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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체의 각 부위에 계급이 있다면 누가 우두머리일까. 뇌를 꼽고 싶은 이들이 많으리라. 독일의 촉망받는 신예 의학자인 기울리아 엔더스는 이 책에서 장(腸)이라고 주장한다. 장을 '제2의 뇌'라고까지 말하는 저자의 장 사랑은 남다르다.

이 분야(기자 주-장이 건강과 감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의학 분야)는 의학계에서 천대를 받았다. 그러나 장은 매우 독보적인 장기다. 장은 면역 체계의 3분의 2를 훈련시키고, 음식물로 에너지를 만들며, 20여 종 이상의 호르몬을 생산한다. ('여는 말'에서)

우울증이 뇌가 아닌 배에서 올 수 있다고?

<매력적인 장 여행>
 <매력적인 장 여행>
ⓒ 와이즈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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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이 책을 쓴 목적은 매우 실용적이다. 그간 학자들이 장에 대해 연구해 놓은 것들을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서 그 결과를 널리 알리는 게 첫 번째 목적이다. 두 번째는 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어떤 새로운 발견이 있는지, 그러한 지식으로 우리의 일상 생활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친절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이 책은 정확히 그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불안 장애나 우울증이 뇌가 아니라 배에서 올 수 있다는 내용은 최신 장 연구 결과에 따른 것이다.

자연 분만으로 태어난 아이들의 장이 건강한 이유를 설명한 대목에서는 우리나라의 출산 문화를 돌아보게 된다. 비만 환자들의 장 박테리아 생태계를 이해함으로써 나날이 늘어나는 뱃살과의 전투에서 자신감을 얻을 수도 있다.

생명의 핵심이라는 심장이나 뇌와 달리 장은 "기껏해야 배설이나 담당한다고 혹은 배 속에서 게으름을 피우다 가끔씩 방귀나 뀐다고 괄시"(17쪽) 받기 마련이다. 하지만 저자에게 장은 매력 덩어리다.

소장과 대장이 중심을 이루는 장은 신체에서 소화관을 구성한다. 저자는 알면 알수록 아름다운 신체 기관이 소화관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상찬하는 장의 매력 몇 가지를 소장과 대장을 중심으로 알아보자.

흔히 사람들은 똥이 장 전체에 퍼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대장의 끄트머리하고만 관련 있다. 그곳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아주 깨끗하고 냄새도 없다. 소장은 윤이 나고 촉촉하며 벨벳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분홍색 튜브 모양으로 돼 있다고 하니 무척 깔끔해 보일 것 같기는 하다.

소장은 구불구불 말려 있는 3~6미터 가량의 창자다. 소장은 섭취한 음식물을 최종적으로 잘게 쪼개는 일을 맡는다. 이를 위해 소장은 가능한 한 넓은 면적을 확보하려고 많은 주름을 만든다고 한다. 이들 주름에는 일종의 털인 융모들이 있고, 이들 융모에 또 미세한 융모가 달려 있다. 그런데 이들을 모두 펴면 소장의 총 길이는 무려 7킬로미터나 된다고 한다.

누구의 지시냐와 상관없이 소장은 오로지 한 가지 기본 규칙을 따른다. 쉬지 않고 앞으로 전진! 연동 반사작용이 이 일을 책임진다... 식이섬유가 풍부한 음식을 먹어야 소화가 활발히 이루어진다. 소화되어 흡수되지 않는 식이섬유가 소장 벽을 밀면 소장 벽은 반갑게 화답하며 식이섬유를 밀어낸다. 이런 소장 체조로 음식물은 쑥쑥 앞으로 이동한다. (93쪽)

신경만 가진 뱃속의 뇌, 장

소장은 음식물을 소화한 뒤 한 시간이면 청소를 시작한다. 저자는 여기에 '이동성 위장관 복합 운동'이라는 의학적 명칭과, '집안 살림'이라는 문학적 표현을 함께 쓴다.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는 위와 소장이 발원지인데, 이는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소화를 마치고 마침내 청소할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소리라고 한다.

장의 또 다른 주인공은 대장이다. 대장은 소장에서 흡수할 수 없는 것들을 처리한다. 소장에서 넘어온 음식물 찌꺼기를 약 16시간 동안 철저히 작업한다. 소장이 급하게 서두르느라 미처 흡수하지 못한 영양소들도 대장에서 흡수된다.

케이크가 입으로 들어가 똥이 되는 데 평균 하루가 걸린다. 빠르면 여덟 시간 만에도 가능하고, 느리면 사흘 반나절이 걸리기도 한다. 케이크의 일부가 다른 것들과 섞여 12시간 혹은 느리면 42시간 뒤에 대장 휴게소를 떠난다. 밀도가 적당하고 특별한 병이 없다면, 약간 더 늦어져도 걱정할 것 없다. 네덜란드의 한 연구에 따르면, '하루 한 번 혹은 약간 더 드물게' 변기에 앉는 사람 혹은 이따금씩 변비 경향이 있는 사람은 직장에 병이 걸릴 위험이 거의 없다. (97쪽)

저자에 따르면 장에 관한 최근 연구들은 사고의 전환을 이끌고 있다. 대신 그간 절대적인 자리에 있던 뇌의 지위는 의심을 받고 있다. 장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경이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신체기관에 비해 굉장히 다른 종류의 신경을 갖고 있다고 한다. 다양한 신경 전달 물질과 신경 절연 물질, 신경 회로망 부대도 있다. 이런 다양성은 뇌와 장기 말고는 없다. 그래서 장의 신경망은 '장뇌'로 불리기도 한다.

