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유령' 같은 '종북이'에게

안녕, 종북아. 난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야. 1980년대 끝자락에 대학에 입학했어. 그때는 네 형들인 '친북이'와 '용공이'가 모진 고난을 받던 시기였지. 그뒤로 시절이 조금 좋아지는 듯했어. 고통 받던 친북이와 용공이는 친구들과 함께 조용히 산속으로 들어갔지.

그로부터 20여 년이 훌쩍 지났어. 그런데 이번에는 친북이와 용공이 대신 어린 종북이 네가 불려나왔어. 너희 아버지 '빨갱이'와 그분 친구들, 그리고 친북이와 용공이가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니. 지금도 그 시절의 서슬퍼런 분위기를 아프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그런데 다시 네가 불려 나오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어.

우리나라가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쯤은 잘 알아. 아무리 그렇더라도 네 아버지와 형들 그리고 네가 겪는 부당한 대우를 생각하면 정말 사람들이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단다. 너희 식구가 편하게 보낼 수 있는 날은 언제쯤 올까. 군부독재가 끝난 지 20년도 훨씬 지난 지금, 내가 이런 편지를 쓰게 될 줄은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못했어.

사실 난 네가 언제 태어났는지도 잘 몰랐어. 네 식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대충 만들어낸 줄로만 알고 있었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네 태생을 알아보기 위해 이곳저곳을 찾아봤단다. 넌 2000년대 초에 태어났더구나. 이제 기껏해야 열서너 살. 그런데도 지금 너는 네 아버지나 형들 못지 않게 엄청난 위력과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구나.

혈통·이념 논쟁에서 탄생한 '종북'

알고 있니? 네 탄생 과정을 살피다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됐어. 네가 태어나는 데 형 '친북이'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 말이야. 2001년 11월 30일, 민주노동당 황광우씨 등이 민주노동당 기관지와 누리집 등에 '사회당 동지들에게 드리는 7가지 질문'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어. 얼마 뒤인 12월 11일, 한국사회당은 이에 대한 반박 글을 발표했지.

그때 한국사회당은 '친북이'와의 구별을 위해 어디선가 '종북이' 너를 데려왔어. 한국사회당과 민주노동당 사이에서 벌어진 '반(反) 조선노동당' 논쟁 와중에 갑자기 네가 나타난 거야. 그해 한국사회당의 원용수씨는 민주노동당의 통합 제안에 반대하면서 "조선노동당의 외교정책을 우위에 놓는 '종북 세력'과는 당을 함께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지. 황광수씨의 그 말은 종북주의 논쟁을 본격화한 도화선이 됐어.

어린 너는 잘 모르겠지만, 한국사회당이나 민주노동당은 모두 민중과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정당들이야. 한 집안 한 식구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그 집안 안에서 난데없는 혈통·이념 논쟁이 벌어진 거야.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 혈통·이념 논쟁이 민주노동당 내부에서 불거져 바깥으로 퍼져 나가면서 일파만파 커졌다는 거지.

2006년에 일심회 간첩 사건이 터진 건 알고 있지? 민주노동당의 일부 당 간부들이 관련된 사건으로 드러났어. 사회적인 파장이 엄청났었지. 그때 노동당 내 민중민주(PD) 계열에서는 관련 당직자의 제명을 요구했어. 그런데 이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어. 결국 2008년 2월, PD계열의 조승수씨가 노동당 내 다수파인 민족자주(NL) 계열을 '종북주의'로 규정한 뒤 탈당해 버려. 유명 정치인이던 노회찬·심상정도 그 뒤를 따랐지. 그렇게 해서 새 정당인 진보신당이 만들어졌어. 유력한 진보정당이던 민주노동당이 둘로 갈라진 거야.

사실 PD계열과 NL계열의 대립은 1980년대부터 계속 이어져온 진보 정파의 다툼이었지. 정치를 하면 한 집안 식구끼리도 의견 대립이 생길 수밖에 없어. 그러다 보면 이런저런 정파도 만들어지기 마련이지. 그렇게 만들어진 무리가 서로 치열하게 토론하고, 때로는 머리를 맞대면서 함께하는 게 민주주의 정당 아니야? 정파 갈등이나 대립은 그 자체로 절대악이 아니라는 이야기지.

그런데 난데없이 혈통·이념 논쟁이 벌어지고, 그 와중에 탈당이니 분당이니 하는 무리수가 생기니 누가 너희 집안을 좋게 보겠니. 아무리 대의명분이 숭고하더라도 한 집안 식구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꼴은 누가 봐도 좋게 보이지 않을 거야. 더군다나 가족주의 문화가 유난한 우리나라 아니겠니. 지금 그 민주노동당의 직계 후신인 통합진보당이 흘리는 눈물 속에 그에 대한 회한이나 반성·참회가 깃들어 있을까?

