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검찰이 지난 1994년 음란비디오 일제단속을 벌여 압수한 각종 비디오 테잎과 레이저 디스크. (기사와 관련 없음)
 검찰이 지난 1994년 음란비디오 일제단속을 벌여 압수한 각종 비디오 테잎과 레이저 디스크. (기사와 관련 없음)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기사 보강 : 4일 오후 8시 18분]

평범한 비디오 대여점 주인이 불법복제 단속을 당한 뒤 11년째 법정 다툼을 계속하고 있다. 비디오 대여점 주인은 압수된 비디오물 수천 점 중 판결에 의해 불법성이 인정되지 않은 나머지를 돌려달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검찰의 허술한 압수물 관리에 의해 돌려받아야 할 비디오물의 상당수는 행방이 묘연한 상황이고, 대법원의 최종 판단은 4년째 지연되고 있다.

'기타 등등'은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 2003년 4월 불법복제 단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상필(60)씨가 운영하던 서울 불광동의 비디오 대여점과 집에서 비디오물 수천 점을 압수한 검찰은 그해 6월 주씨를 정품 비디오물과 등급미분류 음란물을 불법복제하고 이를 대여한 혐의 등으로 불구속 기소했다.

1심 결과는 무죄. 검찰은 항소하면서 공소대상 비디오물을 773점으로 축소했다. 2심 재판부는 이 중 593점에 대해 불법을 인정하면서 다만 선고 유예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대법원에서 확정됐고, 불법성이 인정된 593점은 몰수처분됐다.

그렇게 끝나는 듯했던 이 사건은 주씨가 국가를 상대로 압수물을 돌려달라고 소송(압수물환부소송)을 제기하면서 새로운 상황에 접어들었다. 이 소송 2심에서 서울고법은 압수물 목록표에 명시된 2749점 가운데 이미 돌려준 1200점을 제외하고, 244점을 돌려주라고 판결했다. 몰수처분 판결이 난 건 593점인데 왜 244점만 돌려주라고 했을까?

검찰이 법정에 제출한 압수물목록표 일부분. 압수물 제목을 'E.t.c'(기타등등)으로 표기, 실제 압수된 물건이 뭔지 알 수 없다.
 검찰이 법정에 제출한 압수물목록표 일부분. 압수물 제목을 'E.t.c'(기타등등)으로 표기, 실제 압수된 물건이 뭔지 알 수 없다.
ⓒ 안홍기

관련사진보기


검찰이 지난 2003년 주씨를 불법복제혐의로 기소하면서 법정에 제출한 압수물 목록표에 품명을 'E.t.c'로 기재한 비디오물 894점 때문이다. 이 'E.t.c 894점'은 비디오물 제목이 'E.t.c'인 게 아니라 '이것저것 기타 등등'이라는 의미로 쓰여진 품명이다. 재판부는 "명확히 특정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주문에 설시할 수 없으므로 인도청구는 부적법하다"고 판단했고 결국 '돌려주지 않아도 되는 물건'이 됐다.

그런데 더 이상한 점은 E.t.c 894점 중 음반비디오물법 위반 재판에서 불법이 인정된 비디오물이 188점 포함되어 있다. 결국 특정되지 않은 압수물이 유죄의 증거로는 사용됐지만, 특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머지는 돌려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미 검찰이 주씨에게 돌려줬다는 비디오물 개수도 서로 엇갈리고 있다. 2심 재판부는 '현재 보유 중이지 않은 걸로 봐서 이미 돌려준 것으로 추정한다'는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여 지난 2005년 11월 주씨가 2749점 중 1200점을 이미 돌려받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주씨는 596점만 돌려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검찰은 먼저 돌려준 비디오물의 목록도 작성하지 않아 이를 입증할 증거도 없다.

엉망인 검찰의 압수물 관리

이런 모든 상황은 검찰의 압수물 관리가 엉망인 데에서 기인한다. 지난 2003년 4월 한국영상협회 직원들과 검찰 수사관이 불법복제 단속으로 비디오 대여점과 주씨의 집에서 비디오물과 컴퓨터 등을 압수한 뒤 작성해 보고한 압수조서에는 압수물이 총 2593점(비디오물만 2586점)으로 돼 있다. 그런데 음반비디오물법 위반 재판 1심에서 검찰이 제출한 압수물 목록표엔 2749점으로 늘어났다. 추가 압수가 없었는 데도 말이다.

압수조서에 기재된 압수물의 관리도 엉망이었다. 2003년 4월 22일자로 작성된 검찰의 압수조서 내용은 테이프 1050개, DVD 172개, VCD 1350개, LD 15개 등 비디오물만 2586점이다. 2005년 11월 7일 서울중앙지법 증거물과가 작성한 인수인계 확인서에는 테이프 986개, DVD 199개, VCD 1316개, LD 15개 등 2516개를 형사6부로부터 인수·인계했다고 돼 있어 70점이 줄었을 뿐 아니라 매체별로도 수량 차이가 크다.

