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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 비방의 일상적인 긴장이 유지되던 평탄했던(?) 남북관계에 오랜만에 변화의 가능성이 일고 있다. 북한의 권력서열 2위인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과 최룡해 국가체육지도위원장, 김양건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 등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최측근들이 인천을 깜짝 방문하여 2차 남북고위급 접촉에 합의하는 등 대화의 물꼬를 틀었기 때문이다. 인천아시안게임의 폐막식날인 지난 4일에 벌어진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

세상 일의 대부분은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이고, 행위주체의 의도가 개입된다. 그러면 북한 최고위급 방문 이전에 남북한 간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으로 지난달 24일 박근혜 대통령이 제69차 유엔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한 것이다. 기조연설을 통해 박 대통령은 국제사회의 다른 여러 현안들과 함께 북핵문제, 북한인권, DMZ '세계생태평화공원' 건설, 한반도통일 등 남북한관련 내용을 언급하였다. 이 내용들은 그동안 박근혜 정부가 지속적으로 표명해 온 것들이고 새로운 제안을 담은 것도 아니다. 따라서 아무도 이 연설이 남북한관계에 획기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에 대한 북한의 즉각적인 반응 역시 마찬가지였다. 북한은 의례 이전에 그러해 온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연설에 대해 비난하는 성명과 담화를 발표했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국방위원회는 "남북관계를 파국으로 몰아넣는 도발행위", "현대판 사대 매국노이자 역적"라고 박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을 전면적으로 비난하였고, 나아가 '특등대결광', '미친 개', '정신병자' 등의 자극적 용어를 동원하며 인신공격까지 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로써 남북한관계는 당분간 현재와 같은 긴장국면을 계속 이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북한의 최고위급 3명이 전격적으로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 참가를 명분으로 인천에 내려온 것이다. 무엇이 원인이 되어 이들의 한국행을 이끌었을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전문가와 언론에서는 여러 가지 추측을 하고 있지만, 꼭 집어 북한의 의도를 파악하기는 힘들다. 많은 덕담과 관계개선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떠난 그들의 발자국이 선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명분을 중시하는 북한에게 있어 10월 4일 방남은 어쩌면 노무현-김정일의 제2차 남북정상회담의 회고와 그때의 분위기를 다시 한 번 조성하고픈 바람을 담고 있었던 은유의 외연이었을 런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고 방문시점에 대한 의미 있는 분석도 존재하지 않는다.

계란으로 바위를 깬다?

과거 미국과 중국은 핑퐁외교를 통해 최종적으로 외교정상화를 이룬 바 있다. 그러나 이번 남북 간 돌발성 고위급 만남은 스포츠를 통한 남북관계 개선의 시발점이 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무엇보다도 미중의 경험과는 달리 사전에 남북 양측에 의해 잘 기획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면 도대체 그들은 왜 갑자기 남쪽으로 온 것일까? 서해의 NLL에서는 여전히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나돌고, 남북한의 공식적 채널을 통해서는 예의 각자의 주장만 내세우는 상황에서 무엇이 그들의 남행을 견인했을까를 면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미시적으로 이번 북한 최고위급 인사들의 방남의 원인을 추측하는 것은 말 그대로 추론의 영역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어떠한 논리적 추론에도 그들의 정확한 속내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볼 때, 북한이라는 나라는 경제발전을 위한 동력을 잃어감에 따라 내부적으로 통치의 견고함이 훼손되고 있다. 아무리 강고한 통치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지속되는 생산력의 정체는 체제의 견고함에 균열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국민들이 먹고살기가 힘들면 체제가 그것을 극복시켜 주던지, 아니면 다른 체제가 그것을 대체하는 것이 상식이다.

생산력의 증가가 없는 체제가 지속된 사례는 인류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 북한이라는 나라를 이러한 일반논리 속에 넣고 보면, 그들이 벌이는 좌충우돌의 행위들은 불리한 여건 속에서 체제를 유지하려는 노력에 다름 아니다. 이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생산력을 증가시켜야 하는 것이 당면과제로 인식된 것이다.

