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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이후 한동안 미국 공보원에서 잡지가 나왔었다. 거기에서 보았던 만평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흐루시초프와 마오쩌둥, 그리고 아이젠하워가 같이 밥을 먹는 장면이었다.

마오쩌둥 발밑에 고기 뼈가 수북이 쌓였다. 흐루시초프 발밑은 아무것도 없이 말짱했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마오쩌둥의 발밑을 가리키며 웃었다.

"동무, 혼자 다 드셨구려."

그러자 중국 최고 지도자가 어깨를 뒤로 젖히며 대꾸했다.

"동무께서는 뼈도 안 남기고 드셨구려."

곧 망할 것 같았던 잡지

<뿌리깊은나무> 창간호 표지. 1976년 3월호로 창간하여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으나 1980년 7월에 정부가 강제로 폐간시켰다. 상업잡지로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한글 전용으로 만들어졌다. 이제는 한글 전용이 상업출판물과 신문, 잡지에서 예삿일이 되었으나 이 잡지가 나오기 전에는 국한문 혼용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졌다.
 <뿌리깊은나무> 창간호 표지. 1976년 3월호로 창간하여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으나 1980년 7월에 정부가 강제로 폐간시켰다. 상업잡지로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한글 전용으로 만들어졌다. 이제는 한글 전용이 상업출판물과 신문, 잡지에서 예삿일이 되었으나 이 잡지가 나오기 전에는 국한문 혼용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졌다.
ⓒ E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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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나무>는 1976년 3월호로 창간됐다. 창간호를 보자마자 이 책의 수명이 길지 않으리라고 점치는 이들이 많았다. 이유는 그 무렵 사람들이 잡지라면 으레 이래야 한다고 알고 있던 것들과 많은 것들이 어긋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잡지의 초대 편집장이었던 윤구병(변산공동체학교 대표)이 그때 이 잡지가 시장에서 얼마 못 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하던 '이유'들을 <특집! 한창기>(2008, 창비)에 정리해 놓았다. 한창기를 기려 사후 11년 만에 나온 이 책(http://omn.kr/awg)에는 필자를 포함해 58명의 글이 실려 있다. 이 책에 실린 이유는 자그마치 열여섯 가지나 되었다. 그중에는 제목이 길다는 것도 있고, 책값은 다른 잡지들과 같이 받으면서 책 두께가 형편없이 얇다는 것도 있다.

<뿌리깊은나무>의 수명을 걱정한 많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미 공보원 잡지'였다. 책 모양이 넓적하고 제호부터가 한글로 쓰였으며 표지에 그림 대신 사진이 실렸고 책 두께도 얇았다. '미 공보원 잡지'의 특색이 영판 그러했다. 나도 새로 나온 잡지 편집자의 한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같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나는 일찍부터 미 공보원의 간행물들에 익숙했다. 그것들은 어린 내가 관심 가지기에는 생소한 소재들을 다루었지만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한글 전용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한국 사람들은 성경책과 교과서만 빼고는, 책은 그게 잡지든 단행본이든 국한문 혼용을 당연하게 여겼다. 명색이 책이라면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잡지 <뿌리깊은나무>가 상업 잡지로서 단명할 것으로 점쳐졌던 가장 큰 약점은 '한글 전용'에 있었다. 신문이든 잡지든 성인을 대상으로 돈을 받고 파는 정기간행물 중에 한글만을 써서 만들어진 것은 대한민국 역사에 이 잡지가 처음이었다. 여성지들도 국한문 혼용으로 만들던 시대에 참으로 어리석은 만용으로 보였다.

1948년 10월 9일에 '한글 전용에 관한 법률'이 만들어졌고 거기에 '대한민국의 공문서는 한글로 쓴다'라고 돼 있었다. 그러나 이 법은 '당분간은 국한문을 혼용한다'는 단서 조항에 밀려 만든 지 30년이 다 되도록 아무 힘을 못 썼다. 날이 갈수록 국한문 혼용이라는 대세를 막을 것은 어디에도 없는 듯했다. 이런 판에 한글 전용을 내세우는 잡지가 나온 것이다.

