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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와 인터뷰 중인 이희혁씨(우측)
 기자와 인터뷰 중인 이희혁씨(우측)
ⓒ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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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입양인들의 자살률이 북미와 오세아니아 지역의 식민지화 된 원주민의 자살률과 거의 같다는 면에서 해외입양은 노예제도와 유사하다고 기자는 생각한다. 또 서구인들이 해외입양아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고 비서구인들은 일방적으로 입양아동을 공급해주는 구조도 현대판 노예제도를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기자가 만난 한국계 스웨덴 입양인 토비아스 박사도 <스웨덴의 해외입양인과 그 다중부담>이란 논문에서 스웨덴 일반인과 해외입양인의 약물중독, 자살률 등의 차이를 비교하여 아래와 같이 밝힌 바 있다.

토비아스 자살률 자료
 토비아스 자살률 자료
ⓒ 토비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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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아스 박사가 증명했듯이 이렇게 인종간 해외입양은 해외입양인의 생명을 위협하는 비인도적 제도다. 그럼에도 G20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해외입양이 지금도 마치 인도주의적이고 선한 일인 듯이 포장되는 것에 기자는 분노를 느낀다. 우리는 아직도 학연, 지연, 또 학벌로 서로를 차별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데도 인간이 마치 인종차별의 벽을 극복했다는 듯이 인종간 해외입양을 아무렇지도 않게 추진하는 것에 대해 기자는 그래서 반대한다.

이런 생각을 하며 미국으로 입양 보내진 지 36년 만에 친모를 찾기 위해 모국을 방문한 미국입양인 이희혁씨를 지난 10월 17일 '뿌리의집'에서 만났다. 기록에 따르면 1971년 4월 24일 이희혁씨는 출생했다(해외입양인의 출생기록은 조작이 많아서 이씨도 자신의 출생기록을 확신할 수 없다). 그의 여동생 이현미씨는 1973년 2월 12일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이희혁-이현미씨 남매는 친부 이봉구씨(출생일 : 불명, 직업 : 노동자)와 친모 권정녀씨(1943년 생, 직업 : 판매원)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씨는 자기가 자라던 곳이 공동경비구역(DMZ) 부근 한 마을이었다고 추정한다. 어린 시절 그는 마을에서 미군과 한국군이 무기를 들고 마을을 통과하며 지나가던 장면, 공습경보사이렌 소리 등을 보고 들은 기억이 난다. 친부는 노동자로 생활하셨고 모친은 집에서 여동생 현미씨와 자신을 양육하며 동시에 조그만 상점을 운영하셨던 것으로 희혁씨는 기억한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이씨 남매는 친부모님과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이희혁씨가 불과 6살, 여동생 이현미씨가 4살이 되던 해인 1977년 2월 20일, 친부 이봉구씨가 갑작스런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희혁씨는 그때 엄마가 눈에 눈물이 가득한 채 자신에게 아빠의 '죽음'을 이야기한 것을 들었다.

"꼭 돌아와야 해? 그래서 엄마와 함께 춤추자! 응?"

이희혁씨와 여동생 이현미씨 입양당시
 이희혁씨와 여동생 이현미씨 입양당시
ⓒ 이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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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이 남매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친모 권정녀씨는 졸지에 어린 젖먹이 둘을 키우며 생계를 혼자 책임져야 하는 과부가장이 되었다. 권씨는 홀로 생계를 유지하며 4살짜리와 6살짜리 어린아이 둘을 어떻게 해서든지 키우고자 했다. 희혁씨는 가끔 친척들이 방문해서 엄마가 일하시는 사이 희혁씨 남매를 돌보아 주던 기억이 난다. 그런 것이 여의치 않자 한 동안 또 희혁씨 할머니가 오셔서 엄마가 일하시는 동안 손주들을 돌보아주기도 하셨다.

하지만 사회복지가 전무했던 박정희 유신독제체제하에서 사랑하는 가족이 한 지붕 밑에서 함께 살고자 하는 권정녀씨의 소박한 꿈을 이루기는 불가능했다. 희혁씨는 무엇이든 먹고 싶었지만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 배고팠던 어린 시절을 지금도 기억한다. 희혁씨는 집에 쌀이 떨어졌을 때 한번은 동네 교회에서 쌀을 가져다주던 것을 본 기억이 난다. 희혁씨가 살던 집은 한옥 단칸방이었다.

남편 이봉구씨의 갑작스런 죽음과 사별 후 권정녀씨는 낮에는 고단한 노동을 하고 밤에는 어린 자녀를 양육하며 무려 9개월을 버텼다. 그러나 마침내 자녀양육과 생계유지를 혼자 몸으로 이겨 나갈 수 없었던 권정녀씨는 극심한 생활고로 자녀양육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희혁씨는 입양기관으로 보내지기 전 날 친모와 나눈 마지막 대화(?)를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엄마는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신 채 땅이 꺼질 듯 한숨을 크게 쉬셨습니다. 그리고 6살짜리 저에게 '이제는 너와 현미를 고아원에 보낼 수밖에 없구나! 희혁아 현미를 잘 돌보아 줘야해? 알았지? 고아원에서 너희를 부자나라 미국으로 입양 보내준대. 그럼 너희들은 여기처럼 배고프지 않고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으며 배부르게 잘살게 될 거야. 알았지?' 하며 엄마는 저와 여동생을 꽉 안아주셨습니다."

