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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암정 앞 무등산 원효계곡 풍경. 한낮의 더위를 피해 나온 일가족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지난 4일이다.
 풍암정 앞 무등산 원효계곡 풍경. 한낮의 더위를 피해 나온 일가족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지난 4일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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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급이 없는 무등산은 광주의 정신적 지표가 됐다. 빛고을 광주의 상징이기도 하다. 풍광도 빼어나다. 입석대와 서석대가 주상절리를 이루고 있다. 규봉 등 바위도 예술품이다. 증심사, 원효사 등 불교도량도 품고 있다.

무등산의 옛길을 따라 간다. 지난 4일이다. 옛 조상들이 다니던 산길이다. 광주 산수동에서 충장사를 거쳐 전남 담양의 가사문학관을 잇는다. 산수동에서 충장사를 거쳐 원효사까지 7.7㎞가 1구간이다. 원효사에서 서석대까지 4.1㎞가 2구간이다.

3구간은 나무꾼길과 역사길로 나눠져 있다. 나무꾼길은 장원삼거리에서 4수원지를 거쳐 충장사까지 5.7㎞를 일컫는다. 역사길은 충장사에서 풍암정, 환벽당을 거쳐 가사문학관까지 5.6㎞에 이른다.

무등산 원효계곡의 풍암정으로 가는 길. 숲터널을 이뤄 무더위를 피하기에 제격이다.
 무등산 원효계곡의 풍암정으로 가는 길. 숲터널을 이뤄 무더위를 피하기에 제격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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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잣고개에 복원된 무진고성. 통일신라 때 쌓아 고려시대까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이다.
 무등산 잣고개에 복원된 무진고성. 통일신라 때 쌓아 고려시대까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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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옛길(3구간)은 산수동에서 잣고개를 넘어가면서 시작된다. 오래 전, 광주의 야경 명소였다. 지금은 야경을 볼 수 있는 높은 건물이 많아 희소가치가 그다지 없다. 잣고개는 옛사람들이 땔감을 구하러 다니던 길이다.

까치가 많이 날아들었다고 '작(鵲)고개'로도 불렸다. '잣'은 성(城)을 가리키는 우리말이다. 성을 넘어가는 고개여서 '잣고개'라는 얘기도 있다.

그 성이 무진고성이다. 통일신라 때 처음 쌓았고, 고려시대까지 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은 장원봉을 중심으로 장대봉과 제4수원지 안쪽의 산 능선을 따라 쌓았다. 남북 1000m, 동서 500m, 둘레 3500m의 타원형 산성이었다.

성의 바깥면은 돌로, 안쪽은 돌과 흙으로 섞어 채웠다. 광주의 옛 이름인 무진주(武珍州)를 붙여 '무진고성'으로 불렸다. 지금 성의 일부가 복원돼 있다.

청풍쉼터에 세워진 김삿갓 시비. 옛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잦았던 길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청풍쉼터에 세워진 김삿갓 시비. 옛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잦았던 길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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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쉼터를 찾은 한 시민이 나무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지난 4일 한낮 모습이다.
 청풍쉼터를 찾은 한 시민이 나무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지난 4일 한낮 모습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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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길은 무진고성 터를 지나 산중으로 접어든다. 무등산 원효계곡의 끄트머리에 자리잡은 충효동과 전남 담양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숲길을 따라가면 제4수원지와 청풍쉼터를 만난다. 옛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잦았던 길이다.

'무등산이 높다하되 소나무 아래 있고/적벽강이 깊다하되 모래위에 흐른다'고 읊은 삿갓 김병연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청풍쉼터에 김삿갓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쉼터에 원두막과 나무의자도 설치돼 있다. 잠시 쉬어가기에 제격이다.

무등산 자락에 들어앉은 충민사 전경. 정묘호란 때 평안도 안주성에서 싸우다 전사한 전상의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무등산 자락에 들어앉은 충민사 전경. 정묘호란 때 평안도 안주성에서 싸우다 전사한 전상의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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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민사 사당에 놓여있는 향촉대. 돈도 얼마 걷히지 않으면서 참배객들에도 부담을 준다.
 충민사 사당에 놓여있는 향촉대. 돈도 얼마 걷히지 않으면서 참배객들에도 부담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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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길은 청풍쉼터에서 충민사로 이어진다. 충민사는 전상의(1575-1627)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청나라의 30만 대군이 쳐들어온 정묘호란(1627년) 때 평안도 안주성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한때 오해를 받았던 사당이다.

충민사가 완공된 게 제5공화국 시절이던 1985년이었다. 전상의 장군이 전두환의 선조라는 소문이었다. 시민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나중에 본관이 천안과 완산으로 확인되면서 헛소문으로 밝혀졌다.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며 충민사에 들렀다. 사당에 놓인 향촉대가 뜬금없다. 영정 앞에 향을 피우고 향값을 넣으라는 함이다. 종교시설이나 개인이 운영하는 곳이 아니고, 광주시에서 관리하는 사당이기에 눈에 거슬렸다. 큰돈 들어오지 않는다는 게 관리사무소 근무자의 얘기였다. 참배하는 이의 부담을 덜어주면 더 좋겠다.

