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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인클럽>은 오마이뉴스가 권력과 자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한 언론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매달 자발적으로 후원하는 유료 독자들의 모임(http://omn.kr/5gcd)입니다. 클럽은 회원들의 후원으로 '10만인리포트'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왜 칼을 들었나'는 한국여성의전화와 함께 진행하는 기획입니다. [편집자말]
"지금은 어엿한 사회인이고 아무도 제가 이런 상처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요즘도 밤마다 엄마가 맞는 꿈을 꿉니다. 사무실에서 일할 때도 모니터 위로 맞고 있는 엄마가 스쳐지나가요. 그 장면 하나하나를 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엄마가 전화를 안 받으시면, 죽은 게 아닐까. 아빠가 엄마를 죽여서 이미 어디에 묻어 버렸으면 어떻게 하지.... 정상이 아니죠.

아버지가 술에 취한 채 집에 들어오시면 저는 싱크대 앞에서 잠을 잤어요. 칼을 꺼내서 저랑 엄마가 잠든 사이에 찌를까 봐요. 언성이 높아지면 저도 모르게 싱크대 앞에 가 서 있게 되고. 참... 인생 전체에 걸쳐 가정폭력은 그림자를 드리우네요. 너무 화가 나요." - <다음> 뉴스펀딩 '그녀는 왜 칼을 들었나' 댓글 중에서.

모든 기억을 지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의 장재열(조인성) 모친처럼 특정 기억을 까맣게 잊으면 차라리 다행이지 싶다. 하지만 드라마가 아닌 현실의 가정폭력 피해자들은 오랫동안 상처에 시달린다. 눈에 보이는 상처라면 '빨간약'이라도 바를 텐데, 이 죽일 놈의 기억을 지워줄 약은 어디에도 없다.

'엄마 울지 마, 잘했어, 이제 끝났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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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동안 자신을 "마음대로 때린" 남편을 살해한 윤필정씨(관련 기사 : 25년간 마음대로 때려... 남편은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녀에게는 두 딸이 있다. 성인이 된 첫째 딸은 성장하는 내내 엄마가 아버지에게 맞는 걸 지켜봤다. 그 가슴에 상처가 나지 않을 리 없다. 첫째 딸은 윤필정씨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엄마가 죽고 아빠가 남겨지면, 나도 엄마 따라 죽을 거야. 아빠는 나랑 동생 OO이 괴롭힐 텐데, 엄마 없이는 못 살아. 내가 아빠를 죽일게. 엄마, 내가 아빠를 죽여줄게. 엄마 이렇게 사는 거 가슴 찢어져." - 윤씨 딸이 검찰에 제출한 탄원서에서

딸에게 이런 말을 들은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윤필정씨는 딸이 칼을 들기 전에 자신이 나선 셈이다. 딸은 그런 엄마에게 마냥 미안하다. 사건이 벌어진 그날, 윤씨는 자살기도 후유증으로 경찰서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됐다. 사고 소식을 들은 딸은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엄마에게 말했다.

"미안해... 우리 엄마 고통스러운 거 알면서 빨리 못 구해줬어. 내가 아빠를 빨리 죽였어야 했는데, 우리 엄마가 또 힘드네... 엄마, 울지 마. 잘했어. 고마워. 이제 끝났다." - 탄원서에서

얼마 뒤 윤씨는 살인 피의자 신분으로 법원에서 구속적부심을 받았다. 윤씨는 울며 판사에게 딱 한 가지를 부탁했다.

"우리 딸들 살아갈 수 있게, 길 안내해 줄 수 있게 하루만 시간을 내주시면 10년이고 20년이고 교도소에서 살겠습니다. 우리 딸들 (만날 수 있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하루만 시간을 주세요. 제발..."

교도소 생활 20년과도 바꾸겠다는 그 하루는 주어지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았던 25년 가정폭력을 끊어내자 이번엔 기약 없는 이별이 시작됐다. 가정폭력 가해 남편을 살해한 윤씨는 가정이 아닌 구치소에 갇혔다. 세 모녀의 이별은 현재 1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두 딸은 오늘도 면회를 위해 구치소로 향한다.

