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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식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소설을 한 편 소개할까 한다. 소설 속에서 묘사된 지식인들은 화려한 외피로 속살을 감추고 있지만 모두 남루하다.

대학과 그 주변을 맴돌면서 정치와 권력의 생리를 천재적으로 이용하여 출세하는 사람들이나 고지식하다 못해 옹색한 사람들, 다시 말해 훌륭한 지식과 지혜를 갖추고 있지만 세상의 위계와 질서에 길들여지지 않은, 그래서 출세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 그들을 보면 안타깝지만 외면할 수 없다. 모두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노란 표지에 나비모양으로 글자들을 수놓았다. 추운 겨울, 죽은 첫사랑 링쩐을 땅에 묻을 때 엄동설한이었는데도 노란 나비떼가 출몰한다.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소설, <풍아송>은 결국 인간 최고의 가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 <풍아송> 표지 노란 표지에 나비모양으로 글자들을 수놓았다. 추운 겨울, 죽은 첫사랑 링쩐을 땅에 묻을 때 엄동설한이었는데도 노란 나비떼가 출몰한다.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소설, <풍아송>은 결국 인간 최고의 가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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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국의 지식인이 쓴 소설 <풍아송(風雅頌)>(예렌커 지음, 김태성 역, 2014년 2월 10일 초판발행, 문학동네)을 읽는 내내 대학에 다니던 때를 떠올렸다. 대학원에서 교수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던 석사 또는 박사과정의 사람들, 취직이나 더 높은 학위과정을 포기하고 과외나 학원강사를 하며 꾸준히 학교에 나와 대학시절의 추억을 곱씹는 나이 먹은 선배들, 무슨 일 때문인지 바빠서 책을 읽거나 뭔가를 연구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 보이던 교수들이 생각났다.

소설의 제목이 <풍아송>이다. 역자 김태성의 친절한 설명을 참고하자.

"흔히, 시삼백(詩三百)이라 불리는 사서삼경(四書三經) 중 하나인 시경(詩經)은 원래 이 천여 년 전 공자가 민간에 떠돌던 시 삼천여 편 가운데 삼백 다섯 수를 골라 채시(采詩)한 결과라고 한다. 이 중 풍(風)은 각 제후국의 민간에 떠돌던 민가이고, 아(雅)는 조정의 음악이며, 송(頌)은 선조들의 덕을 기리는 가공송덕(歌功頌德)의 노래들이라고 한다."

즉, 이천 년 전의 세상에 떠돌던 시(詩) 모음집이 <시경>인데 이 경전이 소설의 제재라는 설명이다. 소설 속 주인공 양커의 새 저서도 이름이 <풍아지송>인데 부제가 - '시경' 정신의 근원에 관한 연구-이다. 결국, <풍아송>은 시경의 시제를 따라 소설 속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로 엮이며 읽으며 생각하는 재미를 주는 소설이다.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무척이나 긴 소설이 쉼 없이 읽힌다.

관저(關雎), <시경>이 한 쌍의 개 같은 남녀을 만났을 때

주인공은 칭옌대학의 중문학과 부교수 '양커'다. 소설의 첫 장면은 딱 우리 신라 때의 향가 '처용가'의 한 대목을 연상케 한다.

어느 날 낮에 집에 들어가 보니 자신의 아내가 외간 남자와 한 침대에서 뒹굴고 있다. 때가 처용가의 배경처럼 밤이 아니고, 또 소설의 주인공이 처용처럼 마당에서 춤을 추지는 않지만, 양커는 어이없게도 아내와 불륜 남에게 사과하고 있다.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해요. 전 그저 작품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것뿐이에요. 먼저 집으로 전화를 해볼 걸 그랬나 봐요. 인기척을 먼저 하고 들어왔어야 했나 봐요."

사과를 한 다음엔 두 불륜 커플에게 무릎을 꿇고 빈다.

"지식인으로서의 명예를 걸고 말하건 데 첫째,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둘째,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아주십시오. 셋째, 무릎을 꿇고 간청하건 데 제발 다음부터는 이런 짓을 하지 말아주십시오."

