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엷은 해무 덕분에 아련하고 아스라히 펼쳐지는 청산도 바다.
 엷은 해무 덕분에 아련하고 아스라히 펼쳐지는 청산도 바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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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에 담아온 섬 풍경을 PC 모니터로 감상하며 느지막이 잠들다 느릿느릿 일어나서 느릿느릿 밥을 먹고, 쫓기지 않으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곳이 청산도 슬로길이다. 청산도 슬로길 3, 4코스엔 섬 속 성곽길이 있는 청산진성과 바닷가 풍광 멋진 '낭길', 청산도 최고의 절경이라는 범바위가 기다리고 있다. 지난달 12일, 이곳을 다녀왔다.

[청산도 슬로길 3코스] 청산진성-읍리 마을 고인돌, 하마비-읍리 몽돌 해변

몽돌해변
 몽돌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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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드라마의 배경으로 유명해진 마을 당리를 감싸 안은 청산진성, 고인돌, 하마비(下馬碑), 대문도 없이 이어진 읍리 마을 옛 돌담길 등 청산도의 오랜 역사와 문화를 그대로 볼 수 있는 길이다. 청산도는 옛날부터 우리나라 서남해안 바닷길의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 일대가 전란에 휩싸여 거주하는 사람이 없다가 효종 때 다시 입도(入島)했다. 이 지역은 제주도와 연결되는 해로 상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끊임 없이 왜구의 침입을 받아 왔다.

왜구들의 침해 사실을 살펴보면 고려 말과 조선 태종(1409년) 때부터 왜구들은 민간인을 납치해 도주하는가 하면 약탈도 많이 했다. 이러한 왜구들의 잦은 출몰과 임진왜란으로 청산도를 비롯한 주변 도서 지역 주민이 흩어지게 되었고, 청산도 역시 공도(空島)가 되었다. 이후 해상 교통이 발달하면서 청산도는 서남해안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 때문에 1866년(고종 3년) 당리 마을 언덕배기에 청산진성을 축조하기에 이른다. 2010년 흔적만 남아 있었던 청산진성터가 복원됐다.

청산진성을 따라 읍리(邑里)로 들어서면 인고의 세월을 묵묵히 괴고 있는 청동기 시대 대표적인 무덤, 고인돌을 만날 수 있다. 읍리 마을에서 고인돌은 밑에 기둥이 있는 북방식 고인돌과 기둥이 없는 남방식 지석묘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섬에서 걷는 이채로운 성곽길, 청산진성.
 섬에서 걷는 이채로운 성곽길, 청산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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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리 마을 돌담길에서 마주친 귀여운 목소리의 염소.
 읍리 마을 돌담길에서 마주친 귀여운 목소리의 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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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리 고인돌은 남방식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문화재자료 제116호). 어떤 고인돌은 마을 버스 정류장 옆에 자리하고 있어 친근하게 다가왔다. 이 고인돌은 '독배기'라 부르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선사 시대 석기 유적이다. 청동기 시대부터 청산도에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다.

청산도 하마비(下馬碑)는 민간 신앙과 불교가 결합한 신앙물로 자연석에 부처를 새겼는데 아무리 지체 높은 사람이라도 이 앞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했다고 전해진다. 인간으로서 겸허함을 생활로 삼았던 섬 사람들이 빚어낸 소중한 보물이다. 하마비의 뒷면에는 마애불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이는 민속 신앙과 불교가 하나로 어우러진 형태라 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이 하마비를 선사 시대 때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선돌'로 보기도 한다고.

성곽길에서 이어지는 마을 읍리의 풋풋한 마을 풍경과 옛 고인돌을 보고 나면 슬로길은 남해 바다를 향해 이어진다. 귀여운 염소가 돌담길 사이에서 길을 막는 읍리 마을의 나지막한 지붕들이 참 정답다. 덕분에 본의 아니게 남의 집 안 마당 구경도 하게 된다. 정겨운 돌담을 배경으로 햇볕을 쬐고 있는 색색의 빨래들이 정다워 절로 카메라에 손이 갔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라면 '변태'라며 신고 당할 거라는 생각에 사진을 찍으면서도 "피식~" 웃음이 났다.

