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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오이·꽈리고추·깻잎 등을 담은 비닐봉투를 건네며 단골손님에게 너스레를 떠는 편재영(53·사진)씨. 구수하고 정감 있는 말보다, 두터운 신뢰가 느껴지는 그에게 동네 주민들은 값을 깎는 흥정을 하지 않는다. 6월 24일 오후 4시, 저녁을 준비하러 나온 손님들에게 물건을 파느라 바쁜 편재영씨를 산곡고등학교 앞 그의 노점에서 만났다.

판소리 대중화를 위하여
  
판소리하는 장사꾼 편재영씨
 판소리하는 장사꾼 편재영씨
ⓒ 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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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를 대중화하자는 게 내 삶의 모토인데,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지금은 접었어요. 그게 슬픔이죠. 먹고사는 문제를 접을 수는 없잖아요."

경상북도 문경이 고향인 편씨는 7남매 중 여섯째이자 막내와 쌍둥이다. 중학교 졸업 후 서울로 와 직장생활을 하니 회식자리가 많았다. 버스로 이동해 야유회를 갈 때면 노래를 부르게 했는데, 부르지 못한 사람에게 벌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어디 놀러갈 때 차라리 벌금을 낼 정도로 음치여서 노래를 안 불렀어요. 그때는 정말 노래 부르는 게 부담이었거든요."

편씨는 그 당시 소원이 '나만의 노래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단다.

1988년 4월, 서울 중구에 위치한 국립극장에서 '아리랑 축제'가 열렸다. 각지에서 불리던 전국의 아리랑이 한자리에 모였다. 별 생각 없이 바람이나 쐴 생각으로 극장으로 발길을 던진 편씨는 그 중 강원도 정선아리랑에 '필'이 꽂혔다.

"노래가 정말 좋았어요. 듣는 순간 이 노래에 푹 빠져서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죠. 그 후 정선에도 많이 오가곤 했어요. 이 노래를 배우고 나서는 노래를 시키면 포기하지 않고 정선아리랑을 열심히 불렀죠."

사랑하면 알게 된다고 했던가? 아리랑을 사랑하니 비슷한 부류에도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금 등 우리 악기를 배우면서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판소리를 접하고서 또 정말 좋아 푹 빠졌죠. 종로에 판소리학원을 내고 두꺼운 교재도 한 권 만들었어요. 판소리를 대중화해야겠다는 사명이 있었죠."

1993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가 개봉됐다. 당시 서울 종로 단성사에서 개봉했는데 편씨는 영화가 상영된 한 달 동안 극장 앞에서 학원 홍보지를 계속 돌렸다. 그 즈음 판소리 붐이 일어 수강생이 100여 명으로 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생활이 계속 어려워지면서 대전으로 가 친구와 이것저것 장사를 하다가 2000년에 인천으로 와 터를 잡았다.

1987년 민주화 바람이 나에게도

1962년생인 편씨는 열한 살 때 아버지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냈다. 그 뒤 형제들은 근근이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때는 시골에서 먹고 살 게 없으면 순서대로 공장에 취직하러 객지로 떠났어요. 저와 막내 동생도 중학교 졸업하고 같이 서울에 와 공장생활을 시작했죠."

그러나 공부에 대한 열망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편씨는 공장에 다니면서도 검정고시 준비를 위해 학원에 다녔다. 그러다 군대 영장이 나왔고, 제대 후 방송통신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직장에 다니면서 야간대학을 가야하는 형편이라 다른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어요. 제가 입학한 때가 1987년이었는데 당시는 전국적으로 민주화 바람이 불 때였잖아요. 우리 학과 선배가 당시 서울의 모 교회 전도사였는데, 저를 꼬드겨서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서클에도 가입시키고 이른바 '운동권'을 만들었죠."

1987년 당시에는 대학생들이 학교 울타리를 넘어 거리로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다. 그걸 계기로 편씨는 '민주'와 '진보'에 대한 의식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제가 종로에 살 때 그 동네에 진보 인사들이 선거에 출마하면 선거 운동하느라 바빴죠. 생업도 뒷전이었고요."

당시 편씨는 인쇄기획사를 운영했다. 수첩·단체티·볼펜 등을 학생회와 시민단체에 납품했는데, 돈이 전혀 모이질 않았다. 신입생 입학에 즈음해 총학생회에 물건을 건네고 수금을 할 때쯤이면 학생회 간부들이 이미 수배를 당한 상태라 만날 수 없었다. 만나더라도 오히려 용돈을 줘야할 상황이었다.

