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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째날. (2014년 11월 10일)

5일 간의 답사를 마치고 귀국하는 날이다. 첫 날을 제외하고는 귀국하는 오늘까지 4일 내내 청명한 날씨를 보여주어서 선현들의 핏빛어린 항일투쟁지역을 답사하는 것이 죄송스러울 정도였다.

귀국하면서 촬영한 백두산 천지 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하여 남북관계가 이렇게 밝아질 것이라고 크게 기대하다.
▲ 비행기에서 본 천지 귀국하면서 촬영한 백두산 천지 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하여 남북관계가 이렇게 밝아질 것이라고 크게 기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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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에서 본 천지와 주변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 비행기에서 본 천지장관 비행기에서 본 천지와 주변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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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해서 보니 민족문제연구소 등 광주시민사회단체가 친일부역자인 만주군 출신 김백일로 이름 딴 지명을 철회하는 운동을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부터 거리, 동상, 공원 등 상당수에 백일로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를 포함한 광주시민단체가 독립군 토벌을 만주군 출신 김백일의 이름을 이용한 지명 철회를 요구하면서 집회를 하고 있다.  뉴시스인용
▲ 친일파 김백일 현충시설 지정 철회를 요구하는 집회 민족문제연구소를 포함한 광주시민단체가 독립군 토벌을 만주군 출신 김백일의 이름을 이용한 지명 철회를 요구하면서 집회를 하고 있다. 뉴시스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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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과 재산, 가족 등을 희생하고 조국의 자주독립을 항일 투쟁을 한 다수의 선현들이 차디찬 만주벌판에서 생을 마감한 반면, 민족과 민중의 이익에 복무하기 보다는 오히려 민족과 민중을 팔아서 자신과 가족의 안일과 번영을 친일부역자들이 대한민국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국립현충원에는 친일부역자가 독립운동가로 둔갑하여 현충원에 아직도 묻혀 있다. 독립운동가들은 여전히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거나 시신도  수습되지 못한 실정이다.
▲ 국립현충원 조감도 국립현충원에는 친일부역자가 독립운동가로 둔갑하여 현충원에 아직도 묻혀 있다. 독립운동가들은 여전히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거나 시신도 수습되지 못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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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친일 부역자에 대한 죄과를 물어야 함에도 미국의 세계 패권 전략으로 대한민국은 일본 앞잡이을 이용하여 독립운동세력을 궤멸시켰다. 일제잔재에 대한 척결이 되지 않은 상태이기에 대한민국은 민족정기는 사라지고 외세와 불의가 판을 쳐왔다.

오늘날에도 민족이나 국가나 민중같은 집단개념을 마치 폐기하면 개개인의 자유가 만개라도 하듯 파편화된 개인의 감성이나 오감으로 느끼는 몸자체를 찬미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활개를 치고 있다. 이는 인간의 이성을 해체시키어 개인의 해방을 가져오는 듯 말하고 있지만 실은 초국적(금융) 자본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복무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던 차 임종국 선생님이 부친의 친일부역을 고백하고 사재를 털어서 <민족문제연구소>를 만들었다. 친일부역자에 대한 처벌이 반민특위의 좌절로 사라진 지금 최소한 그 죄과는 기록해야 한다는 역사의식에 의해서 [친일인명사전3권]을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민족반역을 한 자들이 독립투사로 둔갑되어 추앙받는 현실을 고치려는 운동이 지속되어 왔다.

친일부역자에 대한 죄과를 적어 놓은 책이다.필자도 이 책자를 편찬하는데 필요한 기금마련과 도서관에 보급하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하려고 노력하였다.
▲ 친일인명사전3권 친일부역자에 대한 죄과를 적어 놓은 책이다.필자도 이 책자를 편찬하는데 필요한 기금마련과 도서관에 보급하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하려고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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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항일혁명열사릉을 보면서 민족과 민중의 이익을 위해 투쟁. 헌신한 열사들을 모시는 것은 당연하다. 북측 또한 이런 열사들을 모신 곳이 혁명열사릉과 애국열사릉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일제부역자들이 지금도 버젓이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있고, 조국 해방을 위해서 투쟁한 열사들은 공동묘지에 묻혀 있거나 그 시신도 수습하지 못하고 있으니 민족정기가 바로 서겠는가? 그런데 요즈음 반민족세력인 일베충이나 서북청년단이 준동하고 있어서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연길시는 국한문 혼용 표지판을 사용하면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 연길시 국한문 혼용 거리 표지판 연길시는 국한문 혼용 표지판을 사용하면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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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의 주인공인 김산이나 피바다, 꽃파는 처녀 등에서 보듯 일제 식민지 시절에 동포들이 노예같은 삶을 영위하고 있을 때 이를 해방하기 위해서 열사들이 얼마나 희생·헌신으로 투쟁하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앙드레 말로의 <인간조건>이나 <중국의 붉은 별>,<대장정>에서 보듯 중국의 독립운동세력의 단결과 분열에 따라 중국내 우리 독립운동세력 또한 영향을 받았지만, 항일자주독립에 대한 의지와 실천은 같았으리라.