한창기라는 좀 이해하기 힘든 사람

한국의 민속과 문화, 예술을 지극히 사랑했던 한창기는 한복을 즐겨 입되 전해오는 법대로 제대로 갖춰 입고서야 사람 앞에 나섰다. 그는 한글만이 아니라 민속, 음악, 미술, 생활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우리것 지키기에 온힘을 쏟았다.
 한국의 민속과 문화, 예술을 지극히 사랑했던 한창기는 한복을 즐겨 입되 전해오는 법대로 제대로 갖춰 입고서야 사람 앞에 나섰다. 그는 한글만이 아니라 민속, 음악, 미술, 생활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우리것 지키기에 온힘을 쏟았다.
ⓒ 강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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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광복 이듬해에 태어나 1950년대에 초등학교에 다닌 나는 내일 아침 눈을 뜨면 한자가 사라져 있을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여섯 해를 보냈다. 중학교에서도 같은 분위기가 이어졌고 고등학교 때도 그러했다. 나중에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다닌 학교에서는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인 최현배 선생(1894~1970)의 영향을 받은 교사들이 유달리 많아서 그런 분들의 가르침을 내가 많이 받은 셈이었다.

나는 1972년에 이어령 선생이 주간을 맡은 <문학사상>이라는 잡지에서 편집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해 10월에 나온 창간호부터 큰 반응을 얻었던 잡지였다. 잡지의 주제가 '문학'과 '사상'이었던 만큼 기사들 속에 이른바 진서가 많이 포함돼 있어 한자가 약한 내게 교정 작업의 어려움을 깨닫게 했다. 여기서 두 해 반을 보낸 다음 나는 <뿌리깊은나무> 창간을 준비하는 사람들 틈에 끼였다.

<뿌리깊은나무>의 발행인 한창기는 그때까지 나라 안의 출판계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나도 그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수입해서 파는 장사꾼으로나 알았지 출판인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한창기씨는 서울대 법대를 나온 사람이었다. 법대에 다닌 그가 어떻게 판사 같은 직업은 애당초 꿈도 꾸어 보지 않고 책장수로 나섰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그토록 한글 공부가 깊은지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언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영어로 사투리까지 구사하는' 그는 대화중에 더듬는 것도 웬만한 서양 사람보다 더 '영어식'으로 더듬었다. 중학교 때부터 한밤중에 단파 라디오로 '미국의 소리' 방송을 들으며 열심히 공부했다고 했다.

그런데 국어도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그만큼 달통한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우선 글을 참 잘 썼다. 우리말과 글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문장을 구사했다. 문법이나 어법에서도 국어학자들과 토론해서 밀리지 않을 만큼 궁구가 깊었다.

<뿌리깊은나무>가 그의 우리말에 대한 깊은 관심 위에서 출발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한글전용주의자는 아니었다. 한글학회 회원이고 토박이말을 사랑했지만 한국인의 언어생활이나 교육 현장에서 한문을 몰아내자는 주의는 아니었다. 예순을 간신히 넘기고 야속하게 세상을 떠난 그는 병이 깊어지기 전까지 '논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는 다만 '훈민정음'의 정신에 따라 백성들이 두루 쉽게 접할 수 있는 '공문서'를 만들고 싶어 했을 따름이다.

한글 창제 530년 만의 사건

<뿌리깊은나무>의 '도도한 기사식 광고'는 매우 차별화된 것이었다. 카피라이터 이만재씨는 '광고에 대한 종래의 관념과 상식을 뒤집는 발칙한 광고'에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한다.
 <뿌리깊은나무>의 '도도한 기사식 광고'는 매우 차별화된 것이었다. 카피라이터 이만재씨는 '광고에 대한 종래의 관념과 상식을 뒤집는 발칙한 광고'에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한다.
ⓒ EBS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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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나무>는 한글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읽을 수 있도록 만들자는 잡지였다. 누구든지 읽게 하려면 단순히 한글만으로 써서는 안 되고 보통 사람들이 쓰는 말과 말투로 써야 한다. 감히 말하건대 '어린 백성'이 제 뜻을 쉽게 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한글을 만들었다는 훈민정음 서문이 거짓이 아니라면 잡지 <뿌리깊은나무>는 한글 창제 530년 만에 처음으로 훈민정음의 정신을 제대로 실천해 나온 공공의 문서다.