무등산 충장사 옆길. 충장공 김덕령 장군을 모신 사당을 둘러싼 길이 다소곳하다.
 무등산 충장사 옆길. 충장공 김덕령 장군을 모신 사당을 둘러싼 길이 다소곳하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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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사의 김덕령 장군 묘. 배제마을에 있던 묘를 1970년대 중반 이 자리로 옮겨왔다.
 충장사의 김덕령 장군 묘. 배제마을에 있던 묘를 1970년대 중반 이 자리로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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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민사에서 길은 충장사로 이어진다.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1567-1596) 장군의 사우다. 장군은 석저촌(현 충효동 성안마을)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의병 5000명을 모아 권율 장군의 휘하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왜란이 소강상태이던 1596년 반란군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무고로 투옥됐다. 29살의 나이로 옥사했다. 왜란 중에 정쟁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이 일로 장군의 동생(덕보)이 세상을 등지고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그곳이 원효계곡에 있는 풍암정이다. 부인 흥양이씨는 이듬해 정유재란 때 담양 추월산에서 일본군에 쫓기다가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김덕령 장군의 누명은 65년이 지난 1661년에야 밝혀졌다. 관직도 복구됐다. 숙종 때 병조판서, 정조 때는 의정부 좌찬성으로 추증됐다. '충장공'이란 시호도 이때 내려졌다. 장군이 태어난 마을에는 '충효리'란 이름이 하사됐다.

광주에는 의병장의 시호에서 비롯된 도로명이 많다. 광주의 가장 번화한 거리인 충장로는 김덕령 장군의 시호를 붙였다. 금남로는 금남공 정충신, 제봉로는 제봉 고경명, 경열로는 경열공 정지 장군의 충절을 기린 도로명이다.

김덕령 장군의 무덤에서 발굴된 목관. 충장사 유물관에 보관돼 있다.
 김덕령 장군의 무덤에서 발굴된 목관. 충장사 유물관에 보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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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 430년 된 충효마을의 버드나무 고목. ‘김덕령나무’로 불린다.
 수령 430년 된 충효마을의 버드나무 고목. ‘김덕령나무’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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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사 유물전시관에서 김덕령 장군의 흔적을 만난다. 장군의 무덤에서 발굴된 목관과 의복이 여기에 있다. 1974년 배제마을 뒤에 있던 묘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발굴한 것이다. 나무로 짠 관은 옛것 그대로다. 저고리 등 의복은 복제품으로 보여준다. 진품은 광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충장사 인근에 김덕령 장군의 유적도 부지기수다. 생가 터가 충효마을에 있다. 정조 임금이 장군과 형제의 충효를 기려 내려준 정려비각도 그대로다. 광주댐 호수생태원 앞 버드나무 숲에 있다. 버드나무 세 그루도 수령 430년이 넘은 고목으로 천연기념물(제539호)로 지정돼 있다. '김덕령나무'로 불린다.

장군이 무기를 만들었다는 제철 유적은 원효계곡에 있다. 피서지로 사랑받는 원효계곡의 풍암정은 동생 덕보가 은둔하며 지낸 정자다.

취가정은 후손들이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다. '취시가' 시비가 세워져 있다. 억울하게 죽은 장군이 권필의 꿈에 나타나 취시가를 읊었고, 권필이 화답시를 지어 혼령을 위로했다는 곳이다.

무등산 원효계곡에 들어앉은 풍암정. 김덕령 장군의 동생 덕보가 은둔하며 지낸 곳으로 알려져 있다.
 무등산 원효계곡에 들어앉은 풍암정. 김덕령 장군의 동생 덕보가 은둔하며 지낸 곳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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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호반의 광주호 호수생태원. 편백숲과 야생화로 서정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광주호반의 광주호 호수생태원. 편백숲과 야생화로 서정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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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데에 가볼만한 곳도 많다. 충효마을 앞 광주호반에 호수생태원이 있다. 나무다리와 야생화로 한 폭의 서정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통나무나 볏짚을 쌓아놓은 야생동물의 보금자리 비오톱도 눈길을 끈다.

환벽당은 김덕령 장군의 증조부인 사촌 김윤제(1501-1572)가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낸 곳이다. 편액을 우암 송시열이 썼다. 환벽당 앞으로 흐르는 증암천(자미탄)에 김윤제와 송강 정철이 만났다는 연못과 노송이 있다. 식영정과 소쇄원, 독수정원림도 지척이다.

잣고개를 넘어 충민사와 충장사를 거쳐 충효마을로 이어지는 길은 '역사길'에 다름 아니다. 옛 의병들이 누비던 골골이어서 '의병길'로도 불린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신경통에 효험이 좋았다는 원효폭포도 있었다. 오래 전엔 신혼여행지로 각광받았던 무등산장도 지척이다. 옛 사람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애틋한 길이다. 원효계곡의 시원한 물소리는 덤이다.

광주호 호수생태원 풍경. 숲 사이로 나무데크가 나 있어 산책 코스로 좋다.
 광주호 호수생태원 풍경. 숲 사이로 나무데크가 나 있어 산책 코스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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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령 장군을 기리는 취가정. 억울하게 죽은 장군이 권필의 꿈에 나타나 취시가를 읊고, 권필이 화답시로 혼령을 위로했다는 곳이다.
 김덕령 장군을 기리는 취가정. 억울하게 죽은 장군이 권필의 꿈에 나타나 취시가를 읊고, 권필이 화답시로 혼령을 위로했다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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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찾아가는 길
호남고속국도 문흥 분기점에서 화순 방면, 두암교차로로 나간다. 광주은행 두암타운지점 사거리에서 좌회전, 율곡초교와 장원초교를 거쳐 무등산장 방면으로 간다. 잣고개를 넘어 청풍쉼터와 충민사, 충장사로 이어진다.



태그:# 충장사, #무등산옛길, #취가정, #김덕령, #풍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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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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