정선아리랑, 내 고향 정서와 비슷해    

판소리하는 장사꾼 편재영씨
 판소리하는 장사꾼 편재영씨
ⓒ 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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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씨는 많은 아리랑 중에 왜 정선아리랑에 관심이 갔을까.

"지금도 한이 서려있는 것 같은 남도민요가 가슴에 와 닿아요. 판소리도 느린 진양조의 곡을 더 좋아하고요. 자기 정서와 기호가 있나 봐요. 저는 그런 것들이 좋아요. 강원도는 제 고향 산골과 비슷한 산세인데, 거기서 나오는 애잔한 정서가 비슷한 것 같아요."

정선아리랑만 갖고도 충분히 감동했는데 판소리 세계에 입문하고부터는 더 매혹적인 세계가 펼쳐졌다.

"첫사랑같이 빠졌어요. 제가 심각한 음치였거든요. 그런데 판소리를 배우면서 고음이 올라가는 거예요. 미꾸라지가 용 되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요?

저는 모든 사람들이 음치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봐요. 천재적 재능 있는 사람들보다 느리긴 하지만 감동은 더 하죠. 음치의 벽을 깼다는 희열과 감동은 대단합니다."

서양음악인 성악은 발성부터 배우기 쉽지 않지만, 판소리는 자연스럽게 따라 배울 수 있는 장점이 있고 어느 자리에서나 한 자락을 불렀을 때 우리 소리라서 바로 동화될 수 있다고 한다.

"어느 자리, 어느 모임에서든 판소리를 부르면 독특해서 인기가 있죠. 판소리 하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까 나만의 무기가 될 수 있잖아요. 게다가 소리를 모르는 사람도 들으면 바로 친해지고 흥이 나서 분위기에 빠져들 수 있는 장점이 있죠. 판소리 한 대목에 희로애락이 담겨 있어 교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소리이기 때문에, 준비된 게 아니라 몸에서 체득된 거 같아요."

신인부 대상을 거머쥐다

편씨는 판소리를 그냥 취미로 즐기는 걸 넘어 수준급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 작년에는 전주에서 열린 전국판소리대회에서 신인부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판소리대회는 명창부·일반부(전공자)·신인부(동호회)로 나뉘는데, 신인부에는 전공자가 참가할 수 없다.

"대상을 받고 내가 받을 자격이 있는지 혼자 생각하면서 부끄럽기도 했죠. 하지만 쉬지 않고 더 열심히 소리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편씨는 비나 눈이 많이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쉬지 않고 장사를 한다. 정오경에 나와 밤 12시까지 꼬박 12시간을 거리에서 지낸다. 해가 짧은 동절기에는 더 일찍 좌판을 펴기도 한다.

"다행인 게 판소리는 혼자 주저리주저리 할 수 있잖아요. 다른 음악은 악기가 필요하지만 판소리는 혼자 장사하면서나 운전하면서 부를 수 있는 게 큰 장점이에요. 그래서 혼자서도 연습을 꾸준히 할 수 있어요."

장사하면서도 소리를 하는 편씨를 손님들은 익히 봐온 터라 '또 시작하네, 대회 준비하나?' 등 익숙한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매주 일요일 오전, 장사하기 전 서울 강남에 있는 스승에게 사사 받으러 가는 편씨. 그는 판소리 다섯마당 중에 남자소리라 할 수 있는 웅장함이 있는 '적벽가'를 제일 좋아한다.

지난 4월 20일에는 '인천소리여울 제2회 정기연주회'가 부평아트센터에서 열렸다. 1부와 2부로 나눠 진행한 이날 공연에선 다양한 우리 악기 연주와 타령, 판소리가 어우러졌다. 그 중 2부 첫 순서로 '농부가, 왔구나 우리 사위 왔어'라는 창극을 했는데, 편씨는 주인공인 이도령 역을 맡았다.

올 7월 공주대회, 10월 진도의 남도민요대회 참가를 준비 중인 편씨는 "부족하더라도 제가 갖고 있는 재능을 나눠주고 싶어요. 여력이 있으면 생업을 포기하고라도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쳐 주고 싶은데 아직은 그럴 형편이 못돼요. 하지만 열심히 밑천을 만들어야죠. 밑천이란 경제적인 것을 포함해 실력을 기르는 게 아닐까요?"라며 "이제는 나를 위해서라기보다 좀 더 나누기 위해 공부합니다. 특히 인천에서는 만나기 힘든 소리니까 몇 명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모여서 함께 가르치며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시사인천>에 실림



태그:#편재영, #판소리, #정선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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