<뿌리깊은나무>는 가로쓰기 잡지이기도 했다. 그때까지 상업 출판물은 잡지이거나 단행본이거나 모두 국한문 혼용에 세로쓰기의 전통을 잇고 있었다. 한창기는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의 이유를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찾았다. 자라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보는 책과 학교 밖에서 보는 책의 질서가 다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그 같은 이중 구조를 고치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그러면서 학교 밖의 질서를 학교 안의 질서에다 맞추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보았다. 그 시절 '한글 기계화'도 우리 언어생활에서 중요한 과제의 하나였는데 이를 위해서도 공문서의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자 실력이 모자라는 내게 <뿌리깊은나무>는 <문학사상>보다 분명히 일하기 편한 곳이었다. 한글로 쓰인 기사들만 만지니 머릿속이 복잡하지 않다. 한글은 배우기 쉽고 쓰기 편한 문자다. 그러나 그 한글만으로 책을 만드는 것은 꼭 쉽고 편한 일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1970년대 중반, 그 시절은 한글로 글을 쓰는 데 익숙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한문투의 문장, 일본어투가 밴 문장도 많았고, 무엇보다 어법이나 문법을 정확히 알고 글을 쓰는 필자가 적었다.

<뿌리깊은나무>에서는 모든 필자의 글을 편집자들이 비판적으로 읽고 어법에 맞게 고쳐서 싣는다는 원칙이 있었다. 이 잡지의 원고 청탁서에는 한글만으로 써 주십사 하는 부탁이 있었고, 써 주신 글에 '우리말 어법에 어긋난 부분이 있으면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고칠 수 있다'라는 말이 포함돼 있었다. '한글 전용'은 한자를 그냥 한글로 옮겨 써서 되는 일이 아니고 한글로만 써서 누구나 무슨 뜻인지 알아듣는 말로 쓰여야 하고, 그 문장이 한글 어법에 맞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그래서 '한글 전용'은 '글 손질'이라는 작업의 뒷받침이 따라야 한다.

한글 전용 잡지의 글을 다루는 태도

꼼꼼한 기록자였던 한창기가 생전에 쓰던 수첩들. EBS의 간판 프로그램인 '지식채널e'는 2012년 한글날에 '별종잡지'라는 제목으로 <뿌리깊은나무>와 한창기의 철학을 다뤘다.
 꼼꼼한 기록자였던 한창기가 생전에 쓰던 수첩들. EBS의 간판 프로그램인 '지식채널e'는 2012년 한글날에 '별종잡지'라는 제목으로 <뿌리깊은나무>와 한창기의 철학을 다뤘다.
ⓒ EBS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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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등장했을 때 했던 많은 사람들의 걱정과 달리 <뿌리깊은나무>는 금세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다달이 독자를 더하며 서점에서 가장 잘 팔리는 잡지가 되었다. 만일 한글 전용의 이 잡지가 한자를 한글로 변환하기만 한 글들로 채워졌다면 독자들에게 오히려 해득하기 어려운 글들의 무덤으로 비쳤을 것이다. 문장을 어법에 맞게 고치고 어려운 표현을 쉬운 표현으로 다듬었기 때문에 독자, 특히 젊은 독자들에게 쉽게 읽혔다.

이를테면 '사고 다발 지역'이라고 해 놓으면 못 알아들을 사람이 적지 않다. 이것을 '사고가 많은 곳'이라고 고쳐 놓으면 무슨 말인지 모를 한국 사람은 없다. 목욕탕에 가면 '세신'이라고 써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을 '때 밀기'라고 해 놓으면 어린아이도 금방 알아듣는다. '교열'은 책 만드는 동네에서 쓰이는 이른바 전문용어다. '글 손질'이나 '글다듬기'라 하면 책 만드는 일과 관련이 없는 사람도 알아먹는다.

이런 것들이 <뿌리깊은나무>가 하는 한글 전용이었다. 쉬운 표현으로 다듬는다고 해서 한자어 대신 귀에 익지 않은 우리말을 공들여 골라서 쓰려고 노력한 것은 아니었다. 한글운동을 하는 이들 중에는 '월요일'을 '달날', '오후 세 시'를 '늦은 세 때'라고 부르는 이도 있는데 그것은 이 잡지가 찬성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 만큼 한자 어휘를 한글 어휘로 바꿔 쓸 일은 많지 않았다. '이유가 나변에 있는가?'의 '나변'처럼 알아먹기 힘든 말이 아니고 일상에서 쓰이는 한자이면 그대로 두었다.

<뿌리깊은나무>는 평소 일반인의 언어생활에서 보통으로 쓰이는 입말을 중요하게 여겼다. 사람의 생식기를 가리키는 '보지', '자지' 같은 어휘를 일부러 꺼내어 썼다. 그것들이 '음부'나 '성기' 또는 '남자의 그것' 같은 표현보다 더 보편성을 지니는(또는 지녀야 옳을) 입말이라고 봤다.

그러면서 어휘보다는 어법을 바로잡는 것에 힘을 썼다. 이를테면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부사나 형용사 같은 문장 구성 요소들의 위치를 바로잡는 것을 글다듬기의 기본으로 삼았다.