"이제야 아버지의 가정폭력에서 벗어나 더는 불안에 떨지 않고 마음 졸이며 살지 않아도 되는데, 엄마와 떨어져 지내는 고통이라니... 저희 세 모녀 인생은 왜 이렇게 고통뿐인가요." - 탄원서에서

세 모녀는 그동안 가정폭력의 굴레를 벗어나려 어떤 노력을 했을까? "고통뿐인 인생"은 이들 세 모녀의 책임일까?

두 번의 탈출과 법원 상담... 그러나

윤필정씨 사건을 다룬 첫 기사 "25년간 마음대로 때려... 사람이 아니었어요"에서 쓴 대로 윤씨는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2011년 11월, 혼자 산으로 도망쳤다. 윤씨는 그날 속초의 한 찜질방에서 밤을 보냈다. 그날 첫째 딸이 아버지에게 울며 사정했다.

"엄마를 왜 그렇게 때려요! 그럴 거면 이혼해서 엄마를 놓아주세요!"
"이 OOO들이 다 한통속이네!"

딸의 애원에 아버지는 윤씨의 옷을 칼로 찢으며 "엄마 도망가면 외갓집 피바다로 만들 거야. 청부업체에 의뢰해 지구 끝까지 엄마 찾을 거야"라고 소리쳤다. 윤씨는 2013년 8월에도 탈출을 시도했다. 당시 윤씨는 사흘 동안 지인이 입원한 병원에서 지냈다. 윤씨가 사라지자 남편이 또 딸들을 괴롭혔다.

"엄마를 죽여 버리고 말겠어! 그런 다음 나도 죽을 거야. 절대 너희 엄마 두고 나 혼자 안 죽어!"

이런 협박과 폭력 속에서 '완벽한 도망'이 가능할까? 어디서 어떻게 먹고 살지? 학교에 다니는 두 딸은 무사할 수 있을까? 결국 윤씨는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세 모녀는 법원과 경찰서도 찾았다.

윤씨는 지난 2012년 서울의 한 법원 민원실을 찾아 상담을 했다. 이곳에서 윤씨는 "이혼을 하라"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그해 가을엔 딸과 함께 경찰서를 찾았다. 상담에 나선 경찰 관계자는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잠시 머무는) 쉼터 연락처 알려드릴까요?"라고 말했다. 딸이 경찰에게 반문했다. 

"쉼터에서 나온 다음에는요?"
"그런 것까지 저희가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물론 윤씨가 남편의 강압에 의해서만 함께 산 건 아니다. 지난 기사에서 쓴 대로 윤씨는 남편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여행도 다니는 등 함께 잘 살아 보려 노력했다. 그녀 말대로 좋은 날도 있었다. 남편도 윤씨에게 사과하며 "다시는 때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약속은 수시로 깨졌다. 사고가 발생하기 직전에도 윤씨는 남편에게 애원했다.

"우리 셋(두 딸과 자신) 그냥 보내주면 안 돼?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게. 당신을 잘 알기에 나만 참으면 될 줄 알았어. 내가 노력한 거 알지? 당신이 '미안하다, 고쳐볼게'라고 해서 지금까지 버텨왔는데... 이건 아니잖아. 날 죽이든, 보내주든 둘 중 하나만 선택해줘." - 한국여성의전화에 보낸 편지에서

"남편이 무서워요" 상담... 전깃줄 매질 시작

남편은 보내주지 않았다. 대신 윤씨는 실컷 두들겨 맞았다. 주먹질과 협박, 사과와 용서, 잘살아 보겠다는 다짐과 뼈아픈 후회... 25년간 이 과정은 수없이 반복됐다. 몸에 병이 나고 마음도 피폐해졌다. 윤씨는 우울증 등 정신과 치료도 오랫동안 받았다. 2013년 8월, 윤씨는 정신과 상담을 받으며 "남편이 무섭다"고 조심스럽게 토로했다. 이 사실을 남편이 알았다.

