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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옷을 입히는 엄마, 래카 라인. 그녀는 한국의 전형적인 엄마와 닮아 있다.
 아들에게 옷을 입히는 엄마, 래카 라인. 그녀는 한국의 전형적인 엄마와 닮아 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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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좋지 않다. 보통 오전 11시 무렵에 아침 겸 점심을 먹곤 했는데 어제 점심 무렵부터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이틀 전, 코사니에서 단짝처럼 붙어 다니는 가텀씨에게 한국에서 가져온 발효 녹차를 가져다주러 간디 아쉬람에 들렀다가 출처를 알 수 없는 독주를 마신 것이 탈이 난 것이다.

우리는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는 고등학생들처럼 간디 아쉬람의 사감격인 메니저의 눈을 피해 끼득끼득 거리며 술을 마셨다. 간디 아쉬람에서는 달걀, 고기, 생선과 함께 술과 담배가 금지 되어 있다. 술을 마시다가 매니저에게 발칵되면 그 길로 당장 보따리를 싸야 한다.

오늘 오후에 락시미 아쉬람 학교에 들러 아이들의 사진을 찍기로 했는데 난감했다. 월세방 화장실을 들락거리다가 배를 움켜잡고 락시미 아쉬람으로 향했다. 계율은 깨트리기 위해 존재한다는 식의 자만감으로 신성한 아쉬람의 계율을 깨고 몰래 금지된 술을 마셨으니 자업자득이었다. 락시미 아쉬람 학교로 향하는 산비탈 길을 오르면서 문득 부처님 말씀 몇 구절 읖조려 놓고 막행막식의 도를 텄다 자만하다가 얼치기 파계승이 된 기분이 들었다.

간디 아쉬람에서 몰래 먹은 술, 톡톡히 치른 대가

락시미 아쉬람에 도착했을때 한창 태양열판을 조립하고 있었다.
 락시미 아쉬람에 도착했을때 한창 태양열판을 조립하고 있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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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시미 아쉬람에 도착했을 때 부럼 선생은 동료 교사들과 함께 태양열판을 조립하고 있었다. 빗물을 받아 농사를 짓고, 발효액 등을 만들어 농사를 짓고 있는 락시미 아쉬람 학교는 한낮에 전력을 사용하는 곳을 찾아보기 힘들다. 주로 재생 에너지를 이용하고 있다. 적어도 내가 확인한 바로는 한낮에 교실이며 식당, 강당에 전구가 켜져 있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으로도 아이들이 공부하는 데 지장이 없었다. 처음 교실에 들어서면 침침한 느낌이 들지만 곧바로 자연 빛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심지어 학교 한 구탱이에 나뭇가지를 이용해 불을 지펴 짜이를 끓여 먹을 수 있도록 작은 화덕까지 설치해 놓았다. 학교에서는 꼭 필요한 전력을 제외한 대부분은 태양열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학교생활자들이 불편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생활 시스템이라면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위험천만한 핵발전소 따위는 전혀 필요치 않을 것이다.

태양열판은 조립이 간단하다.열판을 둥그렇게 이어 붙어 놓는다.
 태양열판은 조립이 간단하다.열판을 둥그렇게 이어 붙어 놓는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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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도 채 안돼 완성된 태양열판에 밥솥을 올려 놓았다.
 1시간도 채 안돼 완성된 태양열판에 밥솥을 올려 놓았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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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열판을 조립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는 것이 미안해 사진기를 내려놓고 작업에 동참했다. 태양열판 조립은 간단했다. 나사로 이어놓은 열판을 둥그렇게 균형을 잡아 놓으면 된다. 그렇게 열판에 세 사람이 붙어 작업했는데 한 시간도 채 안 돼 완성했다. 무게가 가볍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땡볕이 잘 드는 곳으로 손쉽게 옮겨 사용할 수도 있다. 완성된 열판에 밥솥을 올려놓자 20여분 만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태양열판을 다 조립하고 실험까지 마치고 나자 부럼씨가 자신의 집에 가서 함께 점심을 먹자고 한다.

"어제부터 배탈이 나서 식사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럼 잘 됐네요. 배탈에 좋은 음식이 있습니다."
"식사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집에 아이들이 있습니까?"
"학교에서 돌아왔을 것입니다."

부럼씨의 집은 락시미 아쉬람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학교에서 오전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 온 부럼씨의 딸 기탄잘리(타고르의 시선 <기탄잘리>와 이름이 같다)는 방문 앞 뜰 마루에 엎드려 학교에서 내준 과제물에 코를 박고 있었다. 아들 하르셋은 숙제를 다 했는지 여유를 부리며 바나나를 먹고 있다. 녀석들과 두 번째 만남이다. 부럼씨에게 저녁 초대를 받았던 첫 만남에서는 방문 뒤에 숨어 수줍게 나를 훔쳐보곤 했는데 이제는 대놓고 방긋 방긋 웃어준다.

"당신의 아내는 내 어린 시절의 엄마와 똑같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뜰마루에서 숙제를 하고 있는 부럼 선생의 딸, 기탄잘리.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뜰마루에서 숙제를 하고 있는 부럼 선생의 딸, 기탄잘리.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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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탄잘리는 느림보랍니다. 점심밥을 먹어야 하는데 아직도 저러고 있어요."

