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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1967년 대통령에 재선되었다가 1969년 3선 개헌을 통해 1971년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여러분께 다시는 나를 찍어달라고 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마지막 대선 출마임을 강조했다. 상대 후보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박정희가 헌법을 고쳐 선거가 필요 없는 총통이 되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결국 현실이 되었다. 


영구집권을 꿈꾸던 박 대통령은 자신의 공약(?)처럼 국민이 직접 투표할 일이 없도록 헌법을 고쳐버렸다.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중단시키는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박 대통령은 새로운 헌법을 준비한다. 당시 보도에도 나오지만 이미 '유신'이라는 헌법 이름까지 생각해둔 듯하다. '유신'이란 표현은 그 전까지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생소한 말이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제시한 개헌 명분이 참으로 특이하다. 냉전시대, 남북 대화를 예상치 못한 시기의 헌법으로는 새로운 국면에 적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가 냉전이 사라지던 시기였을까? 물론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후반까지를 '데탕트(Détente)'라고 하여 긴장이 완화된 시기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고 박정희 정권은 대규모 파병까지 한 마당에 마치 냉전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시대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상당히 억지스럽다. 


냉전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마도 남북관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남북은 계엄령 선포 직전인 7월 4일 통일의 3원칙인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을 합의한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박 대통령은 통일에 대한 기대감이 치솟고 있던 당시 분위기를 이용해 자신의 영구집권 야욕을 추구한 셈이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은 국민들이 개헌을 반대하면 남북대화를 원치 않는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협박까지 한다. 대화의 방법이 아닌 통일 방안은 대결과 전쟁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유신헌법은 기존 헌법과 달리 남북대화를 통한 통일을 추진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을까? 이 부분은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유신헌법 제정 과정부터 살펴보자. 


1972년 10월 27일 한태연, 갈봉근 등의 학자들과 김기춘(현 청와대 비서실장) 등의 검사들이 작성한 유신헌법안이 비상국무회의에서 의결·공고되었다. 당시는 비상계엄 체제로 국회가 해산됐고 비상국무회의가 국회의 역할까지 하고 있었다. 비상계엄을 선포한 지 10일 만에 유신헌법안이 나온 것을 보면 10·17 친위쿠데타를 오래전부터 상당히 치밀하게 준비해왔음을 알 수 있다. 


유신헌법안은 11월 21일 국민투표에서 91.5%의 압도적 찬성으로 확정, 12월 27일에 공포되었다. 유신헌법안이 국민투표에서 통과되자 박 대통령은 12월 14일 0시를 기해 계엄령을 해제하고 다음날인 15일에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해 2359명의 대의원을 선출했다. 이들은 12월 23일 단독 입후보한 박정희를 99.9%(무효 2표)의 압도적 지지로 대통령에 선출했다. 


그런데 이처럼 압도적 지지를 받았던 개헌을 왜 굳이 계엄령까지 선포하며 추진했을까? 비상계엄 상태에서 국민들의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언론, 출판, 보도, 방송도 사전 검열을 받고, '남북대화 중단' 협박까지 나왔으니 91.5%가 정상적인 투표 결과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71년 5월 25일 있었던 제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박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공화당은 113석을 얻어 7대 총선에 비해 16석이나 줄어든 반면, 신민당은 89석을 얻어 44석이나 늘어났다. 전체 의석수가 175석에서 204석으로 29석이 늘어난 점을 감안하면 박정희 정권이 느꼈을 위기의식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민주공화당이 전체 의석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지 못해 야당의 협조 없이는 개헌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1969년 3선 개헌을 했던 7대 국회의 경우 공화당이 전체 175석 가운데 129석으로 4분의 3 가까이 차지하고 있었으니 상황이 크게 변했던 셈이다. 


박 대통령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개혁을 시도한다면 오히려 혼란만 더욱더욱 심해질 뿐"이라고 이야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처럼 유신독재는 출발부터 비상계엄령을 통한 친위쿠데타라는 반민주적 방법으로 태어난 최악의 군사독재였다. 


1972년 10월 18일자 동아일보 1면 보도 내용
(굵은 글씨는 필자 강조)
박정희 대통령은 17일 오후 7시 대통령특별선언을 발표, 이 시각을 기해 국회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헌법의 일부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박 대통령은 이 특별선언을 통해 ① 72년 10월 17일 오후 7시를 기해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헌법의 일부 조항효력을 정지시킨다. ② 일부 효력이 정지된 헌법조항의 기능은 비상국무회의에 의해 수행되며 비상국무회의의 기능은 현행헌법의 국무회의가 수행한다. ③ 비상국무회의는 1972년 10월 27일까지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을 공고하며 이를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이내에 국민투표에 붙여 확정시킨다. ④ 헌법개정안이 확정되면 개정된 헌법절차에 따라 늦어도 금년 연말 이전에 헌정질서를 정상화시킨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이날 6시 청와대에서 긴급국무회의를 주재, 이 같은 자신의 결정을 직접 국무위원들에게 피력했으며 육성으로 전국의 라디오와 텔레비존망을 통해 이를 밝혔다.

박 대통령은 이 특별선언에서 우리에게 가장 긴요한 것은 남북대화를 뒷받침하고 주변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모든 체제의 시급한 정비'라고 말하고 "우리 헌법과 각종법령 그리고 현 체제는 동서양극체제하의 냉전시대에 만들어졌고 하물며 남북의 대화 같은 것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시기에 제정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국면에 처해서는 마땅히 이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로의 일대 유신적 개혁이 있어야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개혁을 시도한다면 오히려 혼란만 더욱더욱 심해질 뿐이므로 '국민적정당성을 대표하는 대통령으로서' 비상조치로서 체제개혁을 단행키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또 "만일 국민여러분이 헌법개정안에 찬성치 않는다면 나는 이것을 남북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국민의 의사표시로 받아들이고 조국통일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것임을 아울러 밝혀둔다"고 말했다.



태그:#유신, #유신독재, #박정희, #친위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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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번영을 여는 북한 전문 통신 [NK투데이]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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