특별히 엄마가 마지막으로 해준 말, "꼭 돌아와야 해? 그래서 엄마와 함께 춤추자! 응?". 희혁씨는 엄마가 자기의 작은 손을 꼭 잡으며 36년 전에 해주신 이 마지막 말을 지난 세월 동안 한 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다.

해외입양을 위한 신분세탁

이희혁씨와 여동생 이현미씨 입양당시
 이희혁씨와 여동생 이현미씨 입양당시
ⓒ 이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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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977년 11월 19일, 이희혁-이현미 남매는 서울시 도봉구 쌍문동 한국사회봉사회로 인계된다. 그리고 그의 고아 호적이 만들어진다. 입양을 보내려면 '고아'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희혁씨 남매의 신분세탁이 어른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로부터 8개월 후인 1978년 7월 23일 희혁씨 남매는 미국 '싱글맘'에게 해외입양 보내진다. 영문을 모르던 희혁씨는 당시 감회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해외입양이 뭔지 어린 저도 남의 일처럼 궁금했지요. 또 엄마와 헤어진 것 때문에 속에서는 왠지 모를 벅차오르는 슬픔을 느꼈지요. 동시에 어른들이 우리 남매가 부자나라 미국으로 간다고 하시니 약간은 흥분했고요."

1978년 7월 미국 뉴욕 JFK공항에 4살 여동생 현미씨의 손을 잡으며 내린 6살 소년 희혁씨는 자기 미국 새 가족이 누구일까 궁금했다. 희혁씨 남매를 공항에 마중 나온 입양엄마는 남편이 없는 싱글맘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입양엄마는 희역씨 남매에게 전에 본 적이 없는 맛있는 음식을 주었고 희혁씨는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달콤한 오렌지주스에 매료되었다.

처음 학교에 간 날 한 백인소년이 학교건물에 들어가기도 전 학교마당에서 희혁씨를 '짱꼴라(chink)'라고 소리치며 놀려댔다. 그 소년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자기를 놀리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희혁씨는 어느새 그 소년의 입에 주먹을 날렸다. 그리고 피를 흘리는 그 소년에게 "난 한국인이야!"라고 소리쳤다. 희혁씨는 자기를 놀리는 미국학생들과 수시로 주먹을 휘두르며 싸웠다. 하루도 안 싸울 날이 없을 정도로. 어느 새 그는 미국학교에서 싸움꾼으로 통했고 이제 아무도 그를 놀리지 않았다.

입양인 친구의 자살

이희혁씨 입양당시 여권
 이희혁씨 입양당시 여권
ⓒ 이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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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어느덧 미국입양생활 10년이 지났다. 어느 날 희혁씨는 자기와 10년 전 한국에서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같은 동네로 입양 보내진 16세 소녀 크리스타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충격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그녀의 자살 소식에 희혁씨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자살은 희혁씨에게 자기가 꼭 미국 아이들보다 더 잘해야겠다는 결심을 심어주었다. 또 자신을 외모부터 '괴짜(freak)' 취급하는 미국아이들에 대항해 희혁씨는 더욱 괴짜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아이들의 시각을 의식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청소년기를 보냈다.

학교에서의 인종차별은 희혁씨가 주먹으로 해결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미국 가족의 인종차별이었다. 처음 입양엄마의 엄마, 즉 할머니를 만났을 때 할머니는 입양엄마에게, "저런 짱꼴라(chink)를 절대 우리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라며 소리치셨다. 물론 할머니의 그 소리는 희혁씨에게 지울 수 없는 아픔이 되었다. 입양엄마는 격렬한 논쟁 끝에 결국 할머니가 희혁씨 남매를 손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저런 짱꼴라를 절대 우리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입양을 위해 세탁된 이희혁씨 고아호적, 주민번호가 없다
 입양을 위해 세탁된 이희혁씨 고아호적, 주민번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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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입양엄마는 뉴저지주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었고 열정과 애정이 있는 싱글맘이었다. 지금 입양엄마는 은퇴하여 노후를 보내고 있고 희혁씨 여동생 현미씨는 딸 셋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지금 희혁씨는 알라스카에서 어부를 하며 지낸다.

희혁씨는 지난 36년간 하루도 친모 생각을 안 한 적이 없다. 특별히 친모가 남긴 말, "꼭 돌아와야 해? 그래서 엄마와 함께 춤추자! 응?"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뛰어오르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지금은 가슴 아프게도 친모의 얼굴을 기억할 수 없군요. 그러나 친모를 한 순간도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희혁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동안 여러 사정으로 모국을 방문할 수 없었던 희혁씨는 입양 보내진 지 36년 만에 처음으로 친모를 찾으러 방한한 것이다. 인촌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자기를 입양 보낸 한국사회봉사회를 찾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친모에 대한 기록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다음은 희혁씨가 친모 권정녀씨에게 전달해달라며 기자에게 남긴 마지막 한마디다.

"엄마, 너무 사랑하는 것 아시죠? 엄마의 희생에 감사드립니다. 난 엄마가 우리 남매를 입양 보낸 것에 대해서 서운한 것보다는 고마움과 측은한 마음밖에 없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혼자서 어린 저희 둘을 키우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셨어요. 엄마 말씀대로 제가 꼭 돌아왔으니 이제 약속대로 제 손을 잡고 춤추셔야죠?"

덧붙이는 글 | 이희혁씨를 알아보시는 분은 '뿌리의집'(02-3210-2451)으로 연락 바랍니다.



태그:#입양, #이희혁, #토비아스, #뿌리의집,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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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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