이런 상황에 대해 서울중앙지검 증거물과는 2005년 11월 21일 작성한 조사보고서에서 "2003년 5월 20일 형사6부로부터 압수물건총목록, 압수조서, 압수목록, 소유권포기여부확인서를 받고 서류상으로만 압수계에서 접수를 하고 실제 압수물은 형사6부에서 관리한다하여 이후 공판시까지 계속 형사6부에서 관리해왔다"고 보고했다. 압수물은 영치 사무담당직원에 인계돼 보관하고 수사상 필요할 땐 증거물과에 압수물 대출신청을 해 수사에 활용하도록 돼 있는 검찰 압수물 사무규칙을 지키지 않았다.

주씨가 인도청구한 비디오물은 압수물 목록표상에 있는 물건들만은 아니다. 주씨는 음반비디오물법 위반 재판에 검사가 제출한 피의자신문조서 등 범죄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물에 기재되거나 사진으로 찍힌 비디오물 9점도 돌려달라고 청구했다. '떡 한번 치면 안 잡아먹지', '모텔리어', '턱시도', '스토커', '모닝섹스', '연변연가', 'LORD RING'('LORD OF RINGS'의 오기), '바-이', '빨강머리 지나' 등이다.

이에 대해 국가의 소송수행자는 2점을 제외한 7점은 압수물 목록표에 없어 돌려줄 수 없다고 재판부에 답변했다. 유죄의 증거로 제시된 비디오물들에 대해 '애초에 압수한 적이 없다'는 답변을 내놓은 것이다.

2003년 8월 20일자 검찰 수사보고서.  'LORD RING'과 '빨강머리 지나' 등을 예시하면서 불법복제 사례로 보고했다. 그러나 이후 압수물 환부소송에서 국가는 "압수한 적이 없는 물건"이라고 답변했다.
 2003년 8월 20일자 검찰 수사보고서. 'LORD RING'과 '빨강머리 지나' 등을 예시하면서 불법복제 사례로 보고했다. 그러나 이후 압수물 환부소송에서 국가는 "압수한 적이 없는 물건"이라고 답변했다.
ⓒ 안홍기

관련사진보기


4년째 대법원에서 잠자는 판결

주씨가 제기한 압수물 환부소송은 현재 대법원에서 4년째 잠자고 있다. 그동안 주씨는 8차례 판결촉구서를 냈지만 판결이 나오지 않고 있다. 검찰을 대신한 '피고 대한민국'은 20여 차례나 소송대리인 지정·해임·변경서 제출을 반복하고 있다.

사실 주씨가 음반비디오물법 위반 재판에서 선고유예라는 판결 결과에 '이 정도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압수당한 비디오물을 포기했다면, 단속 이후 11년간 소송을 벌이지 않아도 됐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고 말했다.

주씨는 이 사건의 원인을 단순히 검찰의 '압수물 관리 엉망'이 아니라 '증거물 날조'라고 주장한다. 주씨는 "불법복제와 음란물 대여의 범죄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로 제출된 비디오물에 대해 결국 '압수된 적이 없다'고 하는 것과 압수물 개수가 들쭉날쭉한 것은 결국 사건을 날조한 것"이라며 "영장도 없이, 압수목록 교부도 하지 않고 불법으로 압수한 압수물을 10년 동안 돌려받지 못한 국민으로서 과연 법의 존재 여부와 사법부의 공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검찰의 이해할 수 없는 압수물 처리와 미반환으로 인해 본 재판의 공정성까지 의심받고 있는 형국이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차장인 박주민 변호사는 "압수물은 몰수되기 전에는 엄밀히 말해 개인의 재산이다, 이 소송은 검찰이 일반 사건에서 얼마나 압수물을 소홀히 다루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면서 "만약 주씨가 일반인이 아니라 유명인이었거나, 또는 이 사건이 언론의 주목을 받는 사건이었다면 검찰이 이렇게 압수물을 아무렇게나 관리했겠는가"라고 말했다.

국가를 상대로 압수물환부소송을 벌이고 있는 주상필씨의 대법원 사건진행내용. '피고 대한민국'이 소송대리인 지정·변경·해임을 수시로 반복하고 있다.
 국가를 상대로 압수물환부소송을 벌이고 있는 주상필씨의 대법원 사건진행내용. '피고 대한민국'이 소송대리인 지정·변경·해임을 수시로 반복하고 있다.
ⓒ 대법원

관련사진보기




태그:#비디오, #증거관리, #검찰
댓글14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상근기자. 평화를 만들어 갑시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