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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돈인가? 적어도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는 그렇다. 일찍이 이를 깨달은 벤자민 프랭클린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야말로 금쪽같은 경구를 남겼다.

"시간이 돈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자신의 노동으로 하루에 10실링을 벌 수 있는 사람이 반나절 동안 외출하거나 빈둥거린다면, 비록 그가 기분전환을 하거나 빈둥거리면서 6펜스만 지출했더라도, 그 비용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 그는 실제로는 그 밖에도 5실링을 지출했거나 날려버린 것이다."
- <타임워치, 시간의 사회적 분석>(바바라 아담 지음, 일신사)에서 재인용

그렇다. 시간은 금이고 돈이다. 따라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돈을 허비하는 것이며, 우리는 악착같이 시간을 절약하며 근면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쉬는 것도 노는 것도 사치이고 낭비일 뿐이다.

추운 날 눈보라를 맞으며 먹을 것을 구걸하러 다니는 베짱이의 처참한 모습은 볕 좋은 여름날을 놀며 난 게으름과 나태함에 대한 응당한 결말인 것이다. 가득 찬 곳간 옆에서 따뜻한 겨울을 나는 것은 여름 내내 쉬지 않고 땀 흘리며 일한 개미들에게나 허락되는 영광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쉬지 않고 일해야 한다. 나태를 경계하고, 근면 성실을 가슴에 아로새겨야 한다.

자본주의의 시간경제... 시간은 돈이다

1975년 캐나다 토론토 메이데이 집회 때 쓰인 페미니즘 진영의 포스터. 1970년대 미국 등지에서는 여성들의 가사·돌봄노동의 사회적 가치를 주장하고자 국가를 대상으로 '가사노동 임금지불(Wages for Housework)'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75년 캐나다 토론토 메이데이 집회 때 쓰인 페미니즘 진영의 포스터. 1970년대 미국 등지에서는 여성들의 가사·돌봄노동의 사회적 가치를 주장하고자 국가를 대상으로 '가사노동 임금지불(Wages for Housework)'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 maydayroom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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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돈'이라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언명은 자본주의적 시간관념의 정수를 보여준다. 서구에서 자본주의 경제가 성립하면서부터, 시간은 자연의 리듬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시계시간으로 합리화되고 교환가치를 갖는 상품으로 재조직되었다.

노동자의 시간은 노동자에게는 임금과 교환될 자원이, 자본가에게는 이윤의 원천이 될 신비의 생산요소가 되었다. 그러하기에 이제 노동자의 시간은 관리되고 규율되어야만 한다. 최대의 임금과 교환되고 최대의 이윤을 산출해내기 위해서 말이다.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는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윤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게으름과 나태함은 죽음의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죄악으로 여겨진다. 쉼 없이 일하는 개미의 부지런함만이 새로운 사회의 노동대중의 미덕으로 칭송된다. 노동자들에 대한, 노동시간에 대한 새로운 시간규율이 탄생한 것이다.

숨겨진 노동시간, 경제적 시간의 그림자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라고 모든 시간이 돈인 것은 아니다. 인간의 모든 관계와 모든 행위가 합리화된 시계시간의 지배를 받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데 투여되는 어머니의 노고는 시장에서 임금으로 그 대가가 지불되는 노동이 아니다.

또한 시계시간의 개념에 따라 양적으로 측정되고, 축적되고, 관리·통제될 수 있는 성질의 노동도 아니다. 젖먹이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의 노동이 언제 시작되고 언제 끝나야 하는지 어떻게 정할 수 있을까? 언제 수유를 하고, 언제 목욕을 시키며, 얼마나 안고 달래줄지 어떻게 계획하고 통제할 수 있을까? 매일매일 다른 시간에, 다른 형태로, 다른 질감으로 이루어지는 어머니의 노동을 어떻게 양화할 수 있을까?

그러하기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의 노동은 상품화되고 합리화된 시간경제의 외부에서 구성된다. 이른바 '그림자 노동'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중요한 문제는, 자본주의 시간경제라는 근대의 지배적인 시간개념이 가사와 육아 같은 일은 노동이 아닌 것처럼 '비가시화'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돈'이라 주장하는 사회에서, 그리고 여러 성격의 시간들을 모두 합리화된 시계시간의 틀로 포획하려는 사회에서, 임금노동 외의 다양한 삶의 시간들은 그렇게 가려지고 결국 가치 없는 것으로 왜곡되고 폄하된다.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여성들의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은 특히나 모든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여 측정하려는 근대의 시간 의식 하에서 쉽게 무시되고 가치 절하된다. 하루 종일 쓸고 닦고 먹이고 입히고 보살피기 위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여성들의 노동은 좋게 봐줘야 '당연한 아내 노릇', '당연한 엄마 노릇'으로 여겨질 뿐이다.

더 나아가 전업주부를 '집에서 노는 여자'로 바라보는 비하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는 남자가 바깥에서 힘들게 돈 버는 동안 여자들이란 '집에서 노는' 베짱이와 같은 존재로 치부하는 시선이 짙게 깔려있다.

