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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2년 대선 당시 안철수 후보의 자문단에서 활동했던 고원 서울과학기술대 교수가 '신당 창당'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글을 <오마이뉴스>에 보내와 두 차례에 걸쳐 나눠 싣는다. [편집자말]
박근혜 대통령이 24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남북 고위급 접촉과 노동개혁 등 현안에 대해 발언한 뒤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24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남북 고위급 접촉과 노동개혁 등 현안에 대해 발언한 뒤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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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21세기 한국의 상황은 거의 모든 면에서 지탱하기 어려운 총체적 위기이다.

단적으로 빈곤, 출산, 비정규직, 일자리, 노동시간, 가계부채, 복지, 분배율, 자살 등에서 세계 최악의 지표들이 급격히 늘어가는 것이 그 증거이다. '헬조선', '개한민국', '지옥불반도' 등 한국사회에서 살기 힘들다는 걸 풍자하는 신조어가 청년들 사이에서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다. 더 이상 우리 사회가 출구를 찾을 기력도 포기한 채 절망사회의 밑바닥으로 추락해 가고 있음을 나타내는 현상들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시대 정치가 대면해야 하는 핵심 과제는 암울한 미래를 바꾸는 싸움이다. 갈수록 꿈과 희망을 잃어가고 있는 국민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일이다. 사회교체, 국가혁신, 대한민국재창조 외에 다른 길은 없다. 따라서 좋은 정치란 국민들이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미래를 바꾸는 대담한 도전에 나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수구적 보수패권체제의 종식

국민의 삶을 바꾸고 사회를 근본적으로 혁신하기 위해서 정치가 핵심 목표로 삼아야 하는 대상은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수구적 보수패권체제의 극복이다. 정치학자 박명림 교수는 한국의 보수세력은 조직기구로서는 방대하고 강력하지만, 정신, 역할, 능력 측면에서는 이미 너무 무능해졌다고 진단한다.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경제운영능력이 민주정부의 그것보다 결코 낫지 않으며, 종북 담론 등 낡은 이념적 자원을 동원하지 않으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없을 정도로 퇴행해 있다는 것이다. 매우 정확한 지적이다.

현재 수구 보수의 가치와 리더십으로 대한민국을 더 이상 높은 발전단계로 끌어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구적 보수패권의 핵심기반은 20세기 초반에 고착된 친일식민주의, 20세기 중반의 냉전적 반공주의와 재벌중심 개발독재,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망국적 지역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그 같은 가치와 정책을 통해 21세기 한국을 지배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고통과 위기의 근원인 것이다. 그러한 보수의 가치와 리더십은 21세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근본적으로 혁신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수구적 보수패권체제를 종식하지 않고서 한국의 미래는 없다. 이미 대중들은 보수패권으로 국가가 잘 작동하지 않고 있고, 그것을 극복하지 않고서 자신의 삶을 개선할 수 없다는 것을 광범위하게 감지하고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대중의 산발적 저항, 때로 급격한 격류가 되어 분출해 오르는 열망과 침잠을 반복하고 있는 모습들이 그것이다.

왜 야당은 지는가?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야권진영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대두한다. 보수패권의 가치는 대중의 마음속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소멸하고 있는데, 왜 야권은 대중의 변화에 대한 열망을 담아내지 못하고 그토록 무기력한가? 왜 야당은 이기지 못하는가?

지금까지 야당의 모습은 매사에 어정쩡하고 소극적이고 항상 망설이는 것이었다. 오히려 수구보수가 더 교활하고 대담했다. 지난 대선 때만 해도 그렇다. 새누리당은 노인기초연금과 가계부채탕감 같은 공약들을 구체화시켜 제시한 반면에, 야권진영은 경제민주화라는 추상적 구호밖에 없었다.