처용의 춤사위로 아내와 함께 있던 역신은 물러간다. 하지만 이놈의 피고들은 어쩐 일인지 원고가 무릎을 꿇고서 비는데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출거(出車), 필요한 거래

아내와 불륜남은 각각 양커와 같은 대학의 교수, 자오루핑과 부총장, 리광즈다.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관계(關係-중국에서 뭘 하든 없으면 곤란하다는 이른바 '꽌시'다-)다 보니 한 침대를 사용하는 관계로까지 발전한 것임에 틀림없다.

저자는 소설 첫 장의 소제목을 "<시경>이 한 쌍의 개 같은 남녀를 만났을 때"로 하고 있다. 소설을 끝까지 읽다 보면 왜 이런 제목이 사용되었는지 알 수 있다. 대중예술을 강의 하는 자오루핑은 양커의 <시경>을 연구한 새 저서 <풍아지송>을 그대로 베껴 자신의 저서로 각색한다. 그리고 그녀의 정부이면서 부총장(후에 자오의 내조로 총장이 됨) 리광즈는 자오루핑을 양커로부터 완전히 빼앗는다. 새 저서와 아내는 양커의 모든 것이라고 보면 된다.

<시경>연구에 몰두하던 양커는 낡은 대학의 기숙사가 기습적인 황사로 망가지자 시위하던 학생들 틈에 끼어있다가 학생들을 선동한 교수로 지목된다. 권모술수에 능한 아내와 부총장 리광즈에 의해 '광인(狂人)'이 된 양커는 정신병원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러고 보니 양커는 재미 중국인 소설가, 하진이 쓴 <광인-The Crazed>이라는 소설의 주인공과도 닮아있다. 공산당 일극체제의 중국이 경제적인 면에서는 효율을 추구하며 빠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경제성장에 따른 부작용과 일당 독재가 낳은 문제들, 이를테면, 경제성장이라는 자본의 논리에 감춰진 어린 소녀들의 성 매매라든가, 이른바 '지식인'으로 다양한 목소리를 내며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요원한 희망인가 하는 사실 등, 소설의 저자 옌렌커는 이러한 문제들을 직시한다.

비풍(匪風), 따스한 집

소설의 저자 옌렌커는 원래 제목을 <귀향>으로 정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주인공이 도시의대학에서 완전히 버림받고 찾는 곳은 자신의 첫사랑이 사는 고향이기도 하고, 첫 장에 나오는 구절인 "누구나 맨 처음 인생의 새로운 길을 따라 어디로 갔든 결국 마지막에는 옛길을 따라 되돌아 오는 수밖에 없다"는 표현에서 그가 왜 제목으로 귀향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주인공 양커는 황하강 유역의 '바러우산맥' 출신인데 20살이 되기 전에 고향의 푸링쩐이라는 처녀와 약혼하지만, 촌에서 경성의 대학으로 올라온 그는 학업과 출세를 위해 자신에게 도움을 주던 지도교수의 딸, 자오루핑과 결혼한다. 양커는 고향의 링쩐과 파혼하고, 잊고 살지만 링쩐의 마음 속엔 양커뿐이다. 그러나, 자오루핑도 결국은 요령없고 고지식한 시골출신 남편인 양커를 버린다. 시골의 링쩐과 양커는 모두 도시의 삭막함이 만든 희생자들이다. 시골은 특히, 자양분이 바닥난 시골은 유기되고 급기야 용도 폐기된다.

소설 속 양커의 약혼녀였던 링쩐이 경영하는 식당의 아가씨, 장씽얼이 전하는 지식인에 대한 묘사를 보자.

"제가 어렸을 때 우리 집 돼지 우리 옆에 플라타너스가 한 그루 있었어요. 나무를 베려고 땅을 파고 나서야 알게 됐어요. 그 나무가 굵고 단단하고 생기 있게 자란 건, 그 뿌리가 전부 돼지우리 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걸 말예요. 돼지우리 바깥쪽에는 뿌리가 하나도 없었어요. 지식인들도 이 나무랑 똑 같은 것 같아요. 뿌리는 남몰래 돼지우리 밑에 숨기고 몸통과 가지, 잎은 돼지우리에서 십만 팔천 리나 떨어진 곳으로 피해 있거든요. 교수님 같은 지식인들은 가짜로 절개를 지키는 척하는 나무예요, 맞죠?"

가끔 몸도 파는 이 아가씨가 양커에게 한 이 말은, 소설의 저자 옌렌커가 보는 중국 주류사회를 이끌고 있는 지식인들의 자화상이다.