북을 추종하는 경향? 이걸 어떻게 판단할까

무엇보다도, 민주노동당 안에서 벌어진 논쟁 와중에 난데없이 종북이 네가 끼어든 것은 최악이었어. 도대체 너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넌 대체 누구니? 이렇게 말하기 뭣하다만, 솔직히 네 근본은 누구도 뚜렷이 말할 수 없잖아. 그래도 혹시나 해서 인터넷 '위키피디아'를 찾아봤단다. 아니나 다를까. 똘똘하다는 대한민국 누리꾼들조차 너 '종북이'를 고작 이렇게 정의해 놨더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집권 정당인 조선로동당과 그 지도자인 김일성·김정일·김정은 등을 추종하는 경향.'

북한의 조선로동당과 그들의 3대 지도자를 어느 정도 따라야 '추종'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추종하는 경향'은 누가 어떻게 판단할까? 너를 처음 끌어들인 원용수씨나, 너를 핑계로 당을 빠져나간 조승수씨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야. 당이 '거창한' 간첩 사건에 연루돼 위급한 상황에 놓였으니 생존 전략 차원에서라도 너를 들먹이지 않을 도리가 없었겠지.

하지만 지내놓고 생각해 보니 그들 모두 좀 더 신중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어. 당 안의 누군가가 명확히 간첩으로 드러났다면, 당연히 제명하고 법적 처벌을 받아야지. 하지만 '북한을 추종하는 경향'이라니…. 그들은 대체 그걸 가려낼 수 있다고 여긴 걸까? 엉뚱한 사람이 네가 돼버리는 상황을 그들은 예상하지 못한 걸까? 간첩인지 아닌지도 확실치 않은 상태에서, 그저 간첩 사건에 연루됐다고 해서 한 사람을 당 밖으로 내치라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쉬이 납득할 수 없어.

네 태생이 그랬으니 너를 진짜로 싫어하는 반대편 사람들은 얼마나 신이 났겠니. 아니나 다를까. 정말 근본도 없이 날뛰던 이들이 너를 마구 불러대더구나. 그들은 손안에 든 권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네 이름을 덧씌웠지. 오죽하면 너희 집안과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까지 네 이름이 번져갔을까. '종북 판사'니 '종북 검사'니 하는 식으로 말이야.

한 마디로 자기네 맘에 안 들면 무조건 네 이름을 갖다 붙인 거야. 그 사람이 진짜 너인지 아닌지는 전혀 따질 필요가 없어. 네 아버지나 형들 때도 그랬잖아. 그냥 아무 말 필요 없이 싫어하는 사람에게 '너 빨갱이지' 한 마디 하면 그만이었지. 무슨 말이냐고, 나는 '친북이'나 '용공이'가 절대 아니라면서 버티는 이들에게는 고문과 같은 말도 못할 핍박이 뒤따르기도 했어. 그렇게 해서 그들에게는 '간첩'이라는 무시무시한 딱지가 붙여졌지.

간첩, 참 고색창연한 말이야. 한때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게 간첩이라는 말이 있었어. 실제로 남한과 북한 모두 간첩으로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만들었던 때가 있었지. 한홍구 선생의 <대한민국사>(3권)를 보니 1972년까지 북에서 실종됐거나 사망한 북파 공작원 수만 무려 7700여 명이 넘더구나. 살아 돌아온 사람까지 포함하면 1만 명을 훌쩍 넘을 것이라고 해. 북파 간첩이 이 정도니, 이른바 대남 적화 야욕을 가진 북한이 남한으로 보낸 간첩 수는 얼마나 많았겠니.

툭 하면 튀어나온 꼭 나온 '간첩 사건'

그래서였을까. 간첩이 절정에 달했던 1960년대 후반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지. 1968년에는 박정희 목을 따겠다고 북한 124부대가 청와대를 기습하는 사건이 일어났어. 1969에는 동해안 산악 지대인 울진·삼척 등지에 대규모 무장공비가 남파됐다가 전멸되기도 했어. 그곳에 농촌혁명 근거지를 건설한다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가졌다니 참 놀랍지?

그러다 보니 간첩 공포증이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어. 코메디 같은 일도 생겨났지. 가수 김추자의 노래 중에 <거짓말이야>가 있었단다. 그런데 그 노래를 부르면서 김추자씨가 추던 춤 동작이 간첩 접선 신호라는 황당한 소문이 나돌았어. 몸을 묘하게 뒤틀면서 왼손 엄지손가락을 들어 한쪽을 가리키는 동작이었지. 그뒤 어떻게 됐는지 아니? 놀랍게도 <거짓말이야>는 금지곡이 되고 말았어.

진짜 무서운 일은 그 뒤부터 일어나기 시작했어. 정권이 불리할 때마다 대규모 간첩 사건이 빵빵 터지기 시작한 거야. 1971년에 '만들어진' 재일동포 형제 간첩단 사건 들어봤니? 보안사령부는 이 사건을 <대공 30년사>에서 '대공 활동 사상 획기적인 금자탑'으로 자화자찬했단다. 그런데 이 사건의 주인공인 서승·서준식 형제는 고국을 그리워해 모국어를 배우겠다고 찾아왔을 뿐이야. 진짜 간첩이 아니었단 말이지.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71년 4월 중순이야. 40대 기수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대학가에서는 교련반대 데모가 한창일 무렵이었지.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불리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빅 이벤트'가 절실할 수밖에 없었어. 그런 상황에서 서승·서준식 형제는 덫에 걸려든 사냥감이 돼버렸던 거야. 무지막지한 고문에 절망하던 서승씨는 경유 난로의 연료통을 뒤집어쓰고 불을 붙인 뒤 스스로 목숨을 버리려고까지 했지.

