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백남준은 작품을 할 때 샤머니즘이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줬다고 고백한다. 그는 굿을 모든 예술의 원초적 근원지로 봤기에 거기에서 예술적 상상력과 창작의 에너지를 얻는다. 아방가르드 정신에 첨단전자기술까지 결합한 21세기 샤먼아티스트인 그가 기존의 샤먼과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자. - 기자의 말

1990년 백남준 요셉 보이스 추모 굿 장면. 보이스가 백남준 첫 전시에서 박살을 낸 피아노가 보이고 백남준이 그에게 지어준 한국 이름 '보이수(普夷壽)'가 적힌 병풍
 1990년 백남준 요셉 보이스 추모 굿 장면. 보이스가 백남준 첫 전시에서 박살을 낸 피아노가 보이고 백남준이 그에게 지어준 한국 이름 '보이수(普夷壽)'가 적힌 병풍
ⓒ 최재영

관련사진보기


1986년 타계한 요셉 보이스 혼 달래는 '추모 굿'

백남준은 요셉 보이스와 88서울올림픽 때 한국에서 함께 퍼포먼스를 하기로 약속했으나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1986년 보이스가 타계하자 사후 4년 만인 1990년 7월 20일, 현대화랑 뒷마당에서 '보이스 추모 굿'을 벌린다. 마침 그날은 백남준 생일이었다.

요셉 보이스는 생애에 많은 신화를 남기며 인생과 예술이 구별되지 않는 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예술적인 연금술사였다. 원시적 생명을 복원시키려 애썼고 기존의 문명을 전복시키고 거기서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려 했다. 말하자면 그는 독일 '샤먼'이었다. 백남준이 스스로 무당(샤먼)이 되어, 그의 혼을 불러내 그를 다시 살려낸 셈이다.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 두 예술가는 8살 차이였다. 그 둘은 무명 시절 서로를 만났다. 그리고 1960~1970년대 독일미술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기여를 한 일등공신이 되었다. 백남준은 '동양의 보이스', 보이스는 '서양의 백남준' 같은 관계로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백남준이 보이스에게 '보이수(普夷壽)'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준 것도 자연스러워 보인다.

1990년 백남준 요셉 보이스 추모 굿 장면. 보이스가 백남준 첫 전시에서 박살을 낸 피아노가 보이고 백남준이 그에게 지어준 한국 이름 '보이수(普夷壽)'가 적힌 병풍이 보인다.
 1990년 백남준 요셉 보이스 추모 굿 장면. 보이스가 백남준 첫 전시에서 박살을 낸 피아노가 보이고 백남준이 그에게 지어준 한국 이름 '보이수(普夷壽)'가 적힌 병풍이 보인다.
ⓒ 최재영

관련사진보기


"주위 사람이 뭐라 하든 그가 날 대하는 태도에는 1%의 차이도 없다"는 백남준의 말에서 보이스에 대한 그의 신뢰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그런 관계의 보이스가 1986년 1월 25일 65세로 갑자기 타계했으니 백남준 속이 얼마나 탔겠는가.

그날 백남준의 보이스 추모 굿은 정말 완벽했다. 현장에서 굿 장면을 찍은 사진가 최재영 선생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장엄하면서 익살스러운 해원(解寃)마당을 이끌던 백 선생의 표정과 몸짓은 신들린 큰 샤먼과 같았어요, 취재하러 갔지만 저도 곧 굿판과 하나가 돼 카메라로 그 분위기를 빨아 들였죠"라고 증언했다.

박명자 갤러리현대 회장의 회고에 따르면 그날 소문난 '진오귀굿' 무형문화재 김석출·김유선 부부 등도 나왔으나 백 선생의 신기에 눌려 물러섰을 정도였단다. 이날 500여 명의 관객이 참여해 그의 흥미진진한 퍼포먼스를 봤다. 소르본대 교수이면서 방송연출가인 '장 폴 파르지에'는 그날 전 장면을 찍어 프랑스 전역에 방송했다.

예술로 승화된 이날 굿은 오후 4시쯤 끝났다. 희한하게도 굿이 끝날 무렵, 거센 바람이 불고 천둥이 치고 벼락이 떨어져 일대가 정전되고 그 마당 한가운데 서 있던 큰 느티나무가 벼락을 맞아 뽑혔다. 사람들은 이게 백남준의 신기가 보이스의 영을 부른 게 아니냐며 너무 절묘한 우연이라고 웅성거렸단다.