장에서 보낸 신호들은 그 이름도 생소한 뇌섬엽, 대뇌변연계, 전방전두피질, 편도체, 해마체, 전대상피질에 도달한다. 나는 이 영역이 담당하는 일을 대략적으로 자의식, 감정 처리, 도덕, 불안 감지, 의욕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얘길 들으면 신경과학자들은 아마 발끈하며 뒷목을 잡을 것이다. 장이 보내는 신호가 도덕을 담당하는 영역에 도달한다고 해서 장이 도덕적 사고를 조종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있다. (133~134쪽)

소장은 음식물을 소화한 후 한 시간 뒤 청소를 시작한다.
 소장은 음식물을 소화한 후 한 시간 뒤 청소를 시작한다.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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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존재하는 박테리아 95%, 무해하다

장에는 신경만 있는 게 아니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 몸 안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모든 미생물의 99퍼센트가 장에 산다. 세포 하나로 구성된 작은 생물인 박테리아가 그 주인공들이다. 한 사람의 장에 사는 미생물들의 총 무게는 2킬로그램 정도로, 그 수는 대략 100조에 이른다고 한다. 대변 1그램 안에 들어 있는 박테리아 수만도 지구에 사는 총 인구수보다 많다고 하니 정말 어마하다.

저자가 소개하는 장 박테리아들의 임무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모두 중요한 것들이다. 소화가 안 되는 음식물을 쪼개고, 에너지를 만들어 장을 돌본다. 비타민을 생산하거나 독이나 약을 분쇄하고, 면역 체계를 훈련시킨다. 심지어 혈액형을 결정하기도 한다. 장 박테리아의 변화는 비만, 영양실조, 신경질환, 우울증, 만성 장질환과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박테리아, 즉 미생물은 어떻게 장 속에 정착하는 걸까. 저자에 의하면 기본적으로 완전히 무균 상태인 태아가 이 세상에 나오는 순간부터 박테리아들은 우리 몸에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그 역동적인 순간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미생물이 태아의 피부와 내부 세계에 최초로 정착하기 시작한다. 대부분 엄마의 질과 장에 살던 미생물이다. 여기에 피부 균들이 추가되고, 경우에 따라 병원에 사는 미생물도 동참한다. 이것은 시작을 위한 최상의 혼합이다... 이런 박테리아들이 다음 세대로 번식하는 데 약 20분이 걸린다. 인간이 20년 넘게 걸려 하는 일을 박테리아들은 20분에 끝낸다. 미생물의 크기만큼이나 걸리는 시간도 짧다. 최초의 장 박테리아가 손자의 손자의 손자의 손자의 손자를 볼 때 아기는 이제 막 엄마의 품에 안겨 두 시간을 보냈을 뿐이다. (167~168쪽)

'제2의 뇌, 장에 관한 놀라운 지식 프로젝트'라는 부제에 걸맞게, 이 책에는 장에 얽힌 거의 모든 정보가 낱낱이 소개되고 있다. 우리 현대인의 일상 생활을 돌아보게 하는 대목도 아주 많다. 예를 들어보자.

더러움이나 감염에 대한 두려움으로 위생에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위생 표준이 높은 국가일수록 알레르기와 자가 면역질환이 많다. 소독을 많이 하는 가정일수록 식구들이 알레르기와 자가면역질환에 더 많이 걸린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박테리아 중에서 95% 이상은 우리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다고 한다. 위생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우리 자신을 해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장을 혹사하면서 사는 게 대다수 현대인의 모습이다. 폭식과 음주, 스트레스, 과로와 만성적인 수면 부족 등은 장에게 매우 좋지 않다. 그런데도 장은 우리의 두툼한 뱃살 뒤에서 묵묵히 자신들의 책무를 다한다. 장의 그런 '역동적인 침묵'에서 스스로를 사랑하고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법을 배워볼 만하다. 의인화한 장과 그 친구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을 동무 삼아서 말이다.

<매력적인 장 여행> (기울리아 엔더스 지음, 질 엔더스 그림, 배명자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 11. 7. / 294쪽 / 1만 4000원)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매력적인 장腸 여행 - 제2의 뇌, 장에 관한 놀라운 지식 프로젝트

기울리아 엔더스 지음, 배명자 옮김, 질 엔더스 삽화, 와이즈베리(2014)


태그:#<매력적인 장 여행>, #제2의 뇌, #장뇌, #소장과 대장, #박테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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