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몇 년 전 어느 책에서 읽은 이야기다. 한 학부모 모임이 있었다고 한다. 엄마들이 주로 모였다. 그런데 모임이 있을 때마다 약속 시간에 늦는 엄마 몇이 있었다. 시작이 늦어지는 등 문제가 적지 않았다.

모임에서는 회의를 통해 규칙 하나를 정했다. 시간을 준수하지 못하면 돈을 내는 일종의 '벌금제'였다. 단골 지각 엄마들의 태도는 바뀌었을까.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것 같았다.

"오늘 10분 늦었네요. 벌금 1만 원 낼게요."

지각하는 엄마들은 '1만 원'이라는 벌금과 '지각'의 잘못을 맞바꿨다. 돈으로 잘못에 대한 면죄부를 산 것이었다고 말하면 지나칠까. 때 아닌, 아니 솔직히 늦은 감이 훨씬 더 많은 상벌점제 폐지 논란을 보면서 떠올린 단상들이다.

경기도교육청, 9월 1일부터 상벌점제 폐지

비교육적인 상벌점제로 아이들을 지도할 수 있을까? (자료 사진)
 비교육적인 상벌점제로 아이들을 지도할 수 있을까? (자료 사진)
ⓒ 제보자

관련사진보기


이번 상벌점제 논란의 출발점은 경기도교육청이다. 2학기부터 전면적인 추진을 공표했던 9시 등교 정책으로 전국적인 관심을 받은 경기교육청이 다가오는 9월 1일부터 상벌점제를 폐지하기로 함으로써 다시 한 번 세간의 눈길을 끌고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경기교육청은 이미 지난 21일에 상벌점제 폐지 내용을 담은 '건강한 성장, 인권 친화적 생활교육 추진계획' 공문을 각 학교에 발송한 바 있다. 이재정 경기교육감은 상벌점제 폐지가, 지도와 훈육 중심의 생활 지도에서 탈피해 새로운 생활교육 방안을 제시하는 측면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밝혔다. 현재 경기교육청의 상벌점제 운영 현황은 초등학교 18퍼센트, 중학교 85퍼센트, 고등학교 82퍼센트 정도라고 한다.

9시 등교 정책 논란에서와 마찬가지로 상벌점제 폐지 조치를 바라보는 시각 역시 크게 양분돼 있다. 반대론자들은 학교 현장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근거로 상벌점제 폐지 주장을 비판한다. 상벌점제 폐지를 학교 물정 모르는 교육감의 졸속 행정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이들은 상벌점제 폐지가 학교 현장에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학교 현장에 파급력이 큰 정책을 갑작스럽게 추진하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상벌점제 폐지 찬성론자로서 그 교육적 의의나 효과가 거의 없다는 점을 전제로 말하건대, 상벌점제의 전격적인 폐지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비교육적인 정책은 되도록 신속히 폐지하는 게 교육자(교육기관)의 올바른 자세라고 보아서다.

상벌점제 폐지 반대론자들의 또 다른 핵심 논거는 그것의 현실적인 불가피함이다. 말하자면 학생 체벌이 금지된 상황에서 상벌점제가 학생 선도 및 지도를 위한 최소한의 방편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상벌점제를 교권 및 수업권 보호의 한 수단으로 바라보는 일각의 관점과도 맥을 같이 한다.

국내 최대 교원 단체인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한국교총)가 이와 같은 반대론의 맨 앞줄에 서 있다. 한국교총 김동석 대변인은 "상벌점제는 생활지도의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인성교육의 한 방편"이라며 "학생들은 상벌을 통해 권리와 책임, 옳고 그름을 배우게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상벌점제의 교육적인 '실효성'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보인다.

상벌점제는 학생들의 행동을 점수화한 바탕 위에서 유지된다. 예컨대 이른바 '착한' 행동과 '나쁜' 행동에 각각 상점과 벌점을 부여한 뒤, 이들 점수를 합산해 상점 우수자에게 시상을 하거나 다벌점자에게 교내 봉사활동을 강제하는 식이다.

인성교육에 효과 있는 상벌점제?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행동을 점수화한다는 게 과연 어떤 교육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갖가지 행동 하나하나를 '상점 행동'과 '벌점 행동'으로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 그렇게 나뉜 행동들에 일일이 점수를 부여하는 일은 어떻게 하나. 우둔한 탓이겠으나 나는 이들 질문에 선뜻 합리적인 대답을 내놓지 못하겠다.

일반적으로 어떤 학생이 인사 예절을 잘 지키거나 고운 말을 사용하고, 용의 복장 관리에서 다른 학생의 '본보기'가 되면 상점이 부여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인사를 해야 본보기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고운 말을 쓰는 상황 여부를 교사가 어떻게 판단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명시적인 '기준'이 떠오르지 않는다.

기준이 없으니 상점이나 벌점 부여는 교사의 임의적인 판단에 따라 이루어진다. 일관성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학교에서는 인사를 잘 하는 학생에게 상점 2점을 준다. 다른 학교에서는 동일한 행동에 3점을 준다. 이때의 '1점' 차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쉬이 납득하기 힘들다.

위에 적은 대로 한국교총 김동석 대변인은 상벌점제가 학생들에게 권리와 책임, 옳고 그름을 가르치는 인성교육으로서의 의미나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다. 참 이해하기 어렵다.