백남준이 샤머니즘에 매력을 느끼는 건 역시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게 다리를 놓기 때문이다. 쌍방적이고 수평적인 민주적인 소통방식을 보인다. 샤먼과 관중이 일심동체가 되어 몸과 마음이 교류하는 '네트워크' 때문이다. 백남준은 거기서 원시적 생명력과 예술적 착상·영감 그리고 쾌감을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우리의 의식 속에 유교나 불교보다는 샤머니즘적 뿌리가 더 깊다. 한의 정서가 깊은 우리에게 체질상 더 맞는 관점일지 모른다. 죽은 자와 만나 생전에 불통으로 쌓인 오해를 풀고, 서로 화해하는 과정을 통해 상생한다는 게 말이다. 게다가 샤머니즘에는 '경천애인(몽골어로는 '탱그리')' 같은 따뜻한 인류애도 담겨 있지 않은가.

차별화된 '전자샤먼' 백남준

백남준의 굿에는 현대문명의 이기인 피아노와 TV도 나오지만, 전통 굿에 나오는 요강, 제사에 쓰는 놋그릇, 담뱃대 등도 등장한다.
 백남준의 굿에는 현대문명의 이기인 피아노와 TV도 나오지만, 전통 굿에 나오는 요강, 제사에 쓰는 놋그릇, 담뱃대 등도 등장한다.
ⓒ 최재영

관련사진보기


백남준은 왜 샤먼 아티스트가 되려 한 것인가? 그 답은 간단하다. 굿은 자기 예술의 원초적인 공간, 마치 시원지와 같기 때문이다. 그럼 전통 무당과 그는 뭐가 다른가. 전통악기뿐만 아니라 이와 함께 피아노 같은 현대 악기가 나온다. 무엇보다 TV 등 첨단기술로 무장한 '전자' 무당이라는 점이다. 그는 그렇게 종교성·예술성·과학성을 고루 융합시켰다.

이 추모 굿에서는 보이스를 상징하는 모자와 그의 평화사상을 상징하는 토끼도 나온다. 하지만 역시 전통 굿이기에 백남준 유년의 추억이 담긴 대야, 요강, 주발, 제기, 담뱃대 등이 등장한다. 일종의 백남준식 오브제 아트다. 백남준은 직접 삿갓을 쓰고 나와 굿을 진행했다. 거기에 한국인의 생명줄인 쌀이 빠질 수 없다.

사실 백남준의 이런 퍼포먼스는 1960년 초부터 시작됐다. 독일에는 예술 샤먼 '보이스'가 있다면 미국에는 '샬럿 무어만'이 있고 한국에는 백남준이 있는 셈이다. 이 세 사람은 환상적 트로이카다. 1967년 백남준은 뉴욕에서 전라가 된 샬럿과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공연을 하다가 경범죄로 경찰에 체포될 뻔했다.

요셉 보이스가 샤먼을 정말 잘 이해하는 이유는, 2차 대전 중 비행사로 복무하다가 소련군의 폭격을 맞고 몽고계 타타르인이 사는 촌락에 추락했던 경험 때문이다. 그를 기적적으로 살려준 건 바로 버터와 따뜻한 담요로 그를 극진히 간호한 타타르인이었다.

그때 그는 거기서 타타르족의 무당이 굿하는 걸 자주 보며 친근감을 가지게 된다. 보이스 작품에 모자, 왁스, 썰매, 약품, 펠트지, 손전등, 기름 덩어리 등이 자주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도상은 뭔가? 토끼는 평화의 메신저, 펠트나 버터는 치유, 썰매는 신화에 나오는 시베리아 여행을 뜻하기도 한다.

