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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금은 뭐고 와당은 뭐야?

유금 와당박물관 외관
 유금 와당박물관 외관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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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4일, 유금 와당박물관으로부터 박물관 문화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와당에 대한 기초 강의를 듣고 박물관을 관람한 다음, 와당 탁본 체험을 하는 것으로 프로그램이 구성돼 있었다. 약 2시간 정도면 강의와 관람 그리고 체험을 다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문화와 문화유산을 연구하는 예성문화연구회원은 시간을 내 오전 10시 전에 유금 와당박물관에 도착했다. 우리는 유금 와당박물관 유창종 관장과 인사를 하고 바로 강의실로 들어간다.

그럼 와당은 뭐고, 그 앞에 붙은 유금은 또 뭘까? 와당(瓦當)은 쉽게 말해 지붕의 끝을 마감하는 막새기와의 한자식 표현이다. 기와는 점토를 일정한 형태로 틀에서 뜬 다음 이를 구워 지붕을 덮는 데 사용하는 건축 자재다. 이들 기와 중 막새기와는 문양으로 장식했기 때문에 예술성과 미학성을 갖게 됐다. 그리고 시대별로 일정한 양식이 있기 때문에 편년을 정하는 데도 중요한 근거자료가 됐다. 때문에 100여년 전부터 와당을 수집해 연구하게 됐고, 그러한 노력이 2008년 유금 와당박물관의 개관으로 이어진 것이다.

유창종 관장(오른쪽)과의 간담회
 유창종 관장(오른쪽)과의 간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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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금이라는 박물관의 이름은 박물관장인 유창종의 '유'와 아내 금기숙의 '금'이 합쳐져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유창종 관장은 현직에 있을 때 주업을 법률로 하고 부업을 와당으로 해서 기와검사 또는 와검사라 불리기도 했다. 공직에서 퇴임하고 나서는 완전히 와당 연구학자로 돌아서, 와당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그는 지금 중국의 와당에 빠져 1년의 절반은 중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아내인 금기숙 역시 홍익대학교 의상학과 교수로, 와당의 문양을 복식에 응용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우리는 세미나실로 이동해 잠깐 유창종 관장과 대화를 나눴다. 사실 유창종 관장과는 구면이다. 왜냐하면 그가 1979년 예성문화연구회 초대회장을 지냈기 때문이다. 유 관장은 1978년 초임검사로 충주지청에 발령받아 막 문화유산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문화유산에 관심이 있는 충주지역 사람들과 예성동호회를 결성해 주말에 탄금대·중앙탑·봉황리 등 주변의 문화유산 답사를 하곤 했다는 것이다.

중앙탑 주변에서 발견한 연화문 수막새
 중앙탑 주변에서 발견한 연화문 수막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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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중앙탑 주변을 답사하다 연화문 수막새를 처음 보게 됐는데, 그 문양이 너무 아름다워 기와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유창종 관장은 기와와 인연을 맺게 됐고, 현재 국내 최고의 기와전문가가 됐다. 그는 우리에게 1979년 2월 24일 충주 고구려비를 발견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설명을 했다. 그가 충주를 떠나는 것을 기념해서 한 마지막 답사에서 비석의 글자를 발견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후 이 비석은 단국대학교 박물관팀에 의해 연구되어 고구려비로 밝혀졌고, 1981년 3월 18일 국보 제205호로 지정됐다.

와당의 기초 공부하기

한중일 와당 비교
 한중일 와당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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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담회 후 신은희 학예연구실장이 들어왔다. 그는 파워포인트를 활용해 우리에게 와당과 도용에 관한 기초 강의를 한다. 와당의 역사는 대개 서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한(漢)대에 와당의 사용이 일반화됐다. 이때부터 미학성을 고려해 와당에 문양을 넣게 됐고, 기능성과 예술성을 따지게 됐다. 위진남북조시대가 되면서 와당은 불교와 함께 한국과 일본으로 전래됐다.

와당은 가장자리 주연부와 가운데 문양부로 나눠진다. 둥근 테두리 형태의 주연부는 시대에 따라 폭과 높낮이가 다르다. 그리고 주연부에 구슬장식(連珠文)이 들어가기도 했다. 문양부에는 꽃·식물·구름·도깨비·동물 등이 표현됐다. 이들은 구도·높낮이·문양의 유무에 따라 유형과 양식이 구분된다. 가장 많이 보이는 연화문(蓮花文) 수막새의 경우, 자방(子房)과 연자(蓮子) 그리고 자엽(子葉)의 구도와 모양에 따라 양식이 달라지고 시대가 달라진다.

