아래  왼쪽은 또카 인근에 새로 형성된 지진피해자 마을이다.
▲ 누와곳을 오가던 길에 본 지진피해 지역 누와곳을 오가던 길에 본 지진피해 지역의 모습은 참담했다. 사진 위에 카트만두가 보인다. 그러나 바로 아래 무너진 집이 흔적은 풍경의 아름다움을 생각할 수 없이 아프다. 사진 아래 왼쪽은 또카 인근에 새로 형성된 지진피해자 마을이다.
ⓒ 김형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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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던 거리를 가로질러 가고 오는 길은 험했다. 가끔씩 무너진 집들이 여전히 지진의 상처를 잊지 말라고 두런대는 느낌도 들었다. 또카에는 오래전부터 머물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잘 정리된 지진 피해자들에 양철집들이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게 돌아온 후 조용히 하루가 갔고 다음 날에는 지난 2007년 출간한 <안나푸르나를 걷다>라는 책을 번역해서 출판하고 싶다며 내가 일하고 있는 빵공장을 찾아왔던 네팔의 한 출판사 사장이자, 서점 사장이 초대해서 네팔 시인들과 시낭송회 갖는다는 장소를 찾았다.

그곳은 나를 초대한 분의 서점이었다. 소박한 서점에서 갖는 시낭송회는 매우 특별했다. 나는 사전에 10여명이 함께 하는 작은 시낭송회라는 소식을 들어서 빵을 준비해갔다. 평소에도 시낭송회를 가진 후 간단한 간식을 먹는다고 했다. 나는 네팔이주노동자의 죽음에 대해서 쓴 시를 한국어로 읽었다. 대신 내가 읽은 시의 네팔어 번역본을 번역을 함께한 모한까르기 씨가 네팔어로도 낭송했다. 시낭송이 거의 끝나갈 무렵 인근 찌아 가게에서 찌아를 주문해 마신 후 헤어졌다. 우리네처럼 뒷풀이가 2차, 3차 이어지지 않고 그대로 시낭송회만 가진 후 곧 헤어지는 모습이 좀 어색했지만 내게는 다행스러웠다. 지친 몸을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긴 것이다.
서점에서 갖는 이색적인 시낭송회 매우 특별한 느낌이었다. 나는 한국어로 시를 낭송했다. 첫 인사이니 한국어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 작은 서점에서의 소박한 시낭송회 서점에서 갖는 이색적인 시낭송회 매우 특별한 느낌이었다. 나는 한국어로 시를 낭송했다. 첫 인사이니 한국어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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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중국 문학인들이 오는 9월 교류행사를 갖는다. 행사에 참석하는 네팔 작가들이 네팔회화작품을 준비했다. 노신재단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그들이 준비한 것은 네팔의 위대한 시인이라 불리는 럭스미 쁘라싸다 데보코타 관련 회화다.
▲ 럭스미 쁘라싸다 데보코타와 노신이 만난다. 네팔, 중국 문학인들이 오는 9월 교류행사를 갖는다. 행사에 참석하는 네팔 작가들이 네팔회화작품을 준비했다. 노신재단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그들이 준비한 것은 네팔의 위대한 시인이라 불리는 럭스미 쁘라싸다 데보코타 관련 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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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이틀간 예고된 네팔번다(총파업)다. 그래서 장거리를 찾아가기로 한 계획은 벌써 무산되었다. 오전 일찍 크리스나 쁘라싸이를 만나 네팔, 중국 문학인들이 오는 9월 교류행사를 갖는데, 행사에 참석하는 네팔 작가들이 네팔회화작품을 준비했다며 내게 사진을 찍어달고 부탁해왔다. 노신재단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그들이 준비한 것은 네팔의 위대한 시인이라 불리는 럭스미 쁘라싸다 데보코타 관련 회화다. 짧은 만남을 갖고 헤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당일의 일정은 지난번 사쿠 인근에 1, 2차 지진에 진앙지였던 신두팔촉(Sindupalchok)지진피해 이재민들에게 빵을 전하고 다시 임산부와 유아에게 의류를 전하고 오는 길에 목격한 텐트촌을 찾기로 하였다. 신두팔촉 텐트촌 관리자인 람까지 쉬레스타 씨에게 접촉루트를 알아봐달라고 연락을 취했다. 그래서 알게 된 해당 텐트촌도 모두 신두팔촉(Sindupalchok)지진피해 이재민들이었다. 하지만 람까지 쉬레스타 씨가 관리하고 있는 텐트촌과 달리 해당 텐트촌은 관리자도 없고 대표자도 따로 없어 여러 가지로 부실한 상태였다.
또 다른 신두팔촉 지진 피해자 텐트촌을 찾아 빵을 전달했다. 무작정 찾아간 해당지역에 빵을 배달하고 돌아오는 마음은 매우 홀가분했다.사진 속에 스쿠터에 상자를 든 모습은 나의 일상이 된 지 오래다.
▲ 또 다른 신두팔촉 지진 피해자 텐트촌을 찾아 또 다른 신두팔촉 지진 피해자 텐트촌을 찾아 빵을 전달했다. 무작정 찾아간 해당지역에 빵을 배달하고 돌아오는 마음은 매우 홀가분했다.사진 속에 스쿠터에 상자를 든 모습은 나의 일상이 된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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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는 이틀 전부터 수소문해서 350여명 정도의 이재민이 거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350봉지 500여개의 빵을 준비했다. 오늘은 때마침 총파업이어서 람 바하두르 타다(Ram Bahadur Thada)씨와 모함 까르기(MoHeon Karki)씨가 함께 했다. 아내와 나는 스쿠터를 타고 람 바하두르 타다와 모한 까르기 씨는 오토바이를 타고 각각 빵을 담은 박스를 안았았다. 지진 피해 이재민들이 머무는 텐트촌까지는 40여분이 걸리는 거리다. 우리는 해당장소를 찾기는 했으나 어떻게 접촉을 해야하나 고민하였다. 바로 그때 해당 텐트촌에 실태를 알려준 람 까지 수레스타 씨가 도착했다.