'굿'의 예술화와 현대화를 시도하다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는 2015년 2월 27일(금)까지 <바우하우스의 무대실험-인간, 공간, 기계展>이 열린다. 제7전시실 바우하우스 작품들. 바우하우스는 놀이가 공부가 되고 공부가 파티가 되고 파티가 다시 공부가 되는 방식의 학교로, 백남준의 '유희정신, 광대정신, 샤먼정신'과도 통한다.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는 2015년 2월 27일(금)까지 <바우하우스의 무대실험-인간, 공간, 기계展>이 열린다. 제7전시실 바우하우스 작품들. 바우하우스는 놀이가 공부가 되고 공부가 파티가 되고 파티가 다시 공부가 되는 방식의 학교로, 백남준의 '유희정신, 광대정신, 샤먼정신'과도 통한다.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백남준은 1984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예술은 매스게임이 아니다"라며 "페스티벌 잔치 즉 굿이다, 다시 말해 광대와 다름이 없다"라고 말했다. 백남준은 이렇게 굿을 예술로 봤고 이를 현대화하려 했다. 거기에 담긴 미학은 바로 디지털 시대에 더 잘 맞는, 순차 없이 무질서하게 접근하는 '랜덤 액세스' 방식이다.

굿은 인간의 영혼을 달래주는 예술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 서구인도 이를 인지해가고 있다. 백남준이 이런 방식에 주목한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서구인은 오랫동안 '과학주의·합리주의·이성주의'가 최고라고 믿어왔으나 그 결과는 처참한 세계전쟁이었고, 유대인 대량 학살 같은 끔찍한 사건이었다.

이런 문제를 일찍 인지한 서양인이 바로 '존 케이지'다. 그래서 그는 잡음이나 침묵도 음악으로 봤다. 백남준은 그런 점에 착안해 영감을 얻으면서 자유를 맛본다. 서양의 '노이즈'와 한국의 샤머니즘은 닮은꼴이다. 기존의 질서와 규칙을 넘어 시공간이 뒤죽박죽된 것 같으나 어느 순간에 하나가 되면서 빅뱅이 일어난다.

이런 점을 학문적으로 다른 책이 진중권의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이다. 그는 아도르노(1903-1969)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짐승·바보·광대가 되는 모양새, 이런 '어리석음'이 바로 현대예술의 특징이다. 합리성에 광적으로 미쳐 이를 추구하는 현대의 눈으로 보면 예술은 어리석어 보이나 진정 현명해지려면 어리석어야 한다. 예술가는 이렇게 어리석은 것으로 합리성에 미쳐버린 사회를 심판한다."

백남준의 '굿'에 대한 높은 자부심

백남준은 전자샤먼이기에 그의 추모 굿에 TV가 빠질 수 없다. 사진에 삼성TV가 보인다. 백남준은 1987년 이전에는 소니를 쓰다가 그 이후에는 삼성을 썼다.
 백남준은 전자샤먼이기에 그의 추모 굿에 TV가 빠질 수 없다. 사진에 삼성TV가 보인다. 백남준은 1987년 이전에는 소니를 쓰다가 그 이후에는 삼성을 썼다.
ⓒ 최재영

관련사진보기


백남준은 이토록 한국의 무속문화를 아끼고 사랑했다. 시게코의 저서 <내 사랑 백남준>을 보면 백남준은 한국의 굿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 커 시게코와 의견충돌로 부부싸움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백남준 말하길 "일본의 선(禪)도 좋지만, 한국의 샤머니즘에 비하면 무척 따분하지"라고 하자, 시게코가 "무슨 소리예요, 둘 다 각자의 이론과 배경을 가진 철학인데 위아래가 어디 있어요"라고 반문한다. 그러나 백남준이 다시 "절대 아냐! 한국샤먼이 훨씬 창의적이지"라고 맞섰다.

그러면서 백남준은 또 이렇게 말했단다.

"한국의 무속은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한마디로 소통이야.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이지. 점과 점을 이으면 선이 되고 선과 선을 이으면 면이 되고 면은 오브제가 되고 결국 오브제가 세상이 되는 거지.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한국의 무속은 따지고 보면 세상의 시작이 아니겠어!"

시게코는 백남준이 굿을 종교로 받아들인 게 아니라 예술적 영감을 얻는 소재로 삼았다고 봤다. 그가 미친 듯 무대 위를 뛰어올라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부수고 샬럿과 함께 공연하는 순간을 볼 때면 백남준은 영락없이 신들린 무당의 모습 그대로였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백남준 안에 있는 '신기(神氣)'를 본 것이다.

결과적으로 백남준은 한국의 샤머니즘에서 천지인이 하나라는 우주 만물의 원리, 거기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생동, 신명 나는 삶의 축제의식을 예술과 접목한 셈이다. 백남준은 샤머니즘이 무에서 유를, 물질에서 정신을, 죽음에서 생명을 이끌어내는 동력이 있다고 봤다. 그렇기에 예술가로서의 무당을 그의 역할모델로 삼았다.