말 타는 여인 도용
 말 타는 여인 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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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문양을 보면 그 시대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부터 진·한대까지는 구름무늬가 유행했다. 지금 우리가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연꽃무늬는 불교가 공인된 동진시기에 출현한다. 연꽃무늬는 남북조시대부터 당나라 때까지 가장 많이 나타난다. 당나라 후기부터 모란과 식물 등 화초무늬가 나타났고, 도깨비 얼굴과 동물무늬도 유행하게 됐다. 그러므로 송·금시대에 이르면 와당의 문양이 훨씬 다양해지게 된다. 
  
그럼 도용(陶俑)은 대체 무엇을 말할까? 질그릇 도, 허수아비 용이니, 흙을 빚어 만든 인물 또는 동물상을 말한다. 고대에는 주로 주술과 상징적인 의미로 만들었으나, 후대로 오면서 의례용·부장용으로 사용됐다. 그러므로 도용은 대부분 왕과 귀족 등 상류층 무덤에서 출토된다. 도용은 와당과 달리 조형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색채까지 지니고 있어 인물뿐 아니라 복식 등에 대한 연구를 병행해야 한다. 그리고 매혹적인 자태와 화려한 색채까지 보여주기 때문에 실생활에 응용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중국 양주 와당 이야기

도깨비 얼굴무늬
 도깨비 얼굴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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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듣고 난 우리는 서쪽 전시실로 가 중국의 양주(揚州) 와당을 살펴봤다. 양주는 강소성(江蘇省)의 중남부에 있는 도시로, 장강 하류에 있다. 장강은 하류에 이르러 수많은 호수를 만들어냈으니 소주의 태호(太湖), 홍택의 홍택호(洪澤湖) 등이 유명하다. 양주는 26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고도(古都)다. 그리고 장강과 경항(京杭)대운하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상업도시다. 그래서 대운하가 개통되는 7세기부터 10세기까지 가장 번성했다. 수(隋)나라 황제 양제가 양주를 중국의 남쪽 수도로 삼았기 때문이다.  

당(唐·618~907)나라 때에는 대외교역을 도맡았고, 경제와 문화도시로 번성할 수 있었다. 10세기 초에는 오(吳·907~937)의 수도가 된 적도 있다. 그래서 양주에서는 진·한대부터 명대까지 와당이 다량으로 출토된다. 또 양주 와당은 구름무늬·연꽃무늬·도깨비얼굴무늬·동물무늬·식물무늬 등 다양한 문양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양주와당은 양과 질 모두에서 중국 와당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연꽃무늬 와당
 연꽃무늬 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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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대의 양주 와당은 구름무늬가 가장 많다. 연꽃무늬는 불교가 공인되는 동진시대부터 나타난다. 연화문 와당은 그 후 와당의 대명사가 된다. 그러므로 꽃잎의 형식, 연주문의 유무, 주연부의 높이가 시대를 구분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양주에서 출토되는 연화문 와당은 시기와 양식에 따라 남조(420~588), 남조 말~당 초기(6세기 말~7세기 초), 당 초기~중기(7세기 초~8세기 말), 당 중기~말기(9세기 초~907)의 네 시기로 구분된다.

성당 시기 와당
 성당 시기 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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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 와당의 특색은 주연부가 높다는 것이다. 수나라의 통일로 위진남북조시대가 마감되면서 주연부가 낮은 북조 와당이 유입되어 주연부가 점차 낮아진다. 수·당대에 이르러 와당의 주연부는 평면에까지 이른다. 와당을 통해 남조와 북조의 양식이 융합하고 발전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성당시기에는 원형·보주형·하트형의 연꽃무늬가 나타나고, 자방 부위가 볼록하게 솟아오른 와당이 유행했다. 양주에서는 이처럼 수·당대의 와당이 가장 많이 출토된다. 당 말기에 이르면 모란무늬·초화무늬·동물무늬·도깨비얼굴무늬 등이 나타난다.  

수·당시대의 도용 살펴보기

당나라 시대 부인용
 당나라 시대 부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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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용은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의 문화와 사회상을 반영한다. 인물상은 특히 당시의 얼굴 모양·복식·생활습성 등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도용에 대한 연구는 와당보다도 복합적인 관점에서 이뤄져야 한다. 수·당시대는 이러한 도용의 예술성이 최고조에 달했을 뿐 아니라 다양성에 있어서도 다른 시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 시대에는 황금색 유약(黃釉)이 사용된 도용들이 많이 발견된다. 황유도용의 인물에서는 우아한 자태와 은은한 아름다움이 뿜어져 나온다.