자본주의 경제가 사실상 여성들의 무급 재생산 노동을 바탕으로 유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노동을 '당연한 일'로 왜곡하고 '노는 일'로 평가절하하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왜곡과 평가절하는 여성의 재생산 노동을 착취하고 그로부터 이득을 취하려는 자본주의 경제논리와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적 논리의 결속 하에서 적극적으로 만들어지고 유포된다.

그림자가 된 시간과 삶... '집에서 애보고 노는 여자'?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가정에서의 그림자노동, 전업주부의 가려진 가치 때문에 고심하는 여성들의 호소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초기 육아기에 있는 주부들이 많이 이용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어머니 노릇과 관련한 고민이 종종 올라온다.

"전업맘인데 이유식 시켜 먹는 거에 죄책감 느껴요."
"전업맘인데 아이 어린이집 보내는 거 너무 이기적인가요?"
"전업맘들 아이랑 어떻게 놀아주나요?"
"남편 벌어오는 돈 쓰기 미안해요."
"집에 있으면서 애한테 그거밖에 못하냐고 해요."

전업주부니 이유식은 당연히 매끼 따끈따끈하게 새로 만들어 먹여야 하고, 어린이집 종일반은 보낼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하며, 하루 종일 아이와 놀아주며 발달을 위해 다양한 자극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강도 높은 어머니 노릇의 압력 아래에서 끊임없이 돌봄노동을 수행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들이 '집에서 놀면서 남편 벌어오는 돈만 쓴다'는 사회적 시선을 경험한다.

자본주의 시간경제의 그림자에 가려져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집에서 애보고 노는 여자'라는 왜곡된 낙인 하에 노고를 부정당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존재 의미마저 폄훼 당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회적 고정관념에 전방위로 노출되다 보니 여성들 스스로도 인식이 왜곡되곤 한다. 가정에서의 그림자 노동에 대한 아래의 인터뷰는 그러한 사례를 보여준다.

"내 콤플렉스는 경제적 의존성, 뭐 하나는 해야 하니까 애를 보고, 경제적으로는 남편이랑 시부모님에게 의존하고... 직업란에 전업주부라고 쓸 때가 제일 싫어요. 항목에 있는 것도 싫어. 실직자랑 똑같아. 사회적 시선도 마찬가지고. 내가 안 그렇게 생각하면 그만인데, 그렇게 안 돼요."  - <엄마의 탄생>(김보성 외 지음, 오월의 봄) 중 이수현씨의 인터뷰

인터뷰에 참여한 여성은 자신을 '실직자'에 빗대어 표현했다. 그리고 자신의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뭐 하나는 해야 하니까' 하는 일로 낮추어 묘사했다. 임노동에 종사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전업주부를 비생산적인 존재로 치부하고 깎아내리는 사회적 시선을 그대로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다.

시장에서 화폐로 교환되는 노동만이-이를 위해서는 시간의 합리화가 선행되어야 한다-가치 있는 노동이라는 자본주의적인 시간개념의 폐단을 보여준다. 임금을 벌어들이지 않는 가정주부의 노동이나 실업자의 삶은 무가치한 것이 된다. 이처럼 자본주의 시간경제는 그림자 시간을 양산하고, 가려진 시간 속에서 행해지는 다양한 노고와 가치를 절하한다. 

이는 비단 어머니의 노동과 같은 여성의 시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자라고 성장하는 시간, 교육받는 시간, 직장에서 은퇴한 이후의 시간 등 임금으로 직접 교환되지 않는 시간은 모두 그림자 시간이 된다.

아동기, 청소년기는 임노동을 준비하는 기간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며, 은퇴 이후의 노년기는 생산적 삶의 시기를 지난 잔여적 생으로 여길 뿐이다. 자기만족과 자아실현을 위한 시간, 타인과 사회에 봉사하는 시간 역시 화폐와는 교환하지 않으므로 이 시장경제 안에서 의미 그대로의 평가를 받을 수 없다.

대안적 시간 기획을 위하여

자본주의적인 시간경제의 논리에 포획되어 가려진 시간들을 재조명해야 한다. 왜곡되고 평가 절하된 그 시간들의 가치를 복원할 필요성이 있다. '시간을 돈'으로 간주하는 자본주의적 합리성, 오직 그 잣대로만 시간을 평가한다면 우리 삶을 채우는 수많은 노고가 그림자처럼 뒤로 밀려난다. 또한 그 노고들이 창출하는 다양한 가치는 왜곡되고 폄하되고 만다. 그것이 숨겨진 노동시간을 착취하고, 다양한 삶의 형식(방식)을 부정하는 기제로 작동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대안적인 시간기획은 시간가치와 노동의 다양성에 대한 인정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다양한 노동, 다양한 삶의 가치들에 대한 긍정, 여기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보성 시민기자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노동시간센터(준)에서 활동하는 연구자입니다. 또한 이 기사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일터>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자본주의, #재생산노동, #페미니즘, #노동시간 , #엄마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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