"그날 저녁 아빠는 '의사한테 왜 그렇게 말을 했느냐'며 멀티탭 전깃줄로 엄마에게 채찍질을 했습니다. 전깃줄 모양으로 멍이 심하게 났는데 (제가) '사진 찍어서 신고하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엄마는) 이 정도로는 금방 풀려나고, (그러면) 복수심으로 아빠가 자신을 죽일 거라고..." - 딸 탄원서에서

사건 발생 직후 윤씨 변호인은 치료감호소에 윤씨의 정신감정을 의뢰했다. 지난 1월 16일 치료감호소 측은 이런 진단을 내렸다.

"윤필정의 정신 상태는 우울한 기분, 비관적 사고, 흥미와 즐거움의 저하, 자존감의 저하, 자기비하적 태도, 죽음에 대한 생각, 불면증 등의 증세를 보이는 우울증 환자로 사료됨. 범행 당시에도 현재의 정신 상태와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됨. 윤필정은 (중략) 보호자의 지속적인 관심과 보호가 요망되고 향후 부정기간 정신과적 전문 가료가 필요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전문심리위원으로 윤씨를 면담한 이수정 경기대학교 범죄심리학과 교수 역시 같은 진단을 내렸다.

"(윤씨가) 경험한 가정폭력의 수위는, 어떤 여성이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합리적으로 사물을 변별하고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이성적 제어력을 상실할 만한 심각한 수준의 폭력이다. (중략) 윤씨는 우울증 이외에도 외상후스트레스장애에 해당하는 증세들을 확실히 지니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 전문심리위원 의견서에서

전문가들은 윤씨가 전형적인 '피학대 여성증후군'을 가졌다고 진단한다. 피학대 여성증후군은 남편에게 장기간 신체적, 정신적 폭력을 겪은 여성에게 주로 나타난다. 이런 여성들은 지속적인 폭력이 낳은 학습된 무기력 탓에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윤씨의 딸도 엄마의 그런 모습을 오랫동안 봤다.

"엄마는 항상 죽고 싶다는 말을 쉽게 하셨습니다. 아빠가 욕을 하며 '무조건 복종해, 네 말은 다 틀렸어'라고 잠도 안 재우고 밤새, 몇 날 동안 같은 말을 반복하니 엄마는 세뇌 당한 사람처럼 판단력이 흐려지셨습니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무조건 자기 잘못이라며 엄마의 자존감은 낮아졌습니다." - 딸 탄원서에서

윤필정씨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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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말, 서울고등법원에서 윤씨에 대한 마지막 공판이 열렸다. 검찰은 윤씨에게 징역 5년을 구형했다. 변호인 측은 정당방위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윤씨는 이날 울면서 최후 변론을 했다. 또 "미안하다"는 말이 반복됐다.

"그 순간에 왜 그 노끈이 눈에 띄었을까요.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과 죄... 살면서 계속 갚아나가겠습니다. 막내딸은 아직 어린데, 어른 없이 사는 게 마음 아픕니다. 딸을 돌보면서 죄를 갚고 싶습니다."

구치소에서 어린 시절 가정폭력을 겪은 20대 여성을 만났습니다. 그녀의 아픔을 보니, 내 두 딸도 그동안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까 싶었습니다. 그동안 내 상처만 봤는데... 두 딸의 상처는 얼마나 클까요. 그 상처를 치유해 주고 싶습니다."

재판을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 눈을 훔쳤다. 2심 공판은 모두 끝났다. 오는 10월 말 법원은 선고를 내린다. 윤씨가 있어야 할 곳은, 교도소일까 집일까.

* 가정폭력 발생 세계 1위권인 한국. 가정폭력 피해 여성의 남편 살해 사건에 대해 한국 법원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정당방위 판결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해외에서는 정당방위 판결이 내려진 사례가 있습니다. 다음 기사에서는 해외 사례와 함께, 변호인이 윤씨의 행위를 정당방위라 주장하는 이유를 풀어보겠습니다.

 


태그:#윤필정, #가정폭력, #그녀는 왜 칼을 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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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랭은 고양이를, 저는 개를 업고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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