김 대변인이 말한, 상벌점제가 가르치는 권리와 책임은 어떤 것일까. '착한' 행동을 하면 당당하게 '상점'을 받을 권리가 있고, '나쁜' 행동에 대해서는 '벌점'을 받아 '벌칙' 같은 교내 봉사활동을 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이란 말일까.

한 발 양보해 상·벌점이 권리와 책임을 가르친다는 김 대변인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여 보자. 그렇다면 학생들은 상점받을 권리를 찾거나 벌점에 따른 벌칙 수행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 행동을 선별하게 되지 않을까. 상점을 받으려고 일부러 '착한' 행동을 하고, 벌점을 피하기 위해 '나쁜' 행동을 삼가는 것처럼 말이다.

상·벌점이 부여되는 행동 항목들은 대개 공동체 생활을 해 나가는 데 필요하거나, 해서는 안 되는 기본적인 언행들이다. 따라서 상·벌점의 교육적 효과가 어느 정도 확실하다면 상점으로 유도되는 '착한' 언행은 계속 늘어나고 벌점으로 억제되는 '나쁜' 언행은 꾸준히 줄어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적어도 상벌점제를 시행하고 있는 한 중학교 소속 교사로서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 같다. 선생님에게 인사했으니 상점을 달라거나, 친구가 욕을 했으므로 그에게 벌점을 주라며 반장난처럼 이야기하는 학생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상점 받을 권리를 찾거나 벌점에 따른 책임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언행을 가려서 하는 학생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당연한 얘기지만 학생을 포함해 무릇 평범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상점이 되었든 벌점이 되었든) 눈에 보이는 점수를 의식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취사선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비교육적이고 실효성도 없는 상벌점제 사라져야

상벌점제의 비교육적인 본질이 여기서 드러난다. 상벌점제는 '점수'로써 학생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려 한다. 이때 점수는 가시적인 보상이다. 문제는 그런 보상 시스템이 실제 교육 현장에서 일정한 교육적 의의를 가질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사탕이나 과자, 상품권 등으로 학생들의 학습 활동을 이끄는 교사들이 많다. 대체로 처음에는 학생들 반응이 괜찮다. 하지만 곧 시들해진다. 미처 예기치 못한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 물질적인 보상물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잡음이다. 이른바 보상물이 일부 학생들에게 쏠리면서 나타나는 형평성 문제다.

더 심각한 게 있다. 애초 교사의 의도와 달리 학생들이 학습 활동 자체가 아니라 보상물에 더 눈독을 들이는 문제다. 보상물이 뒤따르는 공부에 맛을 들인 학생들은 학습에 대한 열의나 흥미가 전반적으로 낮다. 보상물이 주어지지 않으면 스스로 학습 동기를 가지려는 노력도 별로 기울이지 않는다. 상당수 학생은 아예 그런 보상물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도 제기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보상 시스템으로서의 상벌점제는 그런 교육적인 정당성 문제를 제기한다. 상벌점제 폐지 반대론자들은 한편에서 권리와 책임, 인성교육을 강조한다. 또 다른 한편에서 그들은 상벌점제를 체벌을 대체하는 현실적으로 유일한 지도수단으로 규정한다. 전자는 점수화 그 자체가 교육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점에서, 후자는 그 실효성이 명백하지 않다는 점에서 정당하다고 보기 힘들다. 상벌점제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하는 이유들이다.

경기교육청에서는 상벌점제 폐지의 대안으로 학생 스스로 제정하고 운영하는 학급생활·학교생활 협약을 내놓고 있다고 한다. 일종의 학생 자치를 강화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폐지 반대론자들은 학생 자치의 현실적인 한계를 든다. 학급생활·학교생활 협약과 같은 자치 규약만으로 학생 통제가 안 될 경우 그런 상황을 극복하면서 이끌어갈 수 있는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상벌점제 폐지 반대론자들에게 몇 가지 묻고 싶다. 학생은 배움의 '주체'인가, 아니면 학교나 교사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 '대상'인가. 학생 자치로 통제가 되지 않는 학생이 상벌점제 시스템 아래서는 잘 통제된다는 명확한 근거는 있는가. 학생 자치를 통해 길러지는 자율성과 상벌점제 시스템 아래서 내면화하게 될 타율성 중 어떤 것이 더 교육적인가.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수업 시간에 교사와 동료 학생들을 방해하는 막무가내 '괴물' 학생들이 있다. 그런 학생들을 정녕 체벌과 상벌점으로 지도할 수 있다고 보는가. 나는 상벌점제 폐지 반대론자들이 이 질문에 결코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상벌점제는 당장 폐지해도 큰 문제가 없다. '괴물'이 아닌 나머지 대다수는 상벌점제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자기 언행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착한' 학생들이기 때문이다. 9시 등교 정책 논란에서와 마찬가지로 상벌점제 폐지 문제에서도 학생들을 믿는 태도로의 전환이 필요한 이유다.

상벌점제를 유지하는 한 우리는 학생들이 진짜 '괴물'이 되는 상황을 지켜볼 수도 있지 않을까. '1만 원'을 낸 대가로 대놓고 잘못을 저지르는 예의 엄마들처럼 말이다. 타율적인 강제에 짓눌린 채 성장한 학생들이 만들어가는 미래 사회는 생각만으로도 서늘하다.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태그:#상벌점제 폐지, #경기도교육청 이재정 교육감, #9시 등교 정책, #학생 자치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