공안검사 출신 국회의원이던 정형근이 남한 내 고정 간첩이 몇만 명이니 하며 떠들던 때가 불과 십여 년 전이야. 서승씨 형제 사건과 같이 간첩 조작사건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건 1970년대 초반이었어. 그뒤로 부정한 권력은 잊힐 만하면 간첩 사건을 터뜨렸지. 너무나 뻔하게 터져대니 어지간한 국민들은 면역이 들었을 법도 해. 그런데도 여전히 많은 이가 '간첩'이란 소리를 들어도 화들짝 놀라지. 정형근이 고정 간첩이 몇만이니 하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던 배경이 여기에 있었을 거야.

마녀사냥 횡행하는 대한민국, 과연 '천국'일까

그런데 그런 분위기가 다시금 펼쳐지려 하고 있어. 저 북쪽에 있는 너의 '진짜' 친구들, 그러니까 '만들어진' 간첩이 아니라 '순도 100퍼센트'의 진짜 간첩이 꼭 있을 필요는 없어. 그저 마음에 안 드는 사람 이름 앞에 네 이름 '종북'만 붙이면 되지. 그러면 그는 진짜 간첩에 버금가는 '화형식'을 당하게 돼. 일종의 '마녀사냥'이 시작되는 거야.

그렇게 해서 지금 우리나라는 종북 정당, 종북 의원, 종북 목사, 종북 신부, 종북 승려, 종북 교사, 종북 교수, 종북 노동자 등등의 수많은 '마녀'들을 갖게 됐단다. 네 이름을 달고 있는 이들은 일일이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지. 권력 입맛에 맞지 않고 조금만 입바른 소리를 하면 무조건 네 이름이 붙으니 그 수가 많아질 수밖에 더 있겠니?

종북아, 차라리 잘된 일일까? 누구라도 삐딱한 소리를 조금이라도 하게 되면 네 이름을 갖게 되는 게 말이야. 여기저기 네 이름을 단 가짜 종북이가 넘쳐나면, 사람들이 지겨워서라도 '종북이란 말, 이제 고마 해라, 마이 묵엇따 아이가' 뭐 이런 말을 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여전히 '고정 간첩 3~5만 명설'을 믿는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그래,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러니 이렇게 말해 보면 어떨까. 평범한 시민이 정권을 향해 부정선거 의혹을 철저히 수사하라고 말할 때, 교사가 아이들에게 불의에 눈 감지 말고 정의롭게 살라고 가르칠 때, 회사와 공장에서 노동자가 입바른 소리를 한마디 할 때, 혹여 누군가가 그들에게 눈을 외로 치뜨며 "너 종북이냐?"라고 묻거든 "그래, 나 종북이다"라고 말이야. 그렇게 해서 '종북'이라는 이름을 누구에게나 친한 벗처럼 만들어버리는 거야. 괜찮은 생각 아니니?

내가 오죽하면 이런 말을 하겠니. 난 그 근본도 알 수 없는 네가 한 집안 다툼 속에서 태어난 것만도 안타까워 죽겠어. 그런 너를 이용해 너의 또 다른 친구들을 잡아 족치는 이 땅의 '종북 혐오주의자'들을 보면 피가 거꾸로 돌아. 도대체 네가 무슨 무지막지한 일을 저질렀다고 그들은 그렇게 눈에 핏발을 세울까. 가짜 종북이들은 다들 내라는 세금 내고 이 땅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말이야.

종북아, 난 사실 네가 '유령'이라고 믿고 싶어. 아니, 너는 분명히 '유령'일 뿐이야. 상식적으로 보자고. 대한민국 천지에 북한의 3대 세습을 '추종하는 경향'을 보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정치적 반대자를 잔혹하게 핍박하고, 주민들의 일상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그런 체제를 '추종하는 경향'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정말 내 앞에 데려와 보라고 말하고 싶어.

그런데도 '종북 혐오주의자'들은 있지도 않은 너를 부르며 평범한 사람들을 핍박하는구나.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게 뭘까. 정말로 '미치도록 잡고 싶은 간첩의 추억'에 푹 빠진 나머지, 있지도 않은 간첩을 만들어내기 위해 애먼 사람 이름 앞에 너의 '종북'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권력 입맛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완전히 솎아내 자신들만의 '천국'을 만들려고 그러는 게 아닐까? 종북몰이가 마녀사냥처럼 행해져 그 이름만 가진 수많은 '종북이'가 숨을 죽이는 그런 대한민국은, 결국 그들이 그렇게 혐오해 마지 않는 독재 국가 북한과 같은 나라일 텐데 말이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종북몰이, #마녀사냥, #친북, #용공, #빨갱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