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969년 세간의 화제를 뿌리며 지어진 낙원상가, 극장과 지하시장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1969년 세간의 화제를 뿌리며 지어진 낙원상가, 극장과 지하시장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세계 여러 나라의 여행서를 펴내는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은 서울을 일컬어 "무엇도 영원한 것 없이 쓰러져 가는 것들로 가득 한 좌충우돌의 도시"라고 묘사하고 있다. 얼마 전 일시에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 종로 피맛골을 떠올리며 나도 고개를 끄덕이고 공감했다. 종로의 낙원상가와 우리나라 최초의 지하 마트 낙원시장을 알기 전까지는.

1960년대 서울시는 낙원동에서 야심 찬 실험을 한다. 최고급 주상복합건물인 낙원상가 아파트를 세우는 것. 한 건물 안에 상가와 시장·영화관·아파트가 들어간 복합건물은 당시 시민들에게 생소한 개념이었다. 재래시장이 지하로 들어간 것도 전에 없던 발상이었다. 건물을 도로 위에 세운다는 개념도 놀라웠다. 불도저란 별명의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은 도심 재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낙원상가와 쌍벽을 이루는 세운상가도 짓는다.

서울시는 도로법과 건축법 위반을 피하기 위해 낙원상가의 1층을 비웠다. 건물 아래로 차량들이 달리는 도로가 지나가게 된 이유다. 낙원상가아파트에 대한 기대치는 매우 컸다. 1967년에서 1968년으로 넘어가는 두 달 만에 땅값이 세 배나 뛴다. 1969년 당시 낙원상가아파트는 삼풍 삼원아파트, 외인아파트와 함께 서울에서 가장 호화로운 아파트로 손꼽혔다.

명작 영화 관람할 수 있는 실버 영화관

낙원동의 특징을 살려 허리우드 극장이 허리우드 클래식으로 다시 살아났다.
 낙원동의 특징을 살려 허리우드 극장이 허리우드 클래식으로 다시 살아났다.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그런 화려한 역사를 지닌 낙원상가는 현재 서울 시민들에게 악기상가로만 알려져 있다. 하지만 주머니가 팍팍한 어르신들도 2000원이면 국내외 추억의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실버 영화관 '허리우드 클래식'과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지하 마트인 낙원시장이 사라지지 않고 당당히 있다는 것을 아는 시민들은 드문 것 같다.

1969년 문을 연 '허리우드 극장'은 단성사, 피카디리 극장과 함께 종로 극장가를 대표하는 극장이었다. 하지만 대형 복합상영관이 생긴 1990년대부터 위기를 겪었다. 단성사는 문을 닫고 피카디리는 재건축을 통해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변신했다. 허리우드는 스크린 3개를 갖춘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명맥만 유지했다.

이런 '한물간' 극장의 잠재력에 주목한 이는 김은주(41) 대표다. 그는 근처에 인사동, 탑골공원 등 노인들이 모이는 장소가 있고, 많은 사람의 생각 속에 '허리우드'란 추억이 남아 있다는 것에 집중했다. 그는 매달 1000만 원씩 SK케미컬의 지원을 받아 허리우드 극장을 2009년 실버 영화관으로 새로이 단장해 문을 열었다. 같은 해 극장 가운데 최초로 고용노동부로부터 사회적 기업 인증도 받았다. 정식 법인명은 '추억을 파는 극장'.

사회적 기업으로 지정되면서 서울시는 2010년부터 유한킴벌리는 2012년부터 지원에 동참하고 있다. 사회적 기업 지원 제도로 15명의 노인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게 됐다. 현재 극장안내, 매표소 직원, 영업, 영사기사 등 직원들 대부분이 65세 이상의 노인다. 모두 정규직으로 매일 8시간씩 극장에서 근무하고 한 달에 100만~150만 원 가량을 월급으로 받는다.

극장의 취지와 기획은 좋았으나 초기엔 손님이 늘지 않았다. 매달 적자가 2000만 원씩 났다. 김 대표는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고, 차를 팔았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그동안 해오던 방식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에 눈높이를 어르신들께 맞추기 시작했다. 영화 상영 전엔 직접 나가 인사를 하고 '실버 영화관'을 소개했다. 컴컴한 극장 통로엔 어르신들이 언제든 붙잡고 일어설 수 있게 봉을 설치했다.

옛 영화들이라 잘 안보이던 자막을 맨 뒷자리에서도 잘 보이도록 새롭게 만들고, 고르지 않던 음향도 잘 들리도록 작업을 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주머니가 가벼운 어르신들을 감안해 극장에 음식도 들여올 수 있게 했다. 입소문이 나자 관객이 점점 늘기 시작했다. 관람료가 싸다고 영화까지 '싸구려'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 상영되는 작품은 김은주 대표가 하나하나 정성을 기울여 선정한 고전 명작들이다.

멀티플렉스 극장보다 객석 점유율이 높은 실버 영화관 '허리우드 클래식'에서 어르신들이 영화를 고르고 있다.
 멀티플렉스 극장보다 객석 점유율이 높은 실버 영화관 '허리우드 클래식'에서 어르신들이 영화를 고르고 있다.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이 극장의 연평균 객석 점유율은 55~60%대로 30~40%대에 머무는 멀티플렉스 극장의 점유율을 크게 웃돈다.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가 아닌 옛 작품을 틀어주고도 인기몰이를 하는 300석 규모의 이 작은 실버영화관이 우리나라 좌석 점유율 1위의 극장이다.

