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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한국사회를 드러내는 열쇳말 가운데 하나다. 하다못해 인터넷 댓글만 살펴보더라도, 분노의 언어가 온통 눈을 찌른다. 여기에는 진보와 보수도 따로 없다.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 성별과 세대 같은 세상의 모든 구분이 무의미하다. 다만 분노가 향하는 방향이 다를 뿐이다.

예컨대 해고자 복직을 위해 한겨울 길바닥으로 '오체투지'에 나선 쌍용차 노동자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분노를 터트린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그만해라, 다 망하자는 거냐"며 노동자를 향해 날을 세우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뒤쪽의 분노가 한국사회를 '지금, 이곳'에 옭아매고자 한다면, 앞쪽의 분노는 세상의 진보를 바란다. 세월호 참사에서 무능한 국가와 형편없는 시스템을 만들어온 우리들 스스로를 향한 분노, 대기업이나 재벌 3세의 '갑질'을 향한 분노, 노동자가 마치 물건처럼 다뤄지는 현실을 향한 분노도 바로 앞쪽의 분노와 맞닿아 있다.

하지만 분노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세상을 바꾸는데 분노가 첫걸음이 될 수는 있어도, 그것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사회적 갈등을 부추길 뿐이다. 또 분노가 욕지거리 댓글 한 문장이나 '좋아요' '리트윗'으로 마무리된다면, 일시적인 감정소모로 그칠 수밖에 없다.

한국사회에서는 모든 개개인조차 '신자유주의화'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는 <비굴의 시대>(한겨레출판 펴냄)에서 한국사회를 "사회뿐만 아니라 개개인이 모두 신자유주의화"(7쪽)되었다고 꼬집는다. 책은 블로그 '박노자 글방'에 2009년 이후 올라온 짧은 글 일흔 여덟 꼭지를 엮은 결과물인데, 한결같이 사회주의를 이야기해왔던 박노자의 시선에 서슬이 퍼렇다.

우리의 분노가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면, 대개는 '지금의 한국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란 판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박노자는 "사회주의자 시각에서 보면 대한민국의 평균적 국민이 생각하는 사회적 정의란 억울하고 우스운 것"(44쪽)이라고 말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사건·사고에만 매몰되었을 뿐, 그릇된 사회구조를 어떻게 바꿀지에는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수많은 노동자가 단지 '살아남기 위해' 삶을 내던져가며 투쟁해야 한다. 겨울 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25m 전광판 위로 올라가야 했던 씨엔엠 비정규직 노동자부터 부당한 해고에 저항하며 10년을 싸운 코오롱 해고노동자, 이제 곧 3000일에 다다르는 콜트 콜텍 노동자의 싸움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는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려왔고, 지금도 거리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분노는 노동자를 쉬이 내팽개치는 각각의 기업주나, 노동자에게 폭력을 일삼는 용역깡패 따위를 넘어서 그들의 횡포가 가능토록 만든 '시스템'을 향해야 옳다. 공허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박노자는 1987년 파업 대투쟁을 통해 "시스템을 부분적으로 수정하는 것이라도 쟁취"(85쪽)해냈던 일을 상기시킨다. 어렵다고 포기하면 "우리의 무기력도 사회적 타살의 원인"(85쪽)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요즈음 비정규직 규모를 크게 늘리는 '장그래 양산법'을 만들겠다고 나선 정부에게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하면 '장그래 살리기법'을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분노까지 닿아야 한다. 개개인이 직접 법안을 만들고 통과시킬 수는 없다. 그렇지만 입법운동에 뛰어드는 단체에게 한 달에 만 원씩이라도 후원은 할 수 있다. 작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모여야 큰 변화가 만들어지는 법이다. 그래야만 "한국형 자본주의의 토양에서 부득이하게 일어나게 되어 있는 '사회적 대량 타살'의 전형"(82쪽)을 무너트리는 것도 가능해진다.

우리가 '어떻게 분노해야 하는가?'를 되돌아봐야

"이 시대에는 각자 '나 홀로 작은 자본가'가 되어 몸값을 높여 노동 시장에 팔거나 상호 경쟁에 몰두해야 한다. 이렇게 원자화된 개개인에게 연대 투쟁은 그저 귀찮은 일일 따름이다. 세상이 너무 한심해 보이면 인터넷상에서 비판적 댓글 한두 개 달고 만다. 그 이상의 투쟁은 성공을 위한 경쟁에 바쳐야 할 내 자원을 낭비하는 것이다."(본문 274~275쪽)

분노 방향에 이어, 방식도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비굴의 시대> 책머리에서부터 꼬집혔던 '개개인의 신자유화'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판적 댓글을 달고,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기사를 퍼나르는 일이 몽땅 쓸모없지는 않다. 때때로 사회적 관심이 모여지고,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손가락'으로 만들어지는 연대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박노자는 "우리에게 가장 큰 적은 연대의 태부족과 망각"(109쪽)임을 상기시키며, 희망버스가 보여줬던 역사적 의미에 주목한다. 각자가 고단한 일상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때로는 직접 움직여야 "연대와 만남 속에 생명의 힘"(124쪽)도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물론 모든 사람이 혁명 투사나, 활동가로서 살아갈 수는 없다. 다만 박노자는 "아픈 중생을 모두 구원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의 고통을 계속 직시"(373쪽)하자고 강조한다. 그 과정에서 '개개인의 신자유화'를 무력화시키고, 각자 나름의 "중생구원의 길"(373쪽)을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강조컨대 우리의 분노가 각자의 일상에서 나름의 변화를 만들고, 또 그런 변화가 쌓이고 쌓이면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최근 한 프랜차이즈 카페 전문점의 캠페인이 화제가 됐다. 커피를 주문할 때, 노동자에게 살가운 인사와 함께 존댓말을 사용하면 값을 깎아준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사회의 비참한 노동현실에 분노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만큼 일상에서 스치는 노동에조차 몰지각한 사람 역시 많았음을 보여준다.

"단순히 남들을 자신만큼 챙기면서 사는 것도 이 각자도생의 시대에는 '작은 반란'이다. 그러한 작은 반란이 모여 결국 하나의 큰 불이 지펴질 것이다." (본문 374쪽)

<비굴의 시대> 앞부분에서 박노자는 커다란 투쟁의 이야기를 주로 한다. 사회주의자로서 그가 소망하는 혁명의 불길이 느껴진다. 하지만 <비굴의 시대>를 끝맺음하며, 박노자는 앞과는 조금 다른 결을 보여준다. 분노하지 않는 이보다는 분노하는 이가 옳고, 단순히 분노하는 이보다는 일상에서 작은 연대를 실천하는 이가 더 옳다고 말이다. 어쩌면 그 일상의 '작은 반란'이 우리에게 더 필요한 혁명이 아닌가 싶다. 그때서야 한국사회도 '비굴의 시대'를 넘어설 수 있을 터다.

덧붙이는 글 | <비굴의 시대> / 박노자 씀 / 한겨레출판 펴냄 / 2014년 12월 / 1만 7천원



비굴의 시대 - 침몰하는 대한민국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박노자 지음, 한겨레출판(2014)


태그:#박노자, #<비굴의 시대>, #분노,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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