필자가 대선 직후 문재인 후보의 경제공약을 총괄한 교수에게 가계부채탕감 등에 적극 대처하지 못한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자칫 백파이어(backfire : 역화)당할 수 있는 위험한 폭탄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말이 신중이지 사실 따지고 보면 몸조심이고 적당히 넘어가려 했다는 뜻이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와 주승용 최고위원(왼쪽)이 2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와 주승용 최고위원(왼쪽)이 2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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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은 오로지 정권심판-정권교체 구호로 일관했고, 박정희-이명박-박근혜를 엮는 네거티브 선거에만 의존하여 정권 잡을 궁리나 했던 것이다. 이런 속에서는 정권교체가 자신의 삶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더 많을 수밖에 없었고, 선거 패배는 당연했다.

그런데 야당 문제의 뿌리는 단순히 정책의 방향이나 실행력 혹은 계파주의라든가 하는 것에 있지 않다. 더 중요한 근본 원인은 정치노선과 정치행태의 보수화이다. 필자가 일전에 페이스북에서 본 어느 야당실무자의 날카로운 지적을 인용해 보기로 하겠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주류, 비주류 또는 친노, 비노를 떠나서 모두 일단 당의 리더가 되면 하나같이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정서 또는 선입견을 가지고 당을 운영합니다. 그것은 '국민은 싸움을 싫어하므로 여당과의 싸움은 항상 합리성 또는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중도를 잡으려면 정책을 우클릭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나타나는 역설적 현상은 바로 골리앗인 새누리당은 무슨 건수가 생겼다 하면 목숨 걸고 싸우는데, 다윗인 새정치연합은 목숨도 걸지도 않고 적당히 타고 넘어갈 궁리만 하면서 요행만 바란다는 것입니다."

뿌리 깊은 중도주의의 극복

우리는 바로 이런 경향을 중도주의라고 부르는데, 기성야당의 한계를 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제1과제는 뿌리 깊은 중도주의의 사고를 극복하는 것이다. 현재 새정치민주연합은 친노, 비노 할 것 없이 거의 대부분 중도주의자들이다. 노무현의 좌파신자유주의, 정동영의 중도실용, 김한길·안철수의 '민생을 지향하는 새로운 노선', 문재인의 경제정당-안보정당이 모두 중도노선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중도주의란 가치노선을 모호하게 만들고, 수구적 보수의 가치노선에 대해 선명한 경쟁구도를 형성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향을 말한다. 그런 사고는 마치 이념을 초월하는 듯 보이지만 기실은 이념에 대한 또 하나의 강박증일 뿐이다.

그런데 수구적 보수진영은 중도적 유권자들을 잡기 위해 자신들의 보수적 가치를 일부러 흐릿하고 모호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들은 천박하긴 하지만 애국, 안보, 성장과 같은 자신들의 가치를 분명하게 주장하고, 진보파의 도덕적 허점을 과감히 공격한다. 그렇게 해서 성공적으로 집권을 이뤄낸다. 그런데 새정치연합은 자신들의 가치를 선명하게 내세우기는커녕 '자유시장 이념을 믿는다.' '성장친화적 분배'와 같은 언술로 양쪽의 가치를 끊임없이 희석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는 일에 몰두한다.

바로 이런 결과로 야권진영은 보수여권진영과 사회경제적 차별화를 이뤄내는 데 철저히 실패했다. 노무현 정부는 오히려 재벌중심의 성장체제를 더 강화했고, 중소기업, 소상공인에 대해서는 경쟁력 강화를 이유로 보호 장치를 제거하는 데 더 적극적이었다. 오히려 중소기업, 소상공인정책 등에서 새누리당이 야당에 비해 더 적극적인 모습으로 비쳤으며, 재벌개혁에 있어서도 김종인이라는 카드를 활용한 박근혜의 선거 마케팅이 더 부각되었다.

노인기초연금, 가계부채 등에 대해서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다. 이렇듯 사람들은 민생·경제문제에서 여야의 차이를 별로 느끼지 못한다. 바로 그 중심에 중도주의적 사고의 뿌리가 있다.