아무리 "계란에 사상을 씌워 바위를 깨뜨릴 수 있다"고 북한주민들에게 선전·교육을 하더라도 바위는 절대 깨어지지 않는다. 물리학의 일반적 법칙은 사상을 넘어 적용되기 때문이다. 북한의 특수성 외피를 벗기면 그 속에는 일반적인 정치체제의 속성들이 보이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랜 동맹국이자 후원국인 중국 시진핑 주석의 방한, 전시작전통제권의 재연기와 같은 한미연합전력의 불변, F-35와 사드(THAAD)의 한국 배치와 같은 군사적 압박, 북핵 불허 및 제재 지속, 북한인권에 대한 동시다발적 비판 등 한반도를 둘러싼 모든 상황은 경제발전을 도모해야 하는 북한에게 불리한 정황이다.

스스로 강성대국의 성취를 주장하지만, 북한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강성대국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으며, 대부분의 북한주민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결국 자신들에게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는데 있어 남북관계의 개선은 북한에게 숨통을 틔울 수 있는 핵심고리이다.

비록 핵무기라는 특수한 수단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도깨비방망이가 될 수 없다. 북한이 남북관계 및 국제관계라는 외부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끌 용도로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체제의 멸망을 전제조건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사용 불가능한' 무기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고 그 효용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핵무기 프로그램을 동결하거나 폐기하려는 진정성을 보이면 국제사회는 상응하는 조치를 하겠다고 거듭 약속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궁극적으로 북한은 핵과 연계한 대외정책을 통해 최대한 많은 성과를 얻어내는 정책을 구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북핵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피로감을 보이면서 북한의 선택폭은 좁아졌다. 이 문제는 이제 '온화한 무시'를 거쳐 '전략적 인내'라는 이름 속에서 말 그대로 무시당하고 있다.

북한, 핑퐁외교를 꿈꾸나?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돌파구를 찾기 위한 한 방안으로 남북관계 개선을 선택한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단지 2차 고위급회담의 합의를 위해 최고위급 3인방이 방남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남북관계 개선이 현 단계 북한외교정책의 목표는 아니다. 따라서 유화적 대남정책은 하나의 과정으로 추진되겠지만, 분명한 것은 남북관계의 개선을 통해 국제관계에서 고립된 상황을 타파하려는 노력을 할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견되는 상황이다.

따라서 이제 한국정부의 선택이 향후 남북관계 발전에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앞으로 여러 갈등적 상황과 결단이 필요하겠지만, 어렵게 조성된 대화국면을 어떻게 살려나가느냐에 따라 향후 3년의 남북관계 향방을 결정지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임기 말 정권과의 대화보다는 다음 정권과의 대화에 노력을 기울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앞으로 한국 정부는 북한이 왜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일까에 대한 미시적인 분석에 집착하기보다는 거시적인 차원에서 대화와 협력의 분위기를 이어나가는 자세가 중요하다. 동북아 지역패권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갈등, 중일의 영토분쟁, 한일 간의 과거사 문제 속에서 동북아는 새로운 질서를 향한 마지막 승부처로 나아가고 있다.

지정학적으로 한반도는 이러한 대결의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으며, 과거보다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정치경제적 자산을 가지고 있다. 북한의 기만적 대남전술이라는 좁은 시야를 벗어나 21세기의 동북아의 주도국가가 되기 위한 한국의 외교적 노력은 바깥이 아닌 한반도 내부에서 그 역량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신뢰프로세스와 드레스덴선언도 그 실천을 위한 첫 번째 시험지를 받은 느낌이다. 우리가 어떻게 답안지를 작성해 나가는 지에 따라 주변 관찰자들의 한반도 문제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고, 한반도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향타를 우리가 쥘 수 있게도 될 것이다. 무릇 기회는 자주 오지 않고, 첫 시험을 잘 치러야 나머지 시험에도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다. 어렵게 온 기회를 흘려보내지 않아야 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 되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이정우 교수는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연구교수입니다.

이 글은 코리아연구원 홈페이지(knsi.org)에도 함께 실립니다.



태그:#유엔총회 연설, #실세 3인방, #황병서, #신뢰프로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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