이 두만강과 압록강은 수 많은 독립투사를 만주지방으로 건너게 하였으며,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이 강들을 도강하였다. 해방 후 중국내 해외동포가 귀국하느라 이 강들이 하얗게 뒤덮였다고 한다.
▲ 두만강의 전경 이 두만강과 압록강은 수 많은 독립투사를 만주지방으로 건너게 하였으며,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이 강들을 도강하였다. 해방 후 중국내 해외동포가 귀국하느라 이 강들이 하얗게 뒤덮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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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든 고향을 등지고 항일 독립 투쟁하러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간 열사들의 모습이 두만강 뗏목타기를 하면서 더욱 선연히 보였다. 이 열사들은 <독립군가>를 목청껏 부르면서 항일 자주독립투쟁을 하였으리라. 마치 프랑스 혁명시절 외세 연합군들에 맞서 자신과 가족 그리고 혁명이념을 사수하기 위해서 출전한 <라마르세예즈>과 같은 마음과 의지였으리라.

<독립군가>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동포들
건질 이 너와 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선현들의 항일 자주독립투쟁이 지금이라도 헛되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남북7천만. 해외동포 800만이 주체가 되어서 서로 하나되어 공생. 번영하는 찾아가는 길을 모색해야 되지 않을까?

조선족 이민사는 다음과 같다. 연변지역은 여덟게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연변 수도인 용길, 왕청현, 용정, 청산리 대첩에 빛나는 화용시, 안도현, 대조영 때 수도인 도나시 등이다.

연변대학의 교수도 이민사를 말해주었지만 40대 중반의 안내원도 거의 비슷하게 말해주었다. 안내원의 이야기로는 어릴 적 한족에게 고구려 뭉둥이이라 업신여기고 심지어는 쳐다 본다고 싸운 적도 있었단다. 조상의 고향은 수원인데 안내원의 고향은 연길이다. 그래서 우리말을 지키고 사용하고 있음을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왠지 가슴 한구석 쓰려오면서 울컥한 것이 올라왔다. 경계인으로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제1차 이주민은 1620~1977년까지인 명 말에서 청초인 시기이다. 이 때 쓰러져가는 명을 돕기 위해서 후금과 전쟁하기 위해서 간 군인들 중 1만여 명일 살다. 이후 정묘호란·병자호란 과정에서 포로들도 포함된다.

이때는 자신의 성도 사용하지 못했다. 박(朴)는 그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목(木)은 제외하고 복(卜)만 사용하였단다. 그래서 화북 복씨성은 이렇게 탄생되었다. 민족언어나 민속 등은 거의 소멸하고 단지 고구려 후손인 것만 자각하고 있다. 물론 소쿠리 등은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제2차 이주민은 1677~1885년까지이다. 이 시기는 생계수단으로 이주하였다. 조선땅에서 여러 차례 수재를 당하여 농민들의 관심사는 두만강을 잘 건너가는 것이었다. 간도라는 말은 두만강의 퇴적물이 쌓여서 모래톱이 생겨서 두만강이 갈라지는데 이 곳이 간도이다. 국경을 지키는 군인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이 간도에 갔다 왔다 하면서 자유로이 농사지으면서 오가게 되었다.

제3차 이주민은 1885~1905년이다. 이 시기는 청나라의 이민 실변 정책결과이다. 중국 내륙 북쪽을 개간하면 조선인들에게 황소도 주고 세금도 안내는 조건으로 70~80만 명 정도가 이주하였단다. 청나라의 누르하치는 백두산 인근에서 모친이 낳았기에 신성시하였다.

제4차 이주민은 1905~1931년이다. 이 시기는 조선의 식민지 시기로 피눈물에 의한 정치적 이주이다. 특히 1919년 3월 1일 운동 이후는 더욱 그러하였다. 1906년 용정에 헤이그 밀사 3인 중 한 사람인 이상설이 세운 서전서숙은 간도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이었고 서전서숙의 설립으로 연변 일대의 교육구국운동이 시작되었다.

연변에서도 서전서숙의 설립은 반일운동의 발단이었으며 서전서숙의 설립을 계기로 각지에서 사립학교설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후에 독립투사들이 건너오게 되었다. 독립운동 근거지는 대략 3년을 넘기지 못한단다. 반역자의 밀고로 인해서.

제5차 이주민은 1931~1945년 8월 15일 까지이다. 조선땅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대거 만주지역으로 옮기는 강제이주이다. 조선인들에게 넓은 만주 땅에서 옥수수를 기르고 유목을 할 수 있다는 유혹으로 연길이 아닌 흑룡성과 요녕성으로 이주시키다. 대략 220만 명이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해방일을 맞이하여 160만 명 정도가 고국인 땅으로 돌아오다. 연변 이주민은 다수가 북측 땅으로, 요녕성 등은 남쪽으로 귀국하였다. 건너가는 숫자가 많아서 두만강과 압록강이 하얗게 뒤덮을 정도였단다. 그 외 이주민은 자신이 개간한 땅이 아쉬워서 그대로 남았다.


태그:#친일부역자 김백일, #친일인명사전, #국립현충원조감도, #연길시국한문혼용표지판, #독립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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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에 몸담으면서 교사.교육활동은 현장단위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구조에서도 변혁이 되어야만 참교육에 이른다고 봅니다.그래서 짧은 소견을 대중적인 전자공간을 담보하고 있는 오마이뉴스를 통해 전달하고 합니다. 저서로 [자본론노트],[청소년을위한백두선생경제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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