그런 면에서 백남준을 서양 철학자에 비유한다면, 디오니소스적 축제를 찬양한 '니체'에 가깝다. 백남준은 '돈의 지배'보다는 '축제의 회복'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다. 왜냐하면 예술은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남준은 마음보다 몸, 정신보다는 육체, 관념보다는 성애, 돈보다는 축제에 더 높은 가치를 둔다.

 '바우하우스의 무대실험-인간, 공간, 기계'전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에서 2월 27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에서 열리는 바우하우스전. 제7전시실에 설치한 바우하우스 작품들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에서 열리는 바우하우스전. 제7전시실에 설치한 바우하우스 작품들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백남준이 말하는 샤머니즘적 예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에서 열리는 '바우하우스의 무대실험-인간, 공간, 기계' 전시가 상호 긴밀한 관련성이 있어 여기에 같이 소개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3년간 준비해, 바우하우스 데사우 재단과 공동으로 기획한 바우하우스전을 오는 27일까지 연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 설립 이후, 1933년 폐교까지 다양한 무대실험예술과 퍼포먼스를 행했다. 이번 전시회는 당시 자료뿐만 아니라 바우하우스와 직·간접적인 영향을 보여주는 한국현대미술작가 6명의 작품을 함께 공개한다.

바우하우스의 최종목표는 모든 인류가 함께 손을 잡고 배움(건축, 디자인, 회화, 상상력, 예술, 패션, 가구, 타이포그래피, 염직 등)의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축제의 일상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교육방식이 놀이로 시작하여 놀이로 끝난다. 산업화 사회에서 잃어버린 축제의 회복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보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 창립자인 '발터 그로피우스'는 "디자인은 직업이 아니라 태도이다"라고 했다. 바우하우스 교수인 '라슬로 모호이너지'도 "우리가 교육하는 디자인에 대한 생각은 지적이거나 물질적인 일이 아니라 문명사회의 구성원에게 필요한 삶에 즐거움을 주는 재료가 되는 것뿐이다"라고 말했다.

'바우하우스(1919-1932)' 운동은 20세기 전반기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회화, 건축, 그래픽 디자인, 내부 디자인, 공업 디자인, 공예, 사진 특히 현대가구 등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후반기 미술사에는 백남준이 참여한 '플럭서스(Fluxus)' 운동이 바우하우스의 연장선상에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 벽에 설치된 전시안내문에는 많은 정보가 담겨 있는데 그 중 바우하우스(1919-1933)를 이끈 사람들 '나지, 클레, 칸딘스키' 등도 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 벽에 설치된 전시안내문에는 많은 정보가 담겨 있는데 그 중 바우하우스(1919-1933)를 이끈 사람들 '나지, 클레, 칸딘스키' 등도 보인다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바우하우스는 산업화 시대에 들어서면서, 여성의 사회활동이 많아짐에 따라 변해갔다. 라이프스타일을 포함한 많은 디자인이, 보다 편리하고 합리적인-여성중심적인 관점에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주목을 끄는 것은 교수 중에 전통적 학자보다는 유명 작가가 많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기존의 경직된 방식이 아니라 교육에 예술성을 가미했다. 교육의 목적이 아니라 과정을 중시한다는 점도 독특하다. 모든 수업을 춤으로 끝내는 방식도 이런 풍토에서 가능했다.

1924년, 바우하우스는 작센안할트주의 데사우로 이전한다. 이후 폐쇄되기 전까지 데사우 기간 동안 바우하우스에는 발터 그로피우스, 한네스 마이어 미스 반 데어 로에, 바실리 칸딘스키, 오스카 슐레머, 파울 클레, 리오넬 파이닝거, 라즐로 모홀리-나지 등의 유명한 교수가 포진되어 있었다. 이들은 바우하우스가 예술적인 측면에서 전 세계로부터 큰 관심을 끌게 하는 데 기여하였다.

나치정권의 압력으로 인해 바우하우스는 1932년 문을 닫게 되었고, 1933년 베를린에서 해체됐다. 바우하우스의 개념은 이후 전 세계로 펼쳐졌으며 지금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가구는 다 바우하우스식이다. 마이스터 하우스는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와 함께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된다.



태그:#백남준, #요셉 보이스, #바우하우스, #전자셔먼, #굿과 샤머니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