실버 영화관이 어르신들의 호응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운영되자, 경기도 안산에도 실버 영화관이 생겨났다. 실버 영화관 허리우드 클래식에는 '성공한 국내 첫 문화예술 사회적 기업 1호' '어르신들의 문화 아지트'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극장 안 로비로 들어서자 기자도 좋아하는 올드팝 'Moon River(문 리버)'가 흘러나왔다. 깨끗하고 쾌적한 극장 로비엔 고전 영화들의 포스터 외에 어르신들에게 편리한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중소기업 제품관과 어르신 전용 200원짜리 커피 자판기가 눈길을 끌었다.

55세 이상 남녀에게 2000원의 입장료를 받는데, 보통 65세 이상이 '노인'에 해당되지만 50대면 벌써 퇴직을 하고 직장을 나와야 하는 사회 현실을 감안해 나이를 낮추었다고 한다. 학생과 일반(대학생 포함)도 영화 관람이 가능하며 요금은 5000원이다. 어르신과 동행해서 오면 누구나 2000원만 받는단다.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나이 듦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서 세월의 흔적을 느끼고서야 어느덧 자신도 나이가 들었다는 걸 안다. 모든 사람은 나이를 먹고 노인이 되지만, 노년의 삶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다.

이 크고 화려한 도시에 노인이 갈 만한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에 대해서도. 국제 노인인권단체 '헬프에이지 인터내셔널'(HelpAge International)에 따르면 한국의 노인복지는 세계 91개국 가운데 67위로 '낙제 수준'이다. 그런 점에서 서울 종로 도심 한복판 낙원상가의 극장 허리우드 클래식은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지하 마트, 낙원시장

남대문 시장을 작게 옮겨다 놓은 것 같은 낙원상가 지하시장, 40년이 훌쩍 넘은 오래된 시장이다.
 남대문 시장을 작게 옮겨다 놓은 것 같은 낙원상가 지하시장, 40년이 훌쩍 넘은 오래된 시장이다.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단돈 2천원에 양도 맛도 만족스러운 낙원시장 잔치국수.
 단돈 2천원에 양도 맛도 만족스러운 낙원시장 잔치국수.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무심코 지나쳤던 낙원상가 지하에는 상상도 못한 재래시장과 식당들이 있다. 상가 건물 지하에 자리한 작은 시장이지만 각종 농수산물 가게, 방앗간, 정육점, 쌀집, 수입품 가게, 먹거리 식당들까지 일반 시장과 다를 게 없다. 이런 시장이 40년 넘도록 자리하고 있다는 게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으로 지하로 들어섰다.

남대문시장을 작게 옮긴 듯한 오래된 낙원상가 지하시장엔 위층 악기상가의 장인 아저씨가 있는가 하면, <이영돈PD의 먹거리 X파일> 방송에서 처음 지정한 '착한 식당 1호점'이 있다. 쌀을 비롯해 신선한 국내산 식재료로 정직하게 장사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일미식당'이 그곳. 모 여성잡지에서 선정한 전국 향토 맛집 8곳에 들어가기도 한, 종로의 꼭꼭 숨어있는 맛집이다. 주 메뉴는 청국장인데 밥을 미리 지어놓지 않고 주문할 때마다 새 밥을 지어 고슬고슬하게 먹을 수 있다.

시장 한쪽에 예닐곱 정도 모여 있는 국숫집도 빼놓을 수 없다. 주문과 동시에 삶아 쫄깃한 면발을 자랑하는 잔치국수가 단돈 2000원! 4000~5000원짜리 잔치국수와 맛도 양도 뒤지지 않는다. 멸치육수에 유부, 김가루 고명까지 올려 맛까지 훌륭한 잔치국수는 천하장사가 먹어도 배부를 정도의 양을 자랑한다. 이 가격에 국수를 팔 수 있는 비결은 역시 많이 찾아오는 단골 손님들이다. 점심시간에는 자리가 없어 서서 국수를 먹는 사람들도 있단다.

아주머니는 자전거 타고 간 기자가 허기져 보였는지 '무한리필'이 된다고 인정을 베풀었다. 옆 식당의 머리고기가 가득 들어간 순댓국도 단돈 4000원이다. 이렇게 맛있고 싸게 파는 식당에서 무한 리필이라니,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다. 다른 손님들도 그런 마음인지 다 먹은 국수그릇과 찬그릇을 손수 식당 주방에 반납한다. 주머니가 팍팍한 어르신들에게 낙원상가는 말 그대로 낙원이었다.

덧붙이는 글 | * 지난 7월 1일에 다녀왔습니다.
* 허리우드 클래식 극장 ; 지하철 5호선 종로3가역 5번 출구-낙원상가 4층 (문의 02-3672-4231~3)
* 누리집 ; http://www.bravosilver.org



태그:#낙원상가, #낙원지하시장, #허리우드 클래식, #실버영화관, #잔치국수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