코뚜레 자국이 마음을 짠하게 했던 순하고 정다운 소.
 코뚜레 자국이 마음을 짠하게 했던 순하고 정다운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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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류장 옆에 있어 친근했던 읍리 마을의 남방식 고인돌.
 버스 정류장 옆에 있어 친근했던 읍리 마을의 남방식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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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컷들에게 둘러싸인 부러운 장닭의 우렁찬 목청하며, 밭일 하시며 들려오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정겨운 남도 사투리가 아득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읍리 마을 길은 그렇게 정다운 풍경을 품고서 집들 사이를 굽이굽이 흘러갔다. 발걸음처럼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고, 마음도 한껏 느슨해지게 하는 섬 마을이다. 

대문없는 어느 집 축사 창틀로 고개를 내밀고 집 밖을 구경하던 순한 소의 눈매와 표정이 마음속에 긴 여운으로 남았다. 코뚜레를 하고 농사일을 하느라 콧구멍에 흉터 같은 자국이 남아 마음이 짠해져서 그런 듯. 한낱 가축이지만, 축사처럼 갑갑한 아파트에서 겨우 살아가는 내 삶와 별 다르지 않지 싶었다.

동글동글한 자갈들이 깔려있는 몽돌 해변가의 '읍리 앞개'가 3코스의 끝 자락. 파도가 밀려 올 때마다 들려오는 '자그락 자그락' 몽돌 소리가 참 이색적이다. 읍리 앞개 해변가에 마련된 정자와 넉넉한 평상에서 음료수나 간식을 먹으며 쉬어가는 게 좋다. 이어지는 청산도 슬로길 4코스는 해안 벼랑길 혹은 '낭길'이라 불리는 아찔하고 짜릿한 해안 벼랑길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청산도 슬로길 4코스] 읍리 앞개 몽돌 해변-낭길-권덕리 마을회관

어깨높이의 돌담길에선 집 마당 풍경이 훤히 보인다.
 어깨높이의 돌담길에선 집 마당 풍경이 훤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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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길' 가에 피어나 자꾸만 발길을 붙잡던 들꽃 중 하나인 때깔 고운 붓꽃.
 '낭길' 가에 피어나 자꾸만 발길을 붙잡던 들꽃 중 하나인 때깔 고운 붓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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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다가 눈부시도록 푸르다. 온 데를 둘러봐도 청산이다. 봄 바람 든 가슴 일렁이게 하는 섬 풍경이 내내 펼쳐지는 4코스 슬로길. 청산도 남쪽 해안에는 10∼20m의 높은 해식애 즉 해안 절벽이 발달했다. '낭길'은 그런 해안 벼랑길을 따라 걸어가는 길이다. 낭떠러지 곳곳엔 동백나무·후박나무·곰솔 등의 난대림이 무성하여 벼랑길을 덜 아찔하게 해줬다.

구장리에서 권덕리 마을회관까지 이어진 낭떠러지 길은 하늘에 떠 있는 듯, 바다에 떠 있는 듯 모호한 경계선을 따라 걷는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청산도에 들어서면서 그랬듯, 자연스레 두 발이 느려졌다. 

걷는 내내 투박하지만 거칠지 않은 청산도 남쪽 해안선의 속살이 그대로 발바닥에 느껴졌다. 관광객이 걷기 편하라고 만든 흔한 나무 데크 같은 인공 구조물이 없어서 오히려 더 좋았다. 오르막이 이어지는 곳이나 벼랑 옆길 위험한 곳은 튼튼한 동아줄을 난간삼아 걸쳐 놓았다. 자연의 특성을 살리고 친환경 걷기 길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이 묻어 나왔다.

반짝이는 바닷물에 눈이 부셨다. 맑고 고운 하늘과 따사로운 햇살, 고려 청자가 떠오르는 색감의 남해 바다. 아스라이 펼쳐진 봄 바다를 내려다 보며 걷노라니 다른 계절엔 어떨지, 그냥 그대로 이곳에 눌러앉아 사계절을 느끼며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느 유명한 바닷가처럼 리조트와 펜션, 카페들이 전망좋은 곳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아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사람으로치면 소박하고 진솔한 해안길이다. 

높이 솟은 절벽 위 낭길까지 불어오는 바다의 살가운 미풍을 맞으며 해변의 오솔길, 울창한 숲길, 오르막 산자락 길 등 해안을 따라 다양한 길을 걸었다. 발치에 낮고 작게 피어난 들꽃들, 특히 보라색 붓꽃이 어찌나 고운지 고개를 숙이며 걷게 했다.

