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신의 신분을 당당히 밝히지 못하고 사는 것처럼 고통스런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네팔 대지진 이후 전해지는, 한국에서 일하다 네팔로 돌아간 이주노동자들의 사연은 더욱 더 슬프기만 하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온 이주노동자들이 있다. 그 중 8년을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한국의 노동 현장 곳곳을 누비던 한 사람이 있었다. 치링 타망. 39세인 그는 6개월 전 고국인 네팔로 금의환향했다.

그는 고향인 랑탕히말라야 인근 러슈와에서, 카트만두 인근 다딩 마을 처녀와 결혼하여 몇 해를 살다가 한국 인력송출 업체를 통해 한국에 왔다. 그때 나이 31세.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아이를 가졌다. 그는 당시 11개월 된 아들과 23살 어린 신부를 네팔에 두고 한국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에서 8년간 이주노동... 금의환향 한 지 6개월 만에

치링 타망의 부탁으로 그의 가족이 사는 다딩에 갔을 때다. 사진 아래는 그의 동생 부부와 어린 조카들 그리고 치링의 아내와 써친 타망이다.
▲ 치링 타망의 가족과 다딩의 아이들 치링 타망의 부탁으로 그의 가족이 사는 다딩에 갔을 때다. 사진 아래는 그의 동생 부부와 어린 조카들 그리고 치링의 아내와 써친 타망이다.
ⓒ 김형효

관련사진보기


그런 그와 내가 만난 것은 수원에 한 네팔상점에서다. 그와 나는 나의 시골집에 함께 가 머물기도 했지만, 몇 년 동안은 소식이 끊기기도 했다. 그러다 페이스북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됐다. 그 뒤에 내가 네팔에 카트만두에 가서 네팔인 아내와 결혼해 살게 됐을 때, 그는 내게 자신의 가족이 있는 곳에 한 번 가줄 것을 부탁했다.

나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그의 집을 찾아갔다. 그의 집이 있는 다딩은 카트만두에서 약 1시간 30분 거리다. 막 짓고 있는 집, 1층은 이미 완성됐고 2층은 모든 구조물이 들어선 채 내부공사만 마치면 됐다. 그의 아내와 아들, 그리고 이웃해 살고 있던 그의 아우와 아우의 가족은 매우 단란해 보였다. 치링 타망의 아우는 인근 군부대에서 직업군인으로 복무하고 있었고, 네 자녀를 두고 있었다.

나는 치링 타망의 아들과 부인, 그리고 아우 가족을 모두 만나서 인사를 전하고 가족사진을 찍었다. 나는 그때 내가 쓴 네팔 어린이를 위한 동화책을 가지고 갔다. 치링 타망을 대신해서 내가 그의 아들 써친에게 인사를 전한 것은 7년 만이었다. 이후 나는 가족처럼 그의 집을 오가며 지냈다. 치링 타망의 아우도 가끔 집에서 만든 네팔 전통주 '럭시'를 들고 딸과 아들을 데리고 카트만두에 있는 우리 집을 찾곤 했다.

그 뒤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지난해 8월 수원에서 치링 타망을 만나 함께 수원 화성을 구경했다. 그때 그는 곧 네팔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살겠다는 뜻을 전했고, 그에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조금이라도 더 알고 가라고 당부하기 위해 함께 수원 화성을 찾은 것이다. 그 뒤 네팔로 귀국한 그는 가끔 아내와 아들의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며 행복한 일상을 사는 가장의 모습을 보여줬다.

간절한 기도가 된 "평범한 일상으로의 복귀"

사진 중간에 써친 타망이 집 앞에서 놀고 있다. 사진 위는 수원 화성 여행 중이고, 사진 맨 아래는 여전히 살아 있는 페이스북 계정 속의 행복한 부자의 모습이다.
▲ 치링 타망과 네팔인 이주노동자 그리고 페이스북 사진 중간에 써친 타망이 집 앞에서 놀고 있다. 사진 위는 수원 화성 여행 중이고, 사진 맨 아래는 여전히 살아 있는 페이스북 계정 속의 행복한 부자의 모습이다.
ⓒ 김형효

관련사진보기


그런 형제가 이번 지진으로 함께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야말로 참사다. 치링 타망은 고향의 수력발전소에서 일하고 있었고, 그의 아우 역시 직업군인으로 형과 함께 일하고 있었다. 지진이 일어난 4월 25일, 지진은 출근길에 나선 두 사람을 덮쳤다. 랑탕히말라야에서 발생한 지진은 랑탕마을을 모두 삼켜버렸고, 이 형제와 가족의 꿈도 통째로 삼켜버렸다.

나는 비보를 접한 5월 15일 아침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현실을 믿을 수 없어 멍하게 지냈다. 물론 그의 가족이 살고 있는 다딩에도 참혹한 지진이 발생했다는 소식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러던 중, 한국에서 발행되는 네팔인 인터넷신문을 보고 아내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소식을 들은 나는 곧 치링 타망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을 기대하며 기다리던 그의 안부를 그제야 직접 묻게 된 것이다. 치링 타망의 형제 말고 그의 가족은 모두 무사했다. 다행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형제의 죽음이 충격이었다. 다시 만난 지 불과 6개월 만에 남편을 여의고 만 그의 아내는 내가 전화로 안부를 묻자 "지진으로 갔어요"라고 짧고 담담하게 말했다.

한국에서 일하는 수많은 네팔 이주노동자와 이주민 가족들의 집들은 지진으로 부서져내렸고, 이주노동자들의 '금의환향' 꿈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안타깝게도 여진은 아직도 멈추지 않고 있다. 16일 낮에도 두 차례 여진이 있었고 17일 아침에도 다시 한 차례 여진이 있었다. 네팔인들은 모두 침통함 속에 평범한 일상으로의 복귀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수원 화성 여행 중 홀로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치링 타망이다. 지난해 8월 네팔인 친구들과 함께 그에게 수원 화성을 구경시켜줬다.
▲ 치링 타망의 기도는 무엇이었을까 수원 화성 여행 중 홀로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치링 타망이다. 지난해 8월 네팔인 친구들과 함께 그에게 수원 화성을 구경시켜줬다.
ⓒ 김형효

관련사진보기



○ 편집ㅣ최규화 기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e-수원뉴스에도 게재합니다.



태그:#이주노동자 ,치링 타망, #평범한 일상, #써친 타망, #러슈와, 랑탕 히말라야, #수원 화성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시집"사람의 사막에서" 이후 세권의 시집, 2007년<히말라야,안나푸르나를 걷다>, 네팔어린이동화<무나마단의 하늘>, <길 위의 순례자>출간, 전도서출판 문화발전소대표, 격월간시와혁명발행인, 대자보편집위원 현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홈페이지sisarang.com, nekonews.com운영자, 전우크라이나 예빠토리야한글학교교사, 현재 네팔한국문화센타 운영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