그러나 그도 사람들을 혼란없이 불러모을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나는 마을 당산나무처럼 커다란 나무 그늘아래 텐트촌에 아이들을 불러 모은 후 "네팔·한국문화센타" 펼침막을 펼치고 사진을 찍자고 유도했다. 잠시 후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텐트촌에 아이들과 네팔·한국문화센타 멤버들이 펼침막을 펼친 일이 주효했다. 곧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었고 순조롭게 500개의 빵 350봉지를 배달할 수 있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또 하루가 갔다. 그리고 또 다음날도 연이어지는 파업이다. 어찌 일과를 보내야하는가? 고민이 깊다. 나는 오전 시간에 네팔에서 가깝게 지내는 지인들을 찾기로 했다. 필요할 때마다 위로가 되고 격려와 관심으로 함께 한 사람들을 찾기로 한 것이다. 페북을 통해 맛난 빵 자랑 같은 일에 한국 분들에게는 어쩔 수 없지만 이곳 분들에게는 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다. 물론 연이은 총파업으로 할 일을 찾다 생각한 일이다.

결혼이주여성의 친정어머니를 찾아 빵을 전하고 전 주한네팔대사님에게도 인사를 전했다.
▲ 결혼이주여성의 친정어머니를 찾아 결혼이주여성의 친정어머니를 찾아 빵을 전하고 전 주한네팔대사님에게도 인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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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이후 인도에 갔다가 최근에 카트만두로 돌아온 한국으로 시집간 사람에 친정어머니를 찾아 빵을 전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한국에 딸과 동영상 통화도 연결해주었다. 좋아한다. 고마운 일이다. 그리고 인근에 전 주한 네팔 대사님 댁을 찾았다. 동적인 노익장을 보여주시는 꺼멀 쁘라싸다 고이랄라(Kamal Prasad Koirala)선생은 지금도 좋아요로 격려를 잊지 않으시는 고마운 어른이시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도매상점이 몰려 있는 뉴로드 인근에 가서 빵 공장에 필요한 재료를 구해왔다. 아내도 나도 휴식이 충분치 못하다. 아침 출근길에 밀린 집안 일이 많다는 아내의 푸념은 아름다운 애교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냈다. 바쁜 일상에 아내와 나의 일상이 사라져버린 것인지 생각한다. 그러나 당분간 우리의 일상이 특별히 달라질 일은 없다. 불편하기로 하면 우리가 찾아가 만나는 사람들만 할 것인가? 생각하면서 그저 묵묵히 이 일상을 충실하게 보내려 한다. 지치면 지칠수록 우리가 만나는 사람을 생각하자고 아내와 이야기를 나눈다. 그것이 우리의 다짐이 되는 날들이다.


태그:#시낭송회, #빵 배달, 신두팔촉, #노신재단, 럭스미 쁘라싸다 데보코타, #꺼멀 쁘라싸다 고이랄라, #친정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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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사람의 사막에서" 이후 세권의 시집, 2007년<히말라야,안나푸르나를 걷다>, 네팔어린이동화<무나마단의 하늘>, <길 위의 순례자>출간, 전도서출판 문화발전소대표, 격월간시와혁명발행인, 대자보편집위원 현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홈페이지sisarang.com, nekonews.com운영자, 전우크라이나 예빠토리야한글학교교사, 현재 네팔한국문화센타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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