부럼씨의 아내 래카 라인이 가볍게 딸, 기탄잘리를 놀려대더니 내게 묻는다.

"식사는 하셨나요?"
"배탈이 나서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배탈요? 잘 됐네요. 배탈에 좋은 음식이 있습니다."
"고맙지만 음식을 먹을 수 없을 거 같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부럼씨 부부의 배려를 거부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식기에 오이 장아찌와 노란 요구르트에 비빈 밥이 나왔다.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아주 조금만 달라했는데 고봉밥이 나왔다. 아이들 식기에 담긴 밥도 고봉이다. 저 밥을 다 먹게 되면 속이 더 좋지 않을 것 같다고 손사래를 쳤는데도 다 먹으라고 한다.

"안돼요! 다 먹어야 해요."

부럼씨의 아내가 빙그레 웃어가며 딸에게 야단치듯이 내게 단호하게 말한다. 옆에 있던 부럼씨가 거든다. 기탄잘리 할머니께서 시골에서 소를 키우는데 그 소의 우유를 발효시켜 만든 아주 좋은 요구르트란다. 배탈날 때 먹으면 속이 편해지는 건강식품이라는 것이다.

기탄잘리 남매 역시 나처럼 슬금슬금 엄마의 눈치를 보며 밥을 덜어 놓으려 한다. 엄마는 두 남매를 향해 가볍게 눈을 흘기며 힌두어로 나무란다. 아이들은 시큼한 것보다 달콤한 음식을 좋아할 나이다. 특히나 인도 아이들은 아주 진한 단맛의 과자를 즐겨 먹는다. 그러니 저 시큼한 발효식품이 좋을 리 있겠는가.

시큼한 발효 음식 앞에서 눈물을 보인 기탄잘리.
 시큼한 발효 음식 앞에서 눈물을 보인 기탄잘리.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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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리는 '엄마'의 눈치를 보며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시큼한 요구르트 밥을 꾸역꾸역 우겨 넣었다. 점점 시큼한 맛에 적응이 되어가는 내 입가에는 어느새 미소가 번져 나왔다. 뜰 마루에 엎드려 숙제를 하는 모습이나 밥을 먹으라고 나무라는 엄마의 모습이나 오래 전 내 어린 시절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시큼한 건강식을 놓고 벌이는 모녀간의 신경전을 지켜보며 부럼씨에게 '당신 부인은 전형적인 한국의 엄마와 닮아 있다'고 말해줬다.

"당신의 아내는 내 어린 시절의 엄마와 똑같습니다. 지금 당신의 아내는 나의 젊은 엄마입니다."

우리 엄마는 아직도 나이든 내게 '밥 먹었냐' '더 먹어라' 그 무엇보다도 밥을 챙기신다고 덧붙여 말했더니 부럼씨 역시 인도 엄마들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이들과 엄마의 발음도 똑같다. 우리처럼 엄마를 '엄마'라고 발음한다. (아빠도 마찬가지다.)

하르셋과 나는 '남자답게' 식기를 말끔하게 비웠다. 하지만 기탄잘리의 식기는 여전히 고봉이다. 기탄잘리는 엄마에게 '그만 먹으면 안돼요?'라는 애원의 눈빛을 보낸다. 하지만 엄마의 눈초리는 단호하다. 공연히 손가락을 빨며 구원 요청하듯이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옆에서 누나를 애처롭게 바라보던 동생 하르셋이 콧구멍을 후벼 판 손가락을 누나의 식판에 가져다 대는 시늉을 하며 장난을 치자 엄마가 야단을 치며 말한다.

"찌지~ 찌지~"
"예? 찌지~ 그러셨지요? 어떤 뜻입니까?"

예상대로 그녀가 말한 '찌지~'는 더러운 행동을 했을 때 나오는 우리의 의성어와 똑같았다. 장난끼 많은 부럼씨는 조금 있으면 기탄잘리가 엄마에게 울면서 하소연할 것이라고 말한다. 잠시 후 그 말이 딱 맞아 떨어진다. 사슴처럼 큰 기탄잘리의 눈망울이 그렁그렁하더니 결국 울음보를 터트리고 만다.

부럼씨와 함께 집을 나서면서 기탄잘리에게 "행운을 빈다, 좀 더 노력해 봐라"라고 말했더니 부럼씨가 푸하하하 크게 웃는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기탄잘리에게 약을 올린 것 같아서 좀 미안하다. 기탄잘리는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었고 내 자식들의 어린 시절이었다. 타고르의 시선, <기탄잘리>가 님(신)에게 다가가고자 갈망하는 노래라면 부럼씨의 딸, 기탄잘리는 그렁그렁한 그 큰 눈망울을 통해 내 기억 속에서 잠들어 있는 순수한 세계를 노래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뱃속이 아주 편안해 졌다. 부럼씨의 아내, 래카 라인이 내게 강압적으로 주입시킨 발효 식품 덕분이었다. '엄마 말을 잘 들어야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법이다.' 그 말이 새삼 떠올랐다. 월세방을 잡아 놓았기에 코사니를 떠날 날이 아직 20일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부럼씨네 가족들이 그리워진다.


태그:#배탈, #태양열, #엄마, #기탄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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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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