바다 속에서부터 바로 솟아 오른 직절벽 옆으로 난 낭떠러지 길을 지나갈 땐, 곁에서 들여오는 철렁철렁 파도소리에 아슬아슬하고 아찔한 스릴을 즐기며 걸었다. 바다 위로 간간히 떠있는 작은 섬들은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냈고, 인적 없는 낭길을 지나는 여행자를 덜 쓸쓸하게 해줬다.

청산도 최고의 해안 절경, 범바위 길

높다란 해안절벽을 따라 난 '낭길'
 높다란 해안절벽을 따라 난 '낭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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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적산 8부 능선에 있는 범바위를 향해 자석처럼 끌려 올라갔다.
 보적산 8부 능선에 있는 범바위를 향해 자석처럼 끌려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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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길 4코스 끝자락인 권덕리 마을회관 앞, 바닷가에 있어서 그런지 높진 않지만 아득하게 보이는 보적산(341m) 능선에 신묘하게 자리한 범바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내친김에 범바위 전망대까지 올라가 보았다. 범바위로 오르는 길에 놓여있는 여러 모양의 넙적한 디딤돌은 사람의 발길을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산행길에 종종 마주치는 사람을 쉬이 지치게 하는 획일적인 계단이 아니어서 그런지 오르막 산길이 덜 힘들었다.

범바위 가는 길은 하나의 갈림길이 없는 곧은 길이다. 그 길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범바위를 향할수록 하늘이 가까워 오고, 바다도 너르게 다가왔다. 중간 중간 디딤돌에 앉아 가쁜 숨을 다독이며 쉬어갈 적마다 보이는 절경, 범바위 길 또한 조바심에 빨리 오르면 오를수록 손해다.

청산도 최고의 해안 절경이라 불리는 범바위에 숨차게 오르면 수고했다는 듯, 깎아지른 해안 절벽과 짙푸르게 변한 깊은 바다의 풍경을 내놓는다. 섬 마을에 흔한 돌담길, 구들장논에서 보듯 유난히 돌이 많은 청산도. 거친 기운 가득한 바위가 솟은 모양이 정말 범상치 않았다.

청산도 최고의 절경이 펼쳐지는 늠름한 범바위.
 청산도 최고의 절경이 펼쳐지는 늠름한 범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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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바위는 멀리서 보아 호랑이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바위 이름다웠다. 위용이 느껴지는 장대하고 늠름한 모습에 간혹 범바위를 지나는 바람소리가 호랑이의 울음 소리 같다고 하는 사람도 있단다. 바위 자체가 아름답고 전망까지 좋은 범바위 앞에 서 있는 안내판에 '강력한 자기장이 작용하는 지역이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쓰여있다. 실제로 이 범바위 앞에서는 휴대 전화가 먹통이 되거나 배터리가 눈에 띄게 줄어든다.

나침반을 가져온 등산객은 북쪽을 잃어버리고 자침이 빙글빙글 도는 신기한 장면을 보며 감탄을 연발했다. 범바위 자체가 자성(磁性)이 있는 암석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란다. 어쩐지 권덕리 마을에서 보이는 이 바위가 무척 끌렸다 싶었다.

범바위 부근을 지나는 어부들은 아예 나침반을 쳐다보지 않는다고 한다. 안개가 끼면 어부들은 이 지역 진입을 삼가고 먼바다로 돌아갈 정도다. 해도(海圖)에는 이 지역이 '자기장 이상지역'으로 표시돼 있다고.

범바위 전망대에 올라서서니 하늘도 바다도 치우침 없이 서로 조화롭고 고르게 공간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어디까지가 바다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하늘은 바다를 닮고, 바다는 하늘을 닮아 있었다. 엷은 해무 덕분에 아련하고 아스라히 펼쳐지는 청산도 바다의 비경을 실컷 감상할 수 있었다. 

늠름한 자태의 범바위 아래 깍아지른 해안 절벽 아래로 오가는 파도는 한껏 자세를 낮추고 잔잔했다. 내 마음도 절로 파도처럼 잔잔해지고 있었다. 섬 마을로 다시 돌아올 때는 범바위 아래 주차장과 청계리 마을을 오가는 순환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덧붙이는 글 | ㅇ 청산도 여행 정보 : www.slowcitywando.com



태그:#청산도 슬로길, #청산진성, #낭길, #청산도 읍리 , #범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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