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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매해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면 나는 고구마밭에서 고구마 수확을 거들어야 했다. 어른들이 호미로 가을 가뭄에 딱딱해진 땅을 내리치듯 고구마를 캐기에 앞서 고구마 줄기를 걷는 일은 언제나 형과 나에게 맡겨진 일이었다. 여러 명의 어른들 손놀림에 앞서 일을 하려면 늘 서둘러야 했고, 목장갑을 꼈다 해도 손을 베는 일은 다반사였다.

가끔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게 베인 손가락을 일회용 반창고 위에 노끈으로 다시 한 번 질끈 감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구마 줄기를 걷기도 했다. 그러고 나면 목장갑은 벌겋게 변해 있고, 손바닥엔 물집이 잡히기 일쑤였다. 지금도 내 왼손가락에는 고구마 줄기를 걷다가 낫에 베인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을 정도로, 일손이 귀한 시골에서 그 일은 아프다거나 다쳤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고향을 떠난 지 30년 가까이 된 지금도 누군가 낫을 쥐어준다면 고구마 줄기 걷기쯤은 거뜬하게 해낼 자신감이 있다. 아마 어린 시절 노동이 몸에 밴 탓일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고구마꽃에 대한 기사를 보고 이제껏 고구마꽃을 본 적이 있었던가 하고 떠올려 보았다. 예전 시골마을에는 가사조력 방학이라 해서 고구마 수확이 한창일 때는 집안일을 돕도록 사흘 정도의 방학이 있었다. 덕분에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빼도 박도 못하고, 어린 나이에 밭으로 내몰려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며칠을 고구마 줄기 걷어내는 작업을 하면서도 고구마꽃을 본 기억은 없다.

활짝 피었던 고구마 꽃이 봉오리를 오므리고 생을 마감할 준비를 하고 있다.
▲ 해질녁 떨어지기 직전 활짝 피었던 고구마 꽃이 봉오리를 오므리고 생을 마감할 준비를 하고 있다.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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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난 19일 저녁 개를 데리고 산책하던 중에 길가에서 고구마 꽃이 무더기로 핀 것을 목격했다. 자갈밭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거친 땅에 뿌리를 내린 고구마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이다. 하지만 지나가면서 얼핏 처음 보았을 때는 다른 작물인 줄 착각할 정도로 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나팔꽃이 낮게 자리를 잡고 피었나 보다 하다가 그게 아님을 안 순간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저녁이라 많은 꽃들이 이미 시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도 여전히 싱싱함을 자랑하고 있는 봉오리들도 있었고, 떨어진 꽃잎들이 올라온 고구마 줄기 아래에는 힘찬 기운을 자랑하며 금방이라도 올라올 기세로 많은 봉오리들이 고개를 내밀 채비를 하고 있었다. 다음을 기약하는 봉오리 무리를 보고 확신했다. 내일 아침이면 더 많은 꽃들이 필 것이라는 것을.

자색과 흰색이 조화를 이루며 고고하게 나팔을 불 듯 자태를 뽐내고 있다.
▲ 아침에 만난 고구마 꽃 자색과 흰색이 조화를 이루며 고고하게 나팔을 불 듯 자태를 뽐내고 있다.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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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봉오리들이 피어 오를 채비를 하고 잔뜩 벼르고 있다
▲ 꽃 봉오리들이 잔뜩 꽃 봉오리들이 피어 오를 채비를 하고 잔뜩 벼르고 있다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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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인 20일 새벽, 볕이 뜨거워지기 전에 고구마꽃이 피었는지 살피러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꽃들은 다시 피어오르고 있었고, 아침의 싱싱함까지 더해진 자색빛이 감도는 하얀 고구마 꽃들은 고고하기까지 했다. 누군가는 100년에 한 번 핀다고 했고, 꽃말이 행운이라고 했던가? 이럴 때 드는 생각.

"흠, 로또라도 한 장 살까?"

정겹게 나란히 핀 고구마 꽃
▲ 다정하게 핀 고구마 꽃 정겹게 나란히 핀 고구마 꽃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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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던 동네 아저씨도 "나도 고구마 농사를 30년 넘게 지어왔지만, 이런 꽃은 처음이요"라면서 사진을 연신 찍어대고 있는 내가 어쩌면 당연하다는 듯 한마디 하고 지나갔다.

그렇다. 세상 살면서 이렇게 드물게 피는 꽃을 본다는 것 자체가 로또 맞은 것 아닌가. 최근 들어 고구마꽃이 자주 목격되는 게 이상기온 탓이라고 하는 이도 있지만, 꽃 싫어하는 사람 어디 있으랴 싶어 카메라에 담은 사진을 올려본다.

자갈밭에서 피고지기를 반복하고 있는 고구마 꽃
▲ 자갈밭에 핀 고구마 꽃 자갈밭에서 피고지기를 반복하고 있는 고구마 꽃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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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 꽃밭인지 고구마 밭인지 고구마 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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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 듯한 고구마 꽃들
▲ 많이도 피고 진다 매일매일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 듯한 고구마 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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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쪽은 자색, 윗쪽은 흰색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 자색과 흰색의 조화 아래쪽은 자색, 윗쪽은 흰색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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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고구마 꽃, #꽃말, #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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