내 눈은 먼저 아름다운 당삼채를 향한다. 당삼채는 당나라 때 만들어진 채색 도용이다. 붉은색·노란색·초록색이 주류를 이룬다. 머리를 치켜 올린 부인용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풍만한 얼굴에 넉넉한 품의 저고리와 긴 치마를 입었다. 그 옆에도 부인용이 있는데, 손의 모습이나 머리 모습, 의복이 전혀 다르다. 더 멋진 것은 말을 타는 여인의 모습이다. 말의 역동성과 여인의 요염함이 잘 나타나 있다.

호인(胡人)과 낙타 도용
 호인(胡人)과 낙타 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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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만들어진 도용은 당삼채에 비해 색감이 떨어진다. 그렇지만 사실적이고 인간적이다. 무덤을 지키는 동물 진묘수(鎭墓獸), 무덤의 주인을 호위하는 문관과 무관, 시종과 시녀 등이 보인다. 그리고 서역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호인(胡人)과 그들이 타고 다니는 낙타가 있다. 더 나가 살아있을 때 존재했던 달과 오리·소·양 같은 동물, 생활에 필요한 토기와 부뚜막 같은 것도 보인다. 무덤의 주인은 이들과 함께 하며 영생을 누렸던 것이다.

이러한 도용을 통해 우리는 수나라 시대 생활상을 알 수 있다. 여인들은 머리를 틀어 올렸고, 남자들은 상투를 틀고 망건을 썼다. 문인들은 사모관대를 착용했고, 무인들은 갑옷을 입고 투구를 썼다. 시종들은 좀 더 단순한 복장에 다소곳한 자세다. 말을 탄 도용을 통해 이 당시 지위가 높은 사람은 말을 탔음을 알 수 있다. 서역인은 말이 아닌 낙타를 타거나 끄는 모습을 보여준다. 1300~1400년 전 사람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탁본체험도 하고

사슴무늬 와당 탁본을 들어보이는 필자
 사슴무늬 와당 탁본을 들어보이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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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당과 도용을 보고 난 우리는 다시 세미나실에 들러 와당 탁본체험을 한다. 탁본은 일반적으로 비석을 많이 한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목판과 같은 활자를 탁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특이하게도 기와를 탁본한다. 기와는 글씨보다 입체감이 훨씬 크기 때문에 탁본이 쉽지 않다. 그래선지 탁본 재료를 좀 더 세심하게 준비했다. 먼저 솜방망이를 좀 더 둥글게 만들었다. 잉크도 번짐이 덜한 것으로 준비했다.

우리는 과거에도 여러 번 탁본을 해 보았기 때문에 와당 탁본에 금방 적응한다. 그래도 만족스럽지 못해 두어 번 더 시도를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사슴 문양이 새겨져 있는 와당을 탁본해 본다. 연꽃무늬나 당초문 같은 것은 수없이 봐 왔기 때문이다. 양 발과 뿔 그리고 몸통과 머리의 대비가 참 역동적이다. 다른 회원은 사람 얼굴 무늬나 도깨비 문양을 선택하기도 한다. 

청주와당 전시 포스터
 청주와당 전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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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본체험을 마치고 우리는 박물관 정원에서 유창종 관장 부부와 기념촬영을 했다. 유금와당박물관은 2008년에 개관한 와당 전문박물관이다. 종로구 부암동에 자리 잡고 있으며, 한국·중국·일본의 와당과 도기를 전문적으로 수집해 연구하고 또 전시한다. 개관전으로 '한국와당, 수집 100년 명품 100선' 전시를 한 이래 매년 다른 주제의 전시회를 열고 있다. 현재는 '황유도용'(2013년 5월 24일부터 2014년 3월 29일까지)과 '중국 청주와당'(2013년 10월 18일부터 2014년 9월 25일까지) 전시가 열리고 있다.

유창종 관장은 현재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살고 있다. 중국의 대학에서는 양주와 청주와당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그는 학술세미나에서 중국어로 발표할 정도로 중국어 구사능력이 뛰어나다. 그리고 최근에는 일본의 와당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일본의 와당을 좀 더 정확히 알고 가르치기 위해 일본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한다고 한다. 유 관장은 이제 기와검사에서 기와박사로 변신해 와당과 함께 살고 있다.


태그:#유금 와당박물관, #와당, #도용, #양주 와당, #수당시대 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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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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