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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피시로드, 흥남에서 쿄토까지>의 표지.
 <한일 피시로드, 흥남에서 쿄토까지>의 표지.
ⓒ 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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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후쿠시마 사태를 기점으로 절반 이하로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많은 양의 어류를 수입하고 있다. 러시아로부터 수입하는 명태도 연간 20만 톤에 달한다. 명태는 한국 수산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원이지만, 2001년 이후로 국내 명태 어획량이 연간 1천 톤에 못 미칠 정도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일본은 한국에서 다랑어와 넙치, 붕장어 등 매년 수 천 톤에 이르는 생선을 수입해간다. 한국에서는 흰 살 생선회를 선호하는 반면, 일본에서는 붉은 살 생선회가 압도적으로 인기가 높은 것이 수출의 배경이다. 넙치는 연간 4천 톤의 물량이 일본으로 수출된다. 또 일본은 바지락 소비량 가운데 60퍼센트 정도를 한국산에 의존하고 있다.

이렇듯 한국과 일본, 동해를 사이에 두고 가까이 인접한 두 나라 사이에서는 수산업의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교류의 역사는 과연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일본인 저널리스트가 방대한 자료수집과 취재를 통해 만든 책 <한일 피시로드, 흥남에서 쿄토까지>는 저자의 이런 물음에서 시작된 결과물이다.

부산 '꼼장어'를 통해 짚어본 한일 생선 교류의 역사

저자인 다케쿠니 도모야쓰는 1980년대 후반에 부산을 방문하여 '꼼장어(먹장어)' 구이를 먹은 일화를 떠올리는 것으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민주화 이후 한국의 정세 변화로 일본인 관광객이 증가한 상황에서, 우연히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 자갈치시장과 노점을 들르며 먹장어 맛을 보게 된 것이다. 본문은 친근한 소재를 발판 삼아 먹장어 요리의 기원을 찾아가는데, 1909년에 기술된 <한국수산지>에서 뜻밖의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

붕장어는 연안에서 널리 나지만 남해에 특히 많다. 이 물고기는 본방인(조선인)의 기호에 맞지 않기 때문에 일부러 이것을 어획하지 않고 종사하는 사람은 일본인뿐이다. 일본인이라고 해도 대부분은 히로시마, 가가와, 오카야마 등지에서 고기잡이하러 오는 업자가 늦가을 무렵에 잡으며, 전업자는 매우 적다.(본문 69쪽 중에서)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국내에선 장어류를 일반적인 식용으로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1893년 <조선통어사정>과 1909년 <한국수산지> 등 다른 옛 문헌을 탐색한 결과를 종합해도, 먹장어는 당시 조선에서 식재료로 거의 쓰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먹장어잡이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저자가 발견한 자료에 따르면,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 관할 경상남도 수산시험장에서 '붕장어 통조림에 관한 시험'과 '정어리 통조림 시험' 등 실용적인 어류 이용에 대한 연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1936년도에 발표된 연구자료 '경상남도 수산시험장 쇼와 11년도 수산시험 보고'라는 이름의 문서에는 "최근 부산부 또는 울산군 부근에서 먹기 시작해서 하급 음식점에서는 어디에서나 이것을 제공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먹장어에 관한 첫 문헌자료가 1930년대 중반에 기록된 것으로 발견된 것이다.

또한 1944년 자료에는 "피혁이 이용되기에 이르러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에 1942년부터 각지에서 이에 종사하는 사람 수가 늘어났다"고 쓴 기록도 있다. 이를 토대로 저자는 '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먹장어 가죽 이용이 급격히 늘어났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더불어 같은 시기에 식량을 비롯한 물자가 부족했기에 일본에 의해서도 중요한 자원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고도 전한다.

현장 답사에서 문헌 조사, 역사적 배경까지 담았다

부산 자갈치시장의 '꼼장어' 골목
 부산 자갈치시장의 '꼼장어'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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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피시로드, 흥남에서 쿄토까지>의 흥미로운 점은, 단순히 한 가지 방식의 자료수집으로 분량을 채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부산항과 자갈치시장, 통영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여러 지역을 답사하면서 어업종사자 등 다양한 직종의 사람을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 수산물을 실은 트럭 운전수를 만나서는 "폐사를 막기 위해 트럭 운전석에 달린 각종 계기판을 주시하면서 운전해야 한다"는 정보를 적었다.

한국과 일본의 오래된 문헌자료를 찾아서 인용한 부분도 많다. 어류와 관련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일제강점기의 보고서가 자주 눈에 띈다. 특히 한일 어류 연구에 있어서 개척자로 불리는 두 인물, '정문기(1898~1995)' 와 '우치다 게이타로(1896~1982)'를 조사한 부분이 인상깊다.