반수(泮水), 우리는 각자 괴물을 잉태하고 있다

소설에서는 지식인들뿐 아니라 지방마다 뿌리내리고 있는 변태적인 성매매의 횡행도 비판의 대상이다. 양커의 고향 바러우산맥 근처엔 속칭 '천당거리'가 있다. 이 거리에서는 호텔과 이발소, 식당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약국에서까지 접대부 여성을 만날 수 있다. 말하자면, 천당거리에서라면 모든 젊은 여자와 단돈 몇 백 위안(우리 돈 몇 만원)이면 어떤 거래라도 가능하다. 그래서 이 거리 이름이 천당거리다. 

링쩐은 글을 모르기 때문에 지식인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경우와 도리에 밝다. "이천여 년 전 우리의 조상들은 사랑이 바로 인류정신의 최종적인 가원(家園)이자 정신을 잃은 사람들의 가장 근본적인 고향이었음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지요"라는 양커의 <시경>에 대한 설명에서 보듯, 양커는 이론적으로는 인간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 보이지만, 정작 인간사의 도리를 실천하고 있던 사람은 촌에 사는 일자무식의 링쩐이었다.

고지식하고 대단한 학구열을 지녔고, 나름 원칙을 고수하는 주인공 양커는 결국 아내와 학교당국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는다. 자신이 버린 고향을 찾게 되고 첫사랑 링쩐을 만난다. 오매불망 양커와의 재회를 꿈꾸던 링쩐은 오해로 인해 자살을 택하게 된다. 양커는 다시 자신이 근무하던 대학을 찾고 아내인 자우루핑과 내연남이자 이제는 대학총장이 된 리광즈를 만나지만 자신이 버려졌다는 사실만 확인한 꼴이 되고 만다. 양커는 정신적으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갈류(葛藟), 번화한 황혼

지식사회에 대한 분노와 환멸은 엉뚱한 방향과 방법으로 발산되는데 이는 지식인 스스로에 대한 자조와 조롱이다. 양커가 발견한 시경에 실리지 못하고 누락된 시가 새겨진 수백의 돌무더기와 옛 원형극장 터에는 천당거리에서 몸을 팔던 소녀들과 대학에서 적응하지 못한 양커와 같은 처지의 남자교수들이 모여든다.

모여 함께 살게 된 남녀들은 양커가 제정한 규칙으로 한 번은 남자가 또 다른 날은 여자가 짝을 정하게 되는데 이 과정은 지식인에 대한 조롱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짝을 선택하는 기준이 오줌 발의 세기이기 때문이다. 이를 주류에서 낙오한 자들의 집단적 광기로 보아야 할지, 원시의 자연으로 돌아간 인간들이 본성을 회복한 것으로 보아야 할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소설 속 주인공이면서 이야기의 화자이기도 한 양커는, 곧 저자 옌렌커이기도 하다. 저자의 연보를 보게 되면 <풍아송>이 그가 쓴 최초의 자전적 소설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양커는 유약한 듯 보이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학문에 대한 열정과 끈기는 그가 훌륭한 학자적 자질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그래서 소설은 중국문학이라고 하는 가장 중국적인 것들을 외면하고 지식으로 포장된 흥미위주의 자극적이며 실용적인 것들만 추구하는 학생과 교수, 교육과 복지로부터 소외된 소도시나 지방의 젊은이, 특히 일탈을 할 수밖에 없는 젊은 여자들을 통해 현재의 중국을 고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창녀들과 교수들을 위해 원시적 집단을 조직해주고 안식처를 제공했으며, 짝짓는 룰까지 제공한 양커가 혈혈단신 어디론가 홀연히 떠나는 장면으로 소설은 마무리 된다. 그의 저서인 '시경' 정신의 근원에 관한 연구의 완성을 위한 여정이 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양커가 왠지 더 이상 인간사에 참여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아 보인다. 인간사에 초월한 것일까 아니면, 인간사를 포기한 것일까? 결국, 양커는 첫사랑 링쩐이 죽고 없는 세상에서는 '시경' 연구 외에 더 이상 의미 있는 일이 없다고 판단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천여 년 전 삼천여 수의 시가 노래한 대상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그 기본이었을 것이기에.


풍아송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문학동네(2014)


태그:#풍, #아, #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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