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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꾸눈 광대'의 배우 이지현씨가 공연 직전 관객을 맞이하고 있다.
▲ '애꾸눈 광대'의 배우 이지현씨 '애꾸눈 광대'의 배우 이지현씨가 공연 직전 관객을 맞이하고 있다.
ⓒ 유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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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때 다쳤는데, 그걸 아직도 감추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냥 잊고 싶은 거죠."

조금 전까지 쾌활하던 배우 이지현(61)씨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차분해졌다. 그가 출연하는 1인극 <애꾸눈 광대> 공연을 1시간 정도 앞두고, 11일 서울 마포의 공연장 앞에서 기자와 잠시 만난 자리였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공연을 하고 있지만, 무대가 아닌 곳에서 당시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은 듯했다. 아마, 그 자신이 80년 5월 광주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씨는 5·18 민주화운동의 당사자이자 피해자다. 당시 고향인 광주에 잠시 내려갔던 그는 계엄군에게 폭행당해 한쪽 눈을 잃었다. 5·18 직후는, 사회의 공공연한 차별 때문에 광주가 고향이라는 것을 숨기고 사는 이들도 적지 않던 때였다. 그러나 그는 되레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일에 투신했다. 쉽지 않은 길이었고, 그래서 그와 가족들은 많은 상처를 받았다.

5·18 당시 계엄군에게 한쪽 눈을 잃고 일생을 민주화운동에 바쳤던 사내가,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집을 나간 아들을 찾아 헤맨다는 내용의 <애꾸눈 광대>는 이지현씨의 이런 실제 삶에 약간의 살을 붙인 자전적 연극이다. 일부 각색된 부분도 완전한 허구가 아니라, 다른 광주시민들이 겪었던 사례들이라고 했다.

5·18을 주제로 한 다수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애꾸눈 광대>는 사건 당시의 참상보다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스러운 여생과 가족 해체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아들'을 찾는 것으로 표현되는 이 연극에서, 진짜로 찾자고 말하고 싶은 건 나보다 서로를 먼저 위했던 '오월 공동체'"라고 했다.

이야기를 마치고 헤어진 지 30여 분이 흐른 뒤, 공연장 앞에서 광대 복장을 갖춘 이씨를 다시 마주쳤다. 조금 전까지 유쾌하지만 깍듯한 중년 신사였던 그는, 어느덧 완벽한 '광대'로 변신해 있었다.

거침없고 유쾌하게... '5월 광주'를 회상하는 또 다른 방법

"아따 오느라 고생들 허셨소!"
"만나서 반갑소~."


공연 초반, 예상과 달리 분위기는 무겁지 않았다.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거침없이 쏟아내며 등장한 '애꾸눈 광대'에게,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전라도 사투리로 화답했다. '아들을 찾습니다'란 문구와 사진이 있는 입간판을 세워놓고, 그는 장터에서 품바 공연을 하듯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며 관객들의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

그가 지나온 세월을 보여주듯, 무대 뒤편 스크린에서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의 참혹한 사진과 영상이 흘러나왔다. 어쩌면 기억하기조차 싫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는 담담하게, 광대다운 익살과 농담을 섞어 가며 그날의 공포와 자신이 겪은 정신적 트라우마를 풀어놓았다. 객석에서는 쉴 새 없이 웃음소리가 나왔지만, 중간중간 공감을 표시하는 외침과 박수도 터졌다.

한 시간 남짓의 짧은 공연인데도 퍼포먼스는 다양했다. 판소리, 마술, 서커스에 성대모사까지. 자칫하면 산만해 보일 수도 있는 구성이었다. 그럼에도 관객들의 몰입도는 높았다. 그 까닭은 그 아래에 '5·18의 상처'라는 공통된 흐름이 있었다는 데 있다.

<애꾸눈 광대>는 자신의 상처를 읊는 판소리에 관객이 추임새를 넣도록 유도하면서, 또는 감쪽같은 역대 대통령들의 성대모사로 민간인 학살의 책임을 익살스럽게 추궁하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5·18을 조금 더 편안하게 직시하도록 만들었다. 마치 의사들이 정신적인 상처를 치유하기 전에, 먼저 환자가 그 상처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훈련을 시키듯이.