정문기는 일본에서 유학하며 도쿄대학 농학부를 졸업, 조선총독부 수산과에서 근무한 학자였고, 우치다는 같은 학교와 학과를 먼저 졸업한 7년 선배다. 정문기는 그의 저서인 <한국어도보>를 통해 한국 어류의 정보를 집대성한 업적으로 유명한데, 그것이 일제강점기 시절 우치다 게이타로가 남기고 간 자료를 상당 부분 도용 내지 표절한 혐의를 받았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저자가 이 사건을 언급하는 방향인데, 저자 다케쿠니는 일본 학자의 연구결과를 가로챈 정문기 개인을 비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던 조선인 연구자의 수를 지적하고, 일본의 패전으로 관련 분야 연구진들이 갑작스럽게 철수하게 된 배경을 언급한다.

제도적인 구조가 조선인 연구자와 학생들 앞에 '벽'이 되어 가로막고 있었다. (중략) 여기서 관점을 달리해서 그 문제를 다시 살펴본다면 식민지 체제가 남긴 '후유증'을 껴안은 해방 뒤의 제도적 구조 안에서 그 중압감을 견디면서 정씨는 '기대받는 역할'을 때로는 과도할 정도로 수행했는지도 모르고, 한국 사회 측에서도 그 구조 때문에 그를 '자유롭게' 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어쨌거나 정문기가 지닌 '식민지성의 잔재' 문제를 모조리 정씨 개인 문제로 해소할 수는 없다.(본문 242~243쪽 중에서)

"명태야, 어느 바다라도 좋으니 길이길이 살아남아다오"

1950년대 명태 주낙잡이 광경(<옛 사진으로 엮은 속초의 발자취> 속초문화원, 2001)
 1950년대 명태 주낙잡이 광경(<옛 사진으로 엮은 속초의 발자취> 속초문화원,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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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피시로드, 흥남에서 쿄토까지>는 한일 양국의 생선 교류 역사를 다루면서, 통계 등의 수치와 사실적 관계를 서술하는 것 이외의 재미도 담았다. 저자 본인이 직접 자갈치 시장에서 '꼼장어' 구이를 먹은 경험담, 어선에 올라타서 출렁이는 파도를 느낀 소감도 솔직하게 적었다.

그리고 폭넓은 이해를 위해서 한국의 역사적 배경도 설명하는데, 최근 개봉한 영화 <국제시장>에서도 소재로 쓰인 '흥남부두 철수'부터 시작하여 한국전쟁과 부산 국제시장에 도착한 피난민의 삶도 쓰여 있다. 이는 격동기의 한국, 부산에서 먹장어 구이가 식재료로 널리 보급된 사연으로 이어진다.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한국과 일본의 어업 역사와 맞물리면서 흥미를 더한다.

명태의 조업 방식이나 명태가 제사상에 오르는 음식이 된 이유도 설명한다. 이사하거나 차를 새로 구입했을 때 돼지고기와 말린 생선을 놓고 '액땜을 기원하는' 풍습의 이유를 적은 부분에서는, 일본인의 시선으로 한국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실향민 2세를 인터뷰하면서 남북통일에 대한 그의 생각도 적었다.

한국 사람들은 앞으로도 명태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명태야, 어느 바다라도 좋으니 반드시 길이길이 살아남아다오." 황태 해장국의 따뜻함이 더욱 깊이 느껴졌다.(본문 193쪽 중에서)

무엇보다도 멋진 태도는, 한일 양국의 이해관계를 넘어서 바다의 풍부한 자원이 복원되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이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일본의 식민지배로 한국이 근대화 되었다'는 '근대화론'과 이에 맞선 '식민지 수탈론'을 모두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동해에서 명태가 사라진 것은 한국과 일본이 전쟁 이후로 가속화한 '자본주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의 결과물이고, 결국 '개발논리'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치밀한 어류 연구도 식민지 개발을 위한 것일 뿐이었고, 1970년대 고도성장을 목표로 한 한국 정부에 의해 어획량이 지나치게 늘어난 것이 바다자원 고갈을 부추겼다고 지적한다.

국가주의적 사고를 넘은 저자의 성찰은 날카로우면서도 묵직하다. 우리 밥상에 오르는 생선들을 앞으로도 오래 맛보기 위해서는, 그의 말처럼 '개발논리'에 대한 반성이 한국에서도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국제여객 부두에서 한일 운전사가 넙치를 바꿔 싣고 있다. 왼쪽이 한국 활어차, 오른쪽이 일본 활어차.
 국제여객 부두에서 한일 운전사가 넙치를 바꿔 싣고 있다. 왼쪽이 한국 활어차, 오른쪽이 일본 활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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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한일 피시로드, 흥남에서 쿄토까지>(다케쿠니 도모야쓰 씀/ 오근영 옮김/ 따비/ 2014.12./ 1만8천 원)



한일 피시로드, 흥남에서 교토까지 - 일본 저널리스트가 탐구한 한일 생선 교류의 역사

다케쿠니 도모야스 지음, 오근영 옮김, 따비(2014)


태그:#한일 피시로드, 흥남에서 쿄토까지, #수산업, #부산 꼼장어,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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