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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시 지곶동 독성산에 쌓은 사적 제140호 독성산성
▲ 독성산성 오산시 지곶동 독성산에 쌓은 사적 제140호 독성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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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시 세마동은 조선조 정조 13년인 1789년까지는, 시봉면과 산성면, 삼미면의 일부가 속했었다. 정조 17년인 1793년에 발간된 <수원부읍지>의 지도를 살펴보면 산성(山城)이라는 명칭이 나온다. 또한 정조 13년인 1789년의 인구수를 보면 산성면에는 지곶리와 양산리가 있는데, 249가구에 남자가 363명, 여자가 424명, 합계 787명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순조 31년인 1831년에 발간된 <화성지>에 의하면, 산성면에는 5개리로 서리, 남리, 지곶리, 신촌리, 양산리 등이 있다. 현재 독산성이 속해있는 지곶동은 과거 산성면의 지역이다. '산성(山城)'이란 이곳에 성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지곶동에는 현재 사적 제140호인 독산성과 세마대지가 있다.

독성산성의 남문지는 성벽의 높이가 7~8m에 이른다
▲ 남문지 독성산성의 남문지는 성벽의 높이가 7~8m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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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를 생산하던 조지소(造紙所)가 있던 지곶동

행정동 세마동에는 외삼미동, 세교동, 양산동, 지곶동, 서랑동의 법정동을 갖고 있다. 이 중  '지곶동'이라는 지명유래는 원래 종이(한지)를 만들던 마을이라는 한자 풀이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본다. 마을 뒤에 있는 독성산에 닥나무가 많아서 이것을 이용해 한지는 생산하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1789년에 발간된 <수원부읍지>에 산성면 '지곶리(紙串里)'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종이고지, 조꼬지, 지곶동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지명총람>에 따르면 지곶리라는 명칭은 종이를 뜨는 '조지소(造紙所)'가 이곳에 위치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독성산성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독성산성의 문지와 암문지. 시계방향으로 동문지, 암문지, 서문지, 북문지
▲ 문지 독성산성의 문지와 암문지. 시계방향으로 동문지, 암문지, 서문지, 북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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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140호 오산 독성산을 오르다

주변을 둘러보면 거칠 것이 없다. 어느 한 곳도 시야를 가리는 곳이 없는 곳이다. 독성산성(혹은 독산성)은 성을 한 바퀴 돌아보아도 눈앞을 가리는 어떤 것도 없는 곳이다. 그야말로 가파른 비탈의 산 정상부를 둘러 성을 쌓았다. 현재의 성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일부 남문지 등을 보면 성벽이 높이가 7~8m에 달하는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견고한 성으로 보인다.

독성산성은 백제 때 처음으로 축성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후 통일신라와 고려, 조선조 임진왜란 때까지 이 성은 상당히 중요한 거점으로 활용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광주의 남한산성, 용인의 석성산성과 함께 도성방어를 위한 삼각체계를 형성한 곳이기도 하다. 조선조 선조 27년 9월 11일부터 14일까지 불과 4일 만에 백성들이 힘을 합해 성을 새로 쌓았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렇게 4일 만에 축성을 완성했다고 하는 것은, 성곽의 무너져 내린 곳을 보수했다고 보아야 한다. 한 때는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독성산성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온양온천에 행차했다가 장마 때문에 이곳에 묵었었다고 하여 정조 16년인 1792년과 20년인 1796년에도 수개축을 하여 오히려 독성산성을 더 견고하게 쌓았다고 한다. 지금의 독성산성은 정조 당시의 축성 형태라는 것이다.

독성산성에서 만날 수 있는 치. 치 위에 의자를 놓아 사적의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
▲ 치성 독성산성에서 만날 수 있는 치. 치 위에 의자를 놓아 사적의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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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치성들의 모습
▲ 치2 또 다른 치성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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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성산성을 따라 걷다

가파른 길을 따라 오르면 숨이 턱에 닿는다. 독성산성을 오르는 길은 그렇게 가파르다. 차로 오른다고 해도 만만치가 않은 가파른 길이다. 차도가 끝나는 성곽 입구에는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가 시끄럽다. 성안에 있는 보적사를 찾아 온 아이들인 듯하다. '해탈문'이라는 나무판을 단 동문으로 걸음을 옮긴다.

보적사를 돌아보니 새로 여기저기 신축을 하고 있다. 전통사찰인 보적사는 그동안 이곳을 오를 때마다 협소하고 답답하다고 느꼈는데, 절 양편으로 전각을 더 짓느라 분주하다. 보적사 화장실 앞에서 만나는 치성 위에는 의자가 놓여있다. 관람객이 편하게 앉아 멀리 내다보라고 이곳을 의자를 놓았겠지만, 사적의 치성이라는 생각을 하진 못한 것일까?

그러고 보니 독성산성을 돌면서 이렇게 치성 위에 의자를 설치한 곳이 이곳 외에도 만날 수가 있다. 사람들을 편하게 배려를 한 것은 좋지만, 이곳은 엄연한 사적이고 치는 성곽의 중요한 구조물 중 한 곳이다. 굳이 그곳에 의자를 놓아 치성을 감상하는데 방해를 했어야만 했을까? 좀 더 성숙한 문화재 보존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독성산성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권율장군이 쌀로 말을 씻겼다는 세마대
▲ 세마대 독성산성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권율장군이 쌀로 말을 씻겼다는 세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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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공불락의 요새인 견고한 독성산성     

독성산성의 둘레는 3240m이다. 성에는 네 곳에 문을 내었으며, 한 곳에 암문을 내고 있다. 하지만 독성산성의 4대문지와 암문지를 비교하면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성벽 위에 여장을 둘러쳤을 것 같은데, 한 곳도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산성을 오르는 길에 현수막에는 독성산성 복원비용이 확정이 되었다고 한다. 독성산성을 제대로 복원하려면 500억 이상이 소요되지만 그 절반 정도가 확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은 자연을 이용해 축성을 하였다. 성곽은 자연적인 지형에 맞게 구불거리면서 축성을 한 형태이다. 그리고 4대문 주변에는 치성을 돌출시켜 성문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하였다. 권율장군이 쌀을 부어 말을 씻겼다는 세마대첩이 일어날 때, 성내에는 근왕병 2만여 명이 있었다고 한다. 물이 부족한 독성산성 안을 돌아보니 배수구가 한 곳 밖에 보이지 않는다.

최적의 지세를 갖고 있으면서 적의 침입을 방어할 수 있는 독성산성. 한 바퀴를 사진촬영하면서 돌아보아도 한 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그 한 시간을 걷다가보면 이 성이 얼마나 대단한 성이었나는 가늠할 수 있다. 2월 6일 오후에 돌아본 독성산성. 언제 성곽의 복원을 마칠 수가 있을까? 그 때를 고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e수원뉴스와 네이버 블로그 '바람이 머무는 곳'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독성산성, #오산, #사적, #권율, #세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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