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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물에도 순서가 있다더니, 유적지 답사에도 순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수십 회 이상 달성공원을 찾았지만, 이제서야 처음으로 그 교훈을 체득했다. 달성공원 내에 설치되었던 일본천황 요배전의 내부가 1946년 8월 8일 철거되었다는 사실을 기려 대구공정여행A스토리협동조합이 주최한 '8월 8일 달성토성 역사여행'에 참가한 덕분이었다.

정만진 해설가는 "달성공원의 동쪽 성곽 아래에는 본래 달서천이 흘렀으나 복개되어 해자의 모습을 볼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해자가 남아 잇으면 경중 월성과 이곳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만진 해설가는 "달성공원의 동쪽 성곽 아래에는 본래 달서천이 흘렀으나 복개되어 해자의 모습을 볼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해자가 남아 잇으면 경중 월성과 이곳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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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본 것은 공원 안이 아니라 밖이었다. 본래 달서천이 흘렀지만 복개되어 도로가 되고 주차장이 되어버린 곳에서 참가자들은 달성토성의 동쪽 성벽인 가파른 절벽을 쳐다보았다.

해설을 맡은 정만진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파견예술인은 "산 속에 들어가서는 산을 볼 수 없습니다. 성도 밖에서 보아야 진면목을 알 수 있지요"하면서 "해자가 있고, 그 너머 높은 절벽이 있고, 그 위에 성을 쌓았으니 적군의 공격을 방어하기가 좋지 않겠습니까. 261년에 쌓은 달성은 101년에 만들어진 경주 월성의 축성술과 비슷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하고 말했다.

달성의 특성을 확인하기 위해 해자 터와 가파른 절벽 성곽을 가장 먼저 본 다음, 정문을 통과하여 이른바 '순종나무'로 갔다. 이 일본산 향나무는 1906년 1월 12일 이토 히로부미의 강요에 따라 달성공원을 방문한 순종이 심은 '기념 식수'로 알려지는 역사가 서린 나무이다. 무엇을 기념했다는 것일까?

순종나무 뒤로 관풍루가 보이는 풍경. 1906년 친일파 대구부사가 대구읍성을 파괴하는 바람에 그 뒤 달성공원으로 옮겨오게 된 경상감영 정문 관풍루, 1909년 이토 히로부미에 이끌려 신사 참배차 달성공원을 방문한 순종이 신은 일본산 향나무, 이 둘은 일제의 침략을 상징해주었다.
 순종나무 뒤로 관풍루가 보이는 풍경. 1906년 친일파 대구부사가 대구읍성을 파괴하는 바람에 그 뒤 달성공원으로 옮겨오게 된 경상감영 정문 관풍루, 1909년 이토 히로부미에 이끌려 신사 참배차 달성공원을 방문한 순종이 신은 일본산 향나무, 이 둘은 일제의 침략을 상징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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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은 이 날 공원 내 천황 요배전에 참배하였다. 이토는 조선국 왕을 경부선에 태워 마산까지 끌고 다닌 후 다시 대구로 돌아왔다. 순종의 기념 식수는 이제 곧 조선이 일베의 식민지가 된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암시하는 기념 식수였던 셈이다. 당연히 순종은 현재의 공원 정문 바로뒤에 자리잡고 있던 도리이(鳥居)를 통과하여 이곳으로 왔다.      

정만진 해설가는 "우리도 도리이 터를 지나 이리로 왔습니다. 하지만 무심코 지나왔기 때문에 치욕의 역사를 되새길 겨를이 없었습니다. 국사를 쉽게 잊어버리는 종족은 언제나 멸망하고 만다는 것이 인류 역사의 교훈이라는 사실을 명심합시다"하면서 "따라서 이제 우리가 방문할 곳은, 성공했더라면 망국의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는 역사의 가설을 생각하게 해주는 곳이죠. 바로 동학 교주 최제우 동상입니다. 그리고 안내하겠습니다"하고 말했다.

일본 향나무에 둘러싸인 동학 교주 최제우 동상
 일본 향나무에 둘러싸인 동학 교주 최제우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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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동상으로 갔다. 해설가는 이 동선으로 걷지 않으면 최제우 동상을 못 보고 달성공원을 답사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정문에서 바로 오른쪽으로 돌아 관덕정으로 가든, 바로 왼쪽으로 돌아 상화시비 방향으로 가든, 최제우 동상을 비켜서 지나가게 된다고 했다. 해설가는 "그런데 대부분의 달성공원 방문객들은 그렇게 걷고 맙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공원 안에 올바른 답사 경로 안내가 없기 때문입니다"하고 말했다.