낡은 진보노선의 극복이 제2과제  

정치에서 가치와 비전 그리고 정체성을 선명하게 세우는 것은 대체로 진보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어찌됐든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양극화, 일자리, 저성장과 같은 시대적 과제들을 해결하려면 전반적으로 진보성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단지 야권-진보진영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 대선 때 새누리당이 경제민주화와 복지라는 진보의제 영역으로 넘어온 것처럼 보수진영에도 해당되는 명제이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21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합동참모본부를 방문, 청사에 들어가기 전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21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합동참모본부를 방문, 청사에 들어가기 전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새누리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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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미국의 정치상황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오바마는 집권1기보다도 집권2기에 더 강력한 진보정책의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샌더스 열풍이 불고 있다. 철저하게 중도주의적 태도를 취해오던 힐러리가 부랴부랴 노선을 바꾸고 있다. 바로 이것이 가치-비전-정체성을 논할 때 다뤄야 하는 핵심 지점인 것이다. 그런데 새정치민주연합은 "좌클릭도 우클릭도 아닌 민생제일주의가 당의 정체성"이라는 말로 본질적 가치에 대한 논쟁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진보성 강화는 기성의 진보세력 및 진보노선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중도주의의 극복이 제1과제라면 낡은 진보노선의 극복은 제2과제이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산물로서 만들어진 진보란 진보성을 거의 상실했거나 탕진해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민주화귀족, 노동귀족, 진보귀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수구적 진보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한 면도 없지 않다.

지난 통합진보당 사태, 민주노총이나 전교조의 현주소, 변질된 486정치인들의 모습은 그 같은 상황을 보여주는 지표들이다. 이들은 겉으론 과격한 구호를 내세우지만 정작 보수진영의 퇴행적 행동과 제대로 맞서 싸우지도 못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 보전하기에 급급하다. 이런 결과로 한국사회에는 '보수특권 대 진보기득권'이라는 왜곡된 정치구도가 형성되게 되었다.

'미래 대 과거'의 정치경쟁구도 창출

따라서 새로운 정치는 '보수특권 대 진보기득권'이라는 낡은 여야 대결구도를 넘어서는 것이다. 진보/보수의 X축에 혁신/수구의 Y축을 하나 더 세워 정치지형을 바라봐야 하는 이유이다. 특권과 기득권에 편입된 세력이라면 그것이 보수이든 진보이든 크게는 낡은 과거세력이고 극복의 대상으로 설정된다.

반대로 특권과 기득권을 반대하는 세력이라면 그것이 보수이든 진보이든 미래혁신세력이고 새로운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결국 현재 상황에서 혁신의 핵심 목적은 특권·기득권을 반대하고 기성 정치체제가 대표하지 못하는 민주주의 밖의 시민, 노동운동 밖의 노동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낡은 진보/보수의 대결 프레임을 극복하는 일은 가치구도의 혁신과 필연적으로 맞물린다. 과거의 가치구도는 민주 대 반민주, 노동 대 자본, 진보 대 보수였다. 그러나 그 같은 구도 속에서는 양대 진영 내부에서 진행된 일련의 사회적, 정치적 균열과 분화를 담아내기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민주-노동-진보의 전투적 구호들이 기득권화된 이익집단의 이해관계를 방어하는 논리로 전락해 버렸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도 중요한 지점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사회적, 정치적 균열을 가로지르는 가치에 입각한 정치구도의 정립이 필히 요구된다. 그것은 소통 대 불통, 공유 대 독점, 참여 대 배제의 가치구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좌우에 걸쳐 있는 모든 불합리한 특권, 기득권, 독과점, 불통의 악습을 배제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미래 대 과거'의 정치경쟁구도를 창출하는 것이다.


태그:#고원, #중도주의, #신당 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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