'인생에 있어서' 같은 문장에서 '~에 있어서'는 우리 일상의 어법에 맞지 않을 뿐더러 '일본어투'라고 하여 배제했다. 그냥 '인생에서'라고 고쳐 썼다. '기타 등등'의 '등'도 이 잡지에서는 철저히 배제됐다. 문법에서 의존명사 또는 안옹근이름씨로 분류되는 '등'은 입말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되 문장에서는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그 뜻이 흐릿할 때가 많다.

'소, 돼지 등은 가축이다'라는 글 속의 '등'은 '그 밖의 여러 동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힌다. 그런데 '소 한 마리와 돼지 두 마리 등을 샀다.' 할 때의 '등'은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소 1마리, 돼지 2마리' 외에 다른 가축도 샀다는 말인지, '소 1마리와 돼지 2마리' 외에 자질구레한 다른 물건들도 함께 샀다는 말인지, 그도 저도 아니고 '소 1마리와 돼지 2마리만' 샀다는 말인지?

'유행가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등 사람들은 즐겁게 놀았다.' 할 때도 마찬가지다. '유행가를 부르고 악기도 연주하며 놀았다'는 것인지, '유행가도 부르고 악기도 연주하고 또 다른 놀이도 하면서 놀았다'는 것인지?

<뿌리깊은나무>는 우리말에서 '따위'를 불러내 '소, 돼지 등은 가축이다' 할 때는 '소와 돼지 따위는 가축이다'라고 표현했다. 그 밖의 경우들에서는 '등'을 모두 없앴다. '유행가를 부르거나 악기도 연주하며 즐겁게 놀았다'라고 하거나 아니면 '유행가도 부르고 악기도 연주하고 윷놀이도 하고 화투도 치면서 즐겁게 놀았다'같이 상황을 되도록 정확하게 표현하여 '산술적인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했다.

한창기는 '~에 있어서'나 '등' 같은, 보기에 따라서는 아주 하찮은 요소에 마음이 무척 쓰여 했다. 어여쁜 여인이 이마나 볼도 아니고 목 뒤에 난 작은 반점 하나 가지고 바장이듯 이 작은 흠들을 결코 용서하지 못했다.

'현실적 문제'의 '-적'도 그 하나였다. '마음적으로 고생이 많았다' 같은 표현이 시중에서 함부로 쓰이던 시절이었다. '-적'은 그 쓰임새의 범위가 무척 넓어서 다 쫓아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현실적 문제'를 '현실의 문제' 또는 '현실 문제'로 대체함으로써 해결하였다.

잡지에 실리는 모든 필자들의 글이 손질을 거쳤다. 예외가 없었다. 작가 선우휘 선생이 모처럼 원고를 주셨는데, 주시면서 당신의 글을 손대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글은 손질되었고, 그것을 읽어 보신 선생은 몸담은 신문사 안에서 교정지를 집어던지고 불같이 화를 내셨다. 그러나 싣지 못하게는 하지 않았다. "가져가서 싣되 다시는 내게 청탁하지 말아라!"고 했다. 그러나 이는 <뿌리깊은나무>가 존재했던 네 해 반 동안에 글다듬기로 생긴 유일한 '사건'이었다. 불만을 가진 필자들이 없지 않았겠지만 대부분은 좋게 이해하고 지지하는 편이었다.

글 손질에 불만을 가진 분들의 불만은 글의 논지를 다쳤기 때문이 아니라 문장의 구조나 관용어 같은 것들이 바뀌고 사라진 데서 오는 이질감 탓이 컸다. '~에 있어서'나 '등'이나 '-적'이나 그 밖에 뚜렷한 의미 없이 쓰이던 관용구가 사라지면 글의 얼굴이 확 달라져 제 글 같지 않은 인상을 주기 쉬웠다.   