경주 태생인 동학 교주 최제우의 동상이 순교 100주기인 1964년을 맞아 달성공원 안에 세워진 것은 그가 대구 관덕정 인근에서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해설가는 "외세에 저항하여 동학농민군이 창의했는데, 최제우 동상은 정작 일제가 식민지 때 일선동체를 조장하기 위해 심어놓은 일본향나무에 둘러싸여 있으니, 이것 또한 일제 잔재가 청산되지 않은 결과"라고 지적했다.

박정희 대통령 꽃사슴 기증비
 박정희 대통령 꽃사슴 기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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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동상에서 오른쪽으로 사슴 울 앞으로 갔다. 사슴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박정희 꽃사슴 기증비'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 동안 달성공원에 많이 왔지만 이런 비가 있는 줄 몰랐는데, 해설가의 설명을 들으니 더욱 심오한 역사적  의미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달성이 최초로 공원화한 때는 1905년이다. 하지만 역사유적 달성을 공원화한 것은 대한제국은 아니다. 일제가 그렇게 했다. 신라 때 달성토성이 쌓이고, 공양왕 때 석축이 덧쌓였으며, 그 이후 조선 초기까지 줄곧 관청 소재지로 활용되었고, 1598년에는 경삼감영까지 설치되었던 민족의 역사적 터전을 일제는 아무것도 아닌 공원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민족 정신을 흐리려는 정치적 음모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달성을 공원으로 유지하고 있다. 1969년에는 달성을 현대화된 공원으로 만들었고, 1970년에는 동물원까지 설치했다. 설계는 영친왕의 아들이 담당했다고 한다. 게다가 1971년 5월 5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꽃사슴을 기증하여 공원화와 동물원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우리 스스로도 민족의 역사유적에 서린 정기를 무너뜨리는 데 부역했던 것이다.

정문 왼쪽의 '달성공원 안내판'에는 달성이 풍납토성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고대 토성 건축술을 말해주는 중요 유적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해자였던 달서천 복개로 이미 본모습을 거의 잃어버렸다는 사실과, 최제우 동상을 일본향나무가 둘어싸고 있는 모습, 그리고 역사유적 달성이 공원으로 전락한 실상을 알고보니 안내판의 해설은 오히려 민망하게 느껴졌다.

관풍루
 관풍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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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보게 되는 관풍루는 어떨까? 궁금해졌다. 하지만 해설을 듣고 보니 관풍루 역시 식민지 전후를 겪으면서 우리의 민족혼이 당당한 빛을 발휘하지 못한 사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정말 안타까웠다. 관풍루는 본래 경상감영의 정문이었는데, 1906년 당시 당시 친일파 대구부사였던 박중양이 중앙정부의 불허에도 불구하고 대구읍성을 허물면서 얼마 뒤 이곳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정문이라면 남문이다. 그런데 관풍루는 달성의 남쪽에 있지도 않다. 1909년에 이곳으로 옮겨진 관풍루는 뒷날 허물어져서 1970년에 재건되었다는데, 그렇다면 그때라도 지금의 경상감영공원 정문 자리에 세우든지, 아니면 달성공원 정문으로라도 만들었어야 당연할 텐데, 왜 엉뚱한 이곳에 다시 세웠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관풍루는 서쪽을 보고 있었다. 이렇게 무성의하게 문화유산을 복원해도 되는 것인지 마음이 답답했다. 게다가 '출입 금지'였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막고 서 있는 안내판은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출입금지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는 누각이라는 관풍루의 이름을 생각하면 2층에 올라갈 수 있도록 해야 옳은 것 아닐까? 또 사람이 사용하지 않는 건물이 먼저 무너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달성 성곽 위로 걷는 길, 여름 녹음이 무성하다.
 달성 성곽 위로 걷는 길, 여름 녹음이 무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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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 걸어서 성곽 위를 걸었다. 울창한 숲에 가려 성곽 아래가 내려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고대 토성 건축의 전형을 보여주는 성곽 길을 걷는 기분은 아주 괜찮았다. 특히 "500미터 정도 걸은 다음 상화 시비쪽으로 내려가면 그 때부터는 항일 유적을 계속 볼 수 있다"는 해설가의 설명에 더욱 마음이 흡족해졌다. 상화 시비, 허위 순국비, 이상룡 구국기념비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니, 역시 역사유적 답사에는 순서를 잘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하게 들었다. 이곳저곳을 오락가락하면 답사의 보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다. 지금처럼 일제 잔재가 남아 있는 곳을 먼저 둘러보고, 그 뒤로는 항일 정신이 생생한 곳을 모아서 보면 역사의 현장을 체험한 교육적 효과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런지,상화 시비 등이  빨리 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발걸음이 빨라졌다.

(계속)    

덧붙이는 글 | 달성(공원) 반을 걸었습니다. 분량이 많아 그 이후 답사기는 따로 싣도록 하겠습니다.



태그:#달성, #최제우, #이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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