"잘들 가씨요오..." 상처는 남았지만 '씻김'을 소원한다

11일 '애꾸눈 광대' 공연이  열렸던 서울 마포아트센터 플레이맥 극장에 공연 포스터가 붙어 있다
▲ 연극 '애꾸눈 광대'의 포스터 11일 '애꾸눈 광대' 공연이 열렸던 서울 마포아트센터 플레이맥 극장에 공연 포스터가 붙어 있다
ⓒ 유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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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5막으로 구성된 극 속에서 2막까지가 '상처를 편히 바라보는 훈련'이었다면, 3막부터는 본격적으로 그 아픔을 표현하는 과정이 시작된다. '애꾸눈 광대'는 1980년 5월, 전남도청에서 있었던 시민군과 계엄군의 마지막 싸움에 참여하지 못했던 자신의 비겁함을 고백한다. 이후 그는 죄책감과 부채감을 견딜 수 없어, 5·18 정신을 계승하는 일에 자신의 일생을 바치기로 했다. 그러나 가족들은 가장의 부재를 견디지 못하고, 급기야 가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들은 집을 나가고 동생은 자살을 기도한다. 어머니는 남편 노릇, 자식 노릇 못 하는 아들에게 역정을 내고 아내는 "넘의 집 불만 끄고 다니면 다요? 오월이고 광주고 내 집이 먼저 있어야제!"라며 가정에 무심한 남편을 타박한다. 그 가운데서, 그는 고립된 채 절규한다.

"누구는 데모허고 싶어 허는 줄 알어? 이렇게라도 안 허면 복장 터져 죽을 것 같아서 그래!"

이 외침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이, 당시에 죽거나 다친 이들에게만 상처를 남긴 일이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게 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당시의 공포와 혼자만 살았다는 죄책감에 평생을 시달렸고, 그 혼란이 대를 이어 가족 전체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광주에서, 이런 일은 비단 '애꾸눈 광대'의 가족에게만 일어났던 것이 아니리라.

그럼에도, '애꾸눈 광대'와 광주는 다시 치유를 준비한다. 공연 말미, 그는 '씻김굿'을 통해 80년 5월에 희생된 영령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좋은 곳으로 가기를 기원한다.

"성님, 누이, 잘들 가씨요오…."

이것이 단순한 픽션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일까. '씻김굿' 공연을 돕기 위해 무대 위로 뽑혀 나온 관객들의 표정이 자못 숙연했다. 80년의 광주를 겪었음직한 연배의 관객에게는 공감의 기색이, 사건을 책으로만 접했을 내 또래 젊은 관객의 얼굴에는 이해의 눈빛이 감돌았다.

'5월 광주'를 겪지 않은 이들도 교과서와 자료를 통해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얼마나 치열했고 참혹했는지는 알고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그것이 개개인의 삶에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그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다가오는지는 감히 실감하기 어렵다. 실제로 5·18이 남긴 상처를 아직까지 간직한 이가 용감하게 자신의 털어놓는 연극 <애꾸눈 광대>는, 그 간극을 조금 좁힐 수 있는 좋은 시도가 아닐까.

극을 마무리하며, '애꾸눈 광대'는 이렇게 말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한쪽 눈을 잃은 것은 결국 한눈 팔지 말고 쭉 한 길로 가라는 뜻인 것 같소. 한쪽 눈을 잃은 것이 아니고, 세상을 바로 볼 한쪽 눈을 얻은 것이제."

그의 '바른 눈'이 쭉 용기를 잃지 않기를, 그리고 그를 통해 우리 사회가 1980년의 광주를 더 따뜻하게 보듬을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

<애꾸눈 광대> 전국 순회공연 일정
1. 서울공연
일시 : 2013.10.11 (금) 20:00 / 장소 : 마포아트센터 플레이맥 / 문의 : 마포문화재단 02-3274-8600

2. 전주공연
일시 : 2013.10.12 (토) 15:00 / 장소 : 한국전통문화전당 공연장 / 문의 : 문화영토 판 063-232-6788

3. 부산공연
일시 : 2013.10.13 (일) 15:00 / 장소 : 부산민주공원 소극장 / 문의 : 부산민주공원 051-790-7417

4. 인천공연
일시 : 2013.10.14 (월) 19:30 / 장소 : 부평문화사랑방 / 문의 : 인천민주평화인권센터 032-862-5353



태그:#5.18, #애꾸눈 광대, #이지현,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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