'어린 백성'과 민중, 한글과 민주주의

<뿌리깊은나무>는 1970년대에 ‘민중’이라는 단어를 많이 썼다. 민중의 관심사, 민중의 권익을 일깨우는 기사들을 다달이 빼지 않고 실었다. '민중이 스승'이라는 한창기의 철학이 녹아든 결과이고 이는 나중에 '민중 자서전'으로 엮어 책으로 선보였다.
 <뿌리깊은나무>는 1970년대에 ‘민중’이라는 단어를 많이 썼다. 민중의 관심사, 민중의 권익을 일깨우는 기사들을 다달이 빼지 않고 실었다. '민중이 스승'이라는 한창기의 철학이 녹아든 결과이고 이는 나중에 '민중 자서전'으로 엮어 책으로 선보였다.
ⓒ EBS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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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편집자로 일하는 동안 한글 전용이 민주주의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을 새삼 의식하게 되었다. 중국 문자를 잘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을 위해 새로 글자를 만들었다는 훈민정음의 정신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학문이 모자라는 사람도 남의 생각을 편하게 알아들을 수 있고, 재주가 뒤지는 사람도 제 생각을 쉽게 펼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 바탕이다. 한글은 그러한 도구로서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었다.

<뿌리깊은나무>는 책 속에서 '민중'이라는 단어를 많이 썼다. '민중'의 관심사, 민중의 권익을 일깨우는 기사들을 다달이 빼지 않고 실었다. 그로써 젊은 사람, 특히 학생이나 노동자들에게 공공의 관심사나 국가의 쟁점들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들을 줄 수 있었다. 

<뿌리깊은나무> 1978년 7월호는 "대한민국 헌법은 뜻이 이렇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헌법의 쉬운 풀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기사는 우리나라의 헌법을 '전문에서 시작해서 본문 126조 그리고 부칙 11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장에서 한문을 벗겨내고 한글로 풀어 써서 보여 줬다. 그중의 일부를 <특집! 한창기>에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제1조 2항) 大韓民國의 主權은 國民에게 있고, 國民은 그 代表者나 國民投票에 의해 主權을 行使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그 대표자를 시켜서 또는 국민투표로써 그 주권을 행사한다.

(제9조 1항) 모든 國民들은 法 앞에 平等하다. 누구든지 性別·宗敎 또는 社會的 身分에 의하여 政治的·經濟的·社會的·文化的 生活의 모든 領域에 있어서 差別을 받지 아니한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 아무도 그가 남자이든지 여자이든지, 종교가 무엇이든지 또는 사회에서 지니는 신분이 무엇이든지 정치나 경제나 사회나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제45조 1항) 大統領의 任期가 滿了되는 때에는 統一主體國民會議는 늦어도 任期滿了 30日前에 後任者를 選擧한다.
새 대통령의 선거는 늦어도 그 전임자의 임기가 끝나기 서른 날 전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한다.

(제53조 2항) 大統領은 第1項의 경우에 필요하다고 인정한 때에는 이 憲法에 規定되어 있는 國民의 自由와 權利를 暫定的으로 정지하는 緊急措置를 할 수 있고, 政府나 法院의 權限에 관하여 緊急措置를 할 수 있다.
대통령은 제1항의 경우에 필요하다고 인정하면 이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임시로 정지시키는 긴급조치를 할 수 있고,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도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헌법을 한글 전용으로 바꿔서 보여 줬다. 이 같은 시도는 그 시대의 한국 사회를 억압으로 묶고 있던 '유신 헌법'이 어떤 독소를 가졌는지 들여다보고, 헌법이 국민에게 가지는 의미를 새삼 되새겨보자는 의도를 담은 것이었다.

<뿌리깊은나무>의 한글 전용은 이런 식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지적하자면 이불 밑에서 활개 치는 좀은 나약하고 무모한 도전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같은 존재감 떨어지는 목소리에도 박정희 정권에 이어 들어선 전두환 군사 정권은 1980년 7월호를 끝으로 이 잡지를 폐간 시켜 버렸다. 한글로 흥한 잡지였다가 한글로 망한 잡지가 되었다고 해야 할까?

<뿌리깊은나무>는 그렇게 한글로 망해 버렸지만 이 나라의 '공문서'들이 옛 옷을 버리고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로 돌아서는 신호탄이 되었다. 일반 출판물들과 여성지가 먼저 한글 전용을 선택했고 교양지, 전문지들이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일간지들도 속속 변신을 하였다. 이제 국한문 혼용과 세로쓰기를 고수하는 '공문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세상이 달라졌다.

또 하나의 잡지 <샘이깊은물> 이야기

<샘이깊은물> 창간호 표지. <뿌리깊은나무>가 폐간된 지 네해 뒤인 1984년 11월호로 창간했다. <뿌리깊은나무>가 가졌던 한글 전용과 문화잡지의 특성을 잘 발전시키며 이 또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창간 13년 뒤에 발행인 한창기씨가 사망했고, 그 뒤로 함께 일했던 직원들이 흩어지면서 혼란을 겪다가 3~4년 뒤에 폐간했다.
 <샘이깊은물> 창간호 표지. <뿌리깊은나무>가 폐간된 지 네해 뒤인 1984년 11월호로 창간했다. <뿌리깊은나무>가 가졌던 한글 전용과 문화잡지의 특성을 잘 발전시키며 이 또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창간 13년 뒤에 발행인 한창기씨가 사망했고, 그 뒤로 함께 일했던 직원들이 흩어지면서 혼란을 겪다가 3~4년 뒤에 폐간했다.
ⓒ 오마이뉴스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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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기는 <뿌리깊은나무>가 폐간된 뒤에 그 복간을 위해 무던히 애썼으나 정권의 완강한 반대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 씁쓸한 현실에서 '가정 잡지'라는 분류표를 달고 <샘이깊은물>을 창간했다.

'가정 잡지'니 '여성지'니 하는 것은 만드는 이의 편의에 따른 분류여야 하나 잡지 발간이 허가제로 되어 있던 그 시절의 한국에서는 어느 쪽으로 분류되느냐가 허가의 조건이 되었다. <샘이깊은물>은 여자를 대상으로 만드니까 으레 '여성지'가 되어야 했지만, '기왕의 여성지 발행인'들이 크게 반발하고 정부가 이를 무시하지 못함에 따라 '옹색하게 나온 대안'으로 '가정 잡지'가 되었다. 물론 분류가 그냥 여성지였더라도 <샘이깊은물>은 '기왕의 여성지'들과는 철저히 다른 잡지를 지향했을 터였다.

"이 문화 잡지도 이른바 '여성지'가 아니라 '사람의 잡지'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일'에 관심이 많은 남자들도 탐독할 잡지입니다. 이 문화 잡지는 <뿌리깊은나무> 대신 나온 잡지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뿌리깊은나무>가 사라지면서 남긴 텅 빈 마음을 아직도 채우지 못하셨다면, 그 마음이 풍요로운 보람으로 채워질 때까지 우선 <샘이깊은물>을 받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샘이깊은물> 창간사의 한 부분이다. <샘이깊은물>은 여자를 주된 독자로 삼은 만큼 <뿌리깊은나무>에 견주어 세상 돌아가는 모습보다는 '문화'와 '생활' 같은 데에 많은 지면을 배당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창간사에서 보듯이 앞서 있다가 없어진 <뿌리깊은나무>의 공백을 메우는 것이 중요한 목표의 하나였다. 여자든 남자든 인권을 존중받는 것, 정신으로나 물질로나 사람답게 사는 것의 문제를 한시도 잊지 않았다.

한창기는 <샘이깊은물>의 발행인으로 13년을 일하다가 1997년 2월 초 야속하게도 이승을 떠났다. 예순하나, 이른 나이였다.

<샘이깊은물>은 사람들이 흔히 '샘'으로 줄여 불렀다. '샘'은 한창기 생전의 '샘'과 사후의 '샘'으로 나뉜다. 생전의 '샘'은 <뿌리깊은나무>의 맥을 이으면서 한글 전용은 더 세련되었고, 내용은 더 정치했고, 면모는 한결 더 아름다웠다. 한창기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샘'은 옛 직원들이 흩어짐과 함께 급격히 빛을 잃기 시작했고, 서너 해를 간신히 버티다 스스로 문을 내렸다. 이 또한 몹시 야속한 일이었다.

EBS의 간판 프로그램인 '지식채널e'는 2012년 한글날에 '별종잡지'라는 제목으로 <뿌리깊은나무>와 한창기의 철학을 다뤘다.
 EBS의 간판 프로그램인 '지식채널e'는 2012년 한글날에 '별종잡지'라는 제목으로 <뿌리깊은나무>와 한창기의 철학을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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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어문기자협회에서 펴내는 계간 <말과 글> 2014년 가을호(10월 9일 발행)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1970년대에 월간 <문학사상>과 월간 <뿌리깊은나무>의 편집장으로 일했다. 이후 인문지리지 <한국의 발견>의 편집주간과 월간 <샘이깊은물>의 편집장으로 일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우리나라의 첫 편집 전문회사인 <김형윤 편집회사>를 만들어 대표로 일해 왔다. 대학에서 잡지 편집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파주 출판단지내 작은 헌책방의 주인도 겸하고 있다.



태그:#<뿌리깊은나무>, #한창기, #<샘이깊은물>, #한글전용, #<특집! 한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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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싶은 글을 특별히 구속 받음이 없이 쓰고 